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순간 뜻 모를 공포를 느껴버린 준성이 그를 확 밀어냈다. 거미줄처럼 몸을 옭아매고 있던 팔이 아쉬운 듯 스르르 풀려나갔다.
준성은 기혁을 경계하며 뒤로 두어 발 빠르게 물러났다.
“아침부터 여기 계속 있었다면 모를 리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뭔데?”
준성이 팔을 뻗어, 옆쪽의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은 ‘인한병원’이었다.
“여기서 인한병원까지는 기껏해야 2, 300m밖에 안 돼요. 층고로 따지면 이쪽이 약간 더 높아서 병원 옥상도 잘 보이죠.”
“응, 그렇지. 그래서?”
대꾸하는 남기혁은 준성의 손끝이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준성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다.
준성은 그를 한층 더 수상쩍게 여겼다. 자신이 가리킨 위치도 보지 않고 그곳이 인한병원임을 수긍한다는 건, 이미 그곳을 눈여겨보며 어떤 곳인지 파악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믿을 수 없다.
“그럼 왜 아무것도 안 한 거죠?”
“음? 무슨 소리야?”
“아침부터 지금까지 쭉 여기 있었다는 건, 인한병원 옥상에 구조헬기가 도착한 것도 다 봤다는 말이잖아요.”
헬기가 내는 소리는 상당히 크다. 이 정도 거리면 인한병원 옥상에 이착륙하는 헬기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멈칫하던 기혁이 이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글쎄, 내가 잠깐 딴생각할 때 다녀간 거 아닐까? 난 모르겠는걸.”
“거짓말하지 말아요. 제가 아까 동생을 ‘멀쩡히 잘 살려서 밖으로 내보냈다’라고 했을 때, 형은 어떻게 내보낼 수 있었는지, 구조가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죠.”
준성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럴 수밖에요. 어떤 수단을 통해 나갔는지 이미 다 봤을 테니까.”
“…….”
기혁은 잠시 말을 멈추다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맞아, 나도 헬기를 보긴 했어. 하지만 내가 그 헬기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저렇게 좋은 재료들이 갖춰져 있었는걸요.”
준성이 이번엔 옥상의 공사 자재, 정확히는 각목과 쇠 파이프를 가리켰다.
“저것들로 SOS 문자를 만들려고 했다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았어요. 라이터도 있으니까 화단에 불을 내서 주목하게끔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여차하면 각목에 옷을 찢어서 감아놓고 불을 붙일 수도 있어요. 뻥 뚫린 옥상에, 헬기의 이동 방향도 이쪽이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눈에 띌 수 있었다고요.”
사람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조를 바랄 때, 앞뒤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딱 알맞을 정도로 확연히 눈에 띄는 미친 짓도 서슴지 않게 된다. 고래고래 큰 소리를 지른다든지,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이목을 끈다든지, 물건을 마구 던지거나 불을 내기도 한다. 그래야 눈에 띄어서 구조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좀비가 달려드는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죽여달라는 말이나 다름없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남기혁처럼 좀비에게서 안전한 공간에 있는 주제에 구조를 바라는 행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지나치게 수상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 내내 그럴 순 없다. 지금만 하더라도 겁이 없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인 상태였다. 말속에 두려움이나 초조함 또한 찾아볼 수가 없다.
준성이 보기에 남기혁은 자신만큼이나 냉정한 상태였다.
그런 사람이 옥상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고? 그럼 옥상 문 너머의 위급함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자신을 도와준 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역시 이상해.’
이런 상황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두 부류다.
지나치게 신중한 사람.
그리고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사람.
준성은 좀비에게 둘러싸인 자신을 구해줬던 그의 행동을 떠올리며, 신중함보다는 ‘비정상적’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했다.
시치미를 뗄 생각도 없이 준성을 바라보고 있던 남기혁이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하하-, 대단하네. 응, 대단해.”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를 들은 준성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기혁의 눈동자가 어느새 만족스럽다는 빛을 띠고 있다.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거짓말이 들통난 직후에 보이는 눈빛이 저럴 리가 없다.
“테스트한 거예요?”
머릿속 가득하던 의문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었다. 남기혁은 대답 없이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다.
