- 165화 -
떠올리기 싫은 지난날의 회상에 빠져 있던 준성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휑하다 못해 삭막한 느낌까지 드는 건물 안.
3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굳은 핏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던 깔끔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눈을 돌리는 족족 군데군데 묻어있는 피가 보였다. 벽면, 기둥, 유리창 등, 피 묻은 손자국이 곳곳에 찍혀 있다.
‘준비’를 끝마치고 손전등을 끈 채 내부를 훑어보던 준성은 사방이 충분히 조용해지는 걸 기다렸다.
마치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별도의 공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요해졌을 즈음, 그제야 발걸음을 내디뎠다.
일부러 손전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두컴컴하긴 해도 지금은 해가 충분히 쨍쨍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만으로도 다른 불빛 없이 어둠을 뚫고 나아가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부가 전부 밝았던 건 아니다.
제법 큰 상가 건물의 가운데 라인에 위치한 곳들은 전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그곳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낡은 에스컬레이터 역시 내리쬐는 빛이 닿지 않는 위쪽 부분은 빛이 닿지 않아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었다.
미리 비상계단을 전부 봉쇄해둔 이상, 준성은 그 에스컬레이터를 직접 계단처럼 이용하며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1층 에스컬레이터를 반쯤 올랐을 무렵.
1층에 비해 창문이 극히 적은 2층부터는 워낙 어둠이 짙었기에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하나 꺼내 들었다. 준비에 쓰느라 딱 두 개 남아버린 라이터가 자그마한 불을 내뿜으며 시야를 확보해 주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테스트해봤던 대로, ‘그들’은 바로 지척에 있지 않으면 이 정도 불빛엔 그리 강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준성은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는 상가들을 눈으로 훑으며 숨죽인 발걸음을 재차 내디뎠다. 어둠에 잠식된 공간을 라이터 하나에 의지한 채 계단을 오르는 그의 발소리가 아주 작게 퍼져 나갔다.
5층에 다다른 준성은 상가 옥상 문 앞에 서서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같네.’
꿈속에서 오피스텔 옥상에 올라, 자신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남기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문을 열면 혹시 그때처럼 그가 서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겁에 질린 듯 삐걱거린다.
하지만 준성은 돌아서는 법 없이 문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약간의 마찰음과 함께 막힘없이 문이 열렸다.
상가 옥상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상가 내부와 달리 쾌청한 맑은 빛만이 내리쬐고 있을 뿐.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 있는 휑한 옥상을 응시하던 준성이 한 발을 내뻗었다.
‘남기혁.’
옥상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가며 등에 멘 백팩을 내렸다. 제법 가벼워진 백팩에서 커피 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난 더 이상 너와 만나고 싶지 않았어.’
심지가 곧게 뻗어 나와 있는 작은 캔을 흔들어 보았다. 속삭이는 듯한 가벼운 소리가 잘그락거린다.
‘다시 만나버리면 그땐 정말로 ‘현실’이 될 것 같았거든.’
남기혁과 함께했던 날들을 다시금 곱씹어보던 준성이 심지 끝에 라이터를 가져갔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진짜 현실은, 지금 이 순간이다.
남기혁이 바라던 꿈 같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작게 피어오른 불덩이가 꼿꼿이 서 있던 심지를 바싹 태워 갔다.
‘더는 도망치지 않겠어.’
준성의 머릿속에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장대욱의 얼굴이 떠올랐다. 펑펑 울며 안겨들던 여동생 강채이도 생각나고, 서창민을 비롯한 동료들의 얼굴 역시 하나둘 속속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어딘가가 노크 당하는 것 같은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내가 죽을 거 같으면 네가 살려주는 거지?”
머릿속에 도한서의 야릇한 눈웃음이 그려진다. 예쁘게 휘어지던 입매가 눈에 선하다.
“약속했잖아. 내가 죽을 뻔하면 네가 죽여주고, 네가 죽을 뻔하면 내가 죽여주기로.”
자신이 약속했던 것처럼, 그 역시 제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그렇다면 도망치기만 해선 안 된다. 외면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은 수많은 그물에 둘러싸여 끌려가게 될 테고, 그때처럼 제 사람들이 눈앞에서 하나둘 처참히 토막 나게 될 것이다. 인질로 붙잡아둔 인간들 또한 제게 바치는 한낱 놀잇감이 되어 비명을 질러대겠지.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꿈과 달리 ‘현실’을 재시작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네가 날 살인자로 만든 게 아니야.”
