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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56)화 (156/240)

- 156화 -

준성은 다시 시작하게 된 회차에서 또다시 남기혁을 찾아갔다.

처음부터 이것저것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저 똑같이 시작하되, 몇 번에 걸쳐 남기혁을 좀 더 눈여겨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번에 처음 만난 척, 염탐하지 않는 척, 은밀하게 그를 중점적으로 관찰했다.

기혁에게 바로 찾아가서 묻지 않고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졌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기혁의 성정 파악, 그리고 그가 다른 회차에서도 똑같이 자신을 구할 정도로 헌신적인가에 대한 의문 해소를 위해서였다.

각 회차의 결말은 언제나 같았다.

남기혁은 매번 강준성을 구하다 죽었다.

그렇게 기혁이 죽고 나면 홀로 남겨진 준성이 스스로 자살을 택하거나 다른 좀비에게 물려 숨을 거뒀고, 다시 꿈이 시작되면 2일째에 맞춰 기혁을 찾아갔다.

준성은 그렇게 다섯 번의 경험을 차곡차곡 누적한 후에야 기혁에게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저 아세요?”

2일째, 오피스텔 옥상에 이제 막 올라오자마자 대뜸 내뱉은 질문이었다.

기혁은 고개를 갸웃하기만 할 뿐, 이상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왜? 알 것 같아?”

“네.”

“알기야 알지. 저쪽 병원에 들어갈 때부터 보고 있었는걸.”

“그전에는요?”

“글쎄.”

남기혁의 대답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같은 걸 다시 물어도 연신 빙긋이 웃으며 애매한 대답만 해줄 뿐이다.

사실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대답해도 준성의 의문은 딱히 해소될 길이 없었다.

준성으로서는 남기혁이라는 남자를 바로 이전 회차에서 처음 보았다. 그렇다는 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그럴듯한 교류조차 없었다는 건데, 그런 사이에 무슨 몸 바쳐 지키고 구할 만큼의 관계가 뭐가 있을까.

“나는… 네가 죽는 걸 ‘또’ 보고 싶지 않아….”

게다가 기혁은 ‘또’라고 말했다.

기혁의 행동, 그리고 그가 말한 ‘또’라는 글자 안에 수많은 의문이 켜켜이 쌓여갔다. 그 의문은 준성의 입을 통해 아주 직설적으로 튀어나왔다.

“제가 죽는 걸 본 적은요?”

“…….”

기혁의 여유롭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가 죽는 걸 본 적 있냐고요.”

준성은 순간, 어딘지 모르게 기혁의 지뢰를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유롭던 얼굴이 딱딱히 굳어버리고, 해맑아 보이던 눈동자가 삽시간에 어둠으로 찌들어갔다.

그래서 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자신을 알고 있다.

그것도 ‘죽어가는 자신’을.

‘말도 안 돼.’

현실에서의 강준성은 아주 멀쩡히 잘 살아있다. 자신이 죽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꿈속에서 만났던 사람들뿐이다. 그들조차 이 세계가 리셋(Reset)되어 1일째로 돌아가면 이때까지 쌓아온 동료로서의 관계도 모두 잊게 된다.

결국, 이 세계에 그들 모두를 기억할 수 있는 건 강준성 한 명뿐이다.

여태까지 쭉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응.”

그 절대적인 사항에 약간의 균열이 있다는 걸 알았다.

“너무 많이 봤어.”

준성에게 다가간 기혁이 그의 얼굴을 쓸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물려 죽던 거, 다른 사람 구하다가 빌딩에서 떨어져 죽던 거, 미끼가 되어 대신 죽던 거, 어떤 개새끼가 협박에 굴하지 않는다고 네 배에 칼 쑤셔 박던 거, 네 말은 믿지도 않고 미친놈이라고 몰아서 패 죽이던 거…….”

남기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여러 장면이 준성의 머릿속에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꿈에서 맞았던 강준성의 결말 중 일부다.

전부, 있었던 일이다.

‘어떻게?’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는 준성을 보며, 기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친놈 같지? 알아, 나도.”

씁쓸한 표정의 기혁이 이제껏 다른 회차에서는 선뜻 말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나는 ‘꿈’에서 네가 죽는 걸 수없이 봐왔어.”

“뭐…라고요?”

준성의 반쯤 얼빠진 얼굴을 보며 기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사실이야.”

기혁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건 인한병원이었다.

“나는 한 달 정도 매일 악몽을 꿔왔어.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죽는 꿈’을, 마치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감상하듯이.”

인한병원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기혁의 눈이 잔뜩 흔들리는 준성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냥 이 사람이 더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 할 수 있었지. 악몽을 내 마음대로 안 꿀 수는 없었으니까.”

준성과 같았다.

준성 역시 좀비로 가득한 이 악몽을 꾸기 싫어도 꿔야 했고, 아무리 싫어도 이 세계를 스스로 지켜보고 나아가야만 했다.

남기혁의 두 팔이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혼란에 빠져버린 준성을 빈틈없이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그래서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더는 죽지 않도록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기혁의 너른 품에 안긴 준성이 몸을 떨었다.

“악몽에 세뇌당한 걸지도 몰라. 새로운 ‘죽음’을 매일 보게 되니까 노이로제가 걸린 걸 수도 있지. 하지만 뭐 어때. 죽게 놔두고 싶지 않다는 건 확실한데.”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무게는 준성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어제도 꿈을 꿨어. 무슨 꿈이었는지 알아?”

“…무슨 꿈이었는데요?”

기혁의 두 팔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읏,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꽉 끌어안겼다.

준성의 귀에 닿은 남기혁의 입술이 저 밑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소리를 내었다.

“내가 기껏 미끼가 되어 살려놨더니, 네 멋대로 죽어버리는 꿈.”

오싹함과 함께 전율이 일었다.

이전 회차의 결말과 똑같았다.

이전 회차에서 남기혁은 준성과 단둘이서 좀비들에게 둘러싸일 상황이 되자,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그들을 건물 밖으로 끌어내었다. 준성은 미끼가 되기 위해 질러대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다가 이내 끊겨버리자, 망설임 없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분명 몰라야 할 그 장면을 알고 있었다.

강준성이 아니라면 모를 이전 회차의 결말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남기혁이 자신과 똑같이 회차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사람은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상태로 몇 번의 상황을 반복할 때, 같은 말과 행동을 한다 해도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말로 따지면 억양, 목소리 톤, 그 안에 담겨있는 감정에서 차이가 보인다. 행동 역시 손짓, 발짓, 말할 때의 몸동작 등에서 숨기고 싶어도 티가 난다.

준성은 다섯 번의 지난 회차에서 이 차이를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즉, 자신처럼 매 회차를 모두 기억하며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남기혁에게 있어 이 세계의 일들은 모두 ‘지금 처음 겪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남기혁에겐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준성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준성아…?”

이번 회차에서만큼은 아직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다.

그게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준성아, 괜찮아?”

품에 안고 있던 준성을 뗀 기혁이 멈칫했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올라가, 준성의 눈가를 훔쳤다.

“왜 울어?”

“아….”

준성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게 방아쇠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기혁이 손을 뻗어 준성의 눈가를 급하게 닦아주기 바빴다.

울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안도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이 꿈속에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생겼다는 것.

오직 그 한 가지에 안도했을 뿐이었다.

안도감은 준성의 눈가를 짓누르고 끝없이 눈물을 만들어 흘려보냈다. 켜켜이 쌓여있던 말 못 할 짐과 어두움이 그 눈물에 모두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 것이다.

자신이 죽지 않길 바라기에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다.

어느새 남기혁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서 울고 있었다. 이때껏 제대로 표출되지 못했던 감정들이 이때에야 비로소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준성은 남기혁에게 기대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기혁 역시 언제나 준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두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파트너였다. 두터운 신뢰와 그들만의 비밀로 끈끈하게 이어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 후로 나날이 미소를 잃어버리던 준성은 이제 남기혁에게라면 언제든 웃어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자신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

유일한 버팀목.

준성에게 있어 남기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만큼, 소중했다.

하지만 준성은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남기혁에 의해 지독히도 어두운 나락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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