“드디어 내 행위가 정당해질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준 거지.”
그러니 도한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행할 행위에 부여된 정당성만을 생각하려 한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심지를 태운 불꽃이 캔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걸 확인한 준성이 그것을 바닥에 세운 채 뒤로 물러났다. 얼마 되지 않아 캔의 입구에서부터 뿌연 연기가 빠르게 치솟아 올랐다.
높이 피어오르는 연막을 바라보며 준성은 등허리에 매여 있던 마체테를 단숨에 뽑아 들었다. 군데군데 좀비들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지만, 예리한 칼날만큼은 여전해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무표정하던 준성의 입가가 곡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진짜 죽여줄게.”
시야를 가린 연막 속에서 준성의 미소가 짙게 흐드러졌다. 그 미소는 남기혁과의 마지막 순간에 지었던 광기 섞인 미소와 사뭇 닮아 보였지만, 분명하게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 * *
차창 밖으로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막을 바라보던 남기혁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기특하네, 우리 준성이.”
눈빛과 달리, 남기혁의 미소는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를 통해 남기혁을 보고 있던 우석진은 무전기를 들어 부하들에게 연막 쪽으로 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길을 방해하는 좀비들을 무자비하게 쳐내며 앞서 달리던 튼튼한 승합차가 석진의 지시에 따라 방향을 틀고, 두 사람이 탄 승용차 역시 바짝 뒤를 따랐다.
무전기를 내려놓은 석진이 백미러에 비친 남기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남기혁은 여전히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연막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준성이가 나 죽이려고 함정 파놨을까 봐?”
키득거리던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원래 준성이가 좀 앙탈이 심해. 그래서 귀여운 거지만.”
“…….”
석진은 일견 즐거워 보이는 남기혁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괜찮냐고 물은 부분은 그런 게 아니었고 기혁 역시 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일부러 다른 쪽으로 대답하며 회피했다. 직접적으로 재차 물어봐야 제대로 답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석진아.”
“예, 형님.”
남기혁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안경을 살짝 치켜올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왼쪽 눈에는 출발하기 직전에 구해다 쓴 하얀 안대가 있었다.
“위면동 아지트 지하에 형이 그간 모아둔 게 좀 있어. 일 끝나면 애들한테 전부 나눠줘. 네 몫은 좀 더 챙겨가고.”
그 말에 석진이 화들짝 놀라며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형님,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뭘 그렇게 놀라? 애초에 애들한테도 이번 건은 목숨값 크게 준다고 말했잖아. 해외라도 나가서 다들 잘 먹고 잘 살자고.”
남기혁의 말대로, 그의 부하들은 전부 ‘목숨값’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산산이 조각난 자들.
세상으로부터 가혹한 손가락질을 받으며 나락의 음지에서 버텨야 했던 자들.
존재 자체가 기록되지 않고 버려진 그림자 같은 자들.
남기혁 본인 역시 그 흔한 호적조차 없는 자로서 어릴 때부터 이 집단의 일원으로 키워졌고, 반년 전부터는 아예 그 본인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선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부하들에게 지급할 ‘목숨값’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그것은 좀비가 만연한 지금과 같은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다 같이 ‘현실’을 살자는 얘기를 하는 거야.”
남기혁의 시선이 그제야 정면을 향해 돌아, 우석진을 마주한다.
“준성이가 내 ‘현실’이야.”
기혁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났다.
“이제 꿈이라면 지긋지긋해.”
석진은 기혁의 눈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면으로 고개를 향한 석진이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막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손이 운전대를 부러뜨릴 것처럼 꽉 붙잡았다.
반년 전, 사방이 피로 얼룩진 어느 날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잔인하게 도륙 난 한 사람의 사체를 밟으며 돌아보던 남기혁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왜? 내가 피 뒤집어쓰니까 이상해? 무서워?”
“…아뇨.”
“그런데 왜 그렇게 봐? 너답지 않게.”
“그냥…….”
그때는 우석진이 감히 생각해보지도 못한 복수를 남기혁이 대신해주던 날이었다.
“형님이 너무, 눈부셔서요.”
남기혁이 보여준 그때의 미소는 지금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석진은 그저 그때처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남기혁이 원하던 대로 그가 꿈에서 깰 수 있기를.
그때처럼 ‘현실’을 쥘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