준성은 결코 좋은 기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남기혁은 일부러 수상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재료를 깔아두었다. 강준성이 과연 어디까지 눈치챌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러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준성이 인한병원과 구조헬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도 그냥 들어봤다, 정도가 아니라 이동 경로와 거리까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여야 했다. 그래야 남기혁이 헬기의 눈에 띄어 구조될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얌전히 있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남기혁이 웃는 얼굴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네 말대로, 난 일부러 구조되지 않았어. 여기 남은 건 내 의지고.”
“왜요? 다음 구조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여기 있어봤자 얻을 것도 없는데요.”
위기감을 느낀 기색도 없이 차분히 물음을 던진 준성은 여전히 기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등 뒤로 은밀히 손을 뻗었다.
‘아….’
등허리를 더듬어본 준성이 속으로 혀를 찼다.
등허리 뒤쪽, 그러니까 벨트 뒤쪽에는 매 회차에서 애용하던 마체테를 매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집만 덩그러니 있을 뿐, 정작 무기가 없다.
생각해보니 아까 좀비들을 상대하다가 급히 당겨지느라 마체테를 놓치고 말았다. 아마도 그 마체테는 옥상 문밖에 널브러진 좀비 중 누군가의 머리에 깊이 박혀 있을 거다.
‘여차하면 자살하려고 했는데…….’
만약 남기혁이 위험인물이라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자살’할 생각이었다.
같은 인간에게 살해당하거나 자살하면 이번 회차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게 이 극단적인 악몽의 룰 중 하나였다.
그러니 아니다 싶으면 빨리 이번 회차를 ‘재시작’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옥상 밖으로 떨어지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도 아니라면 기혁의 손에 죽든가.
이 세계의 룰만큼이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준성에게 기혁이 발을 뻗어 다가갔다.
“찾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게 뭔데요?”
기혁이 다가갈 때마다 준성의 두 다리도 한 발씩 물러났다. 옥상 문에 가까이 서 있던 두 사람이 어느덧 중앙까지 다다랐다.
“좀비들을 전부 끝장내버릴 해결 방안.”
일순 스산한 공기가 둘 사이를 스쳤다.
준성은 이때껏 남기혁이 했던 말 중에서 유일하게 ‘진실’처럼 느껴지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물러나는 걸음이 멈춰버리자, 어느새 기혁과 한 뼘 거리밖에 안 될 정도로 가까워져 버렸다.
기혁의 손이 준성에게로 향했다. 준성은 제게 다가오는 손을 보며 본능적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사실은 네가 오늘 인한병원에 들어가는 걸 봤어. 근처에 있다가 좀비가 너무 많아서 여기로 도망 온 거였거든. 보다시피 갇혀버리긴 했지만.”
긴장한 준성의 어깨 위를 지나친 기혁의 손이 그의 백팩에 닿았다.
“구조헬기가 다녀갔는데도 안 탔더라. 친구들은 다들 타고 나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뿐만 아니라 제대로 머물지도 않고 곧바로 나와서 여기까지 왔지.”
약간 열려 있던 백팩의 틈새로 삐져나와 있던 로프 끝이 기혁의 손에 잡혀 나왔다. 준성은 자신의 백팩에서 로프를 꺼내 가면서도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그에게서 상당히 위험한 분위기를 읽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구조조차 마다한 채, 안전한 공간을 벗어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 그 사람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준성은 대답 없이 그저 기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답은 둘 중 하나겠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직 구해야 할 사람이 남은 경우.”
부정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눈을 맞대고 있는 준성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처럼 집요하게 바라보던 기혁이 돌연 생긋 웃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같이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거야.”
“…왜요? 살아남은 생존자들끼리라서?”
준성의 의문에, 남기혁이 방향을 바꿔 걸어갔다.
“아니. 나도 너와 같은 생각으로 여기 올라온 거거든.”
남기혁이 준성을 등져 걸으며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다른 건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기로 오더라. 아마 처음부터 이 근방의 제일 높은 건물로 올라오려고 했겠지. 최대한 좀비가 없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할 테니까.”
정확한 말에 아무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건물로 뛰어들어 오는 걸 전부 내려다보고 있었을 줄이야.
준성이 생각에 빠진 동안, 기혁은 옥상 바닥에서 불뚝 튀어나와 있는 넓은 굴뚝 같은 기둥에 다가가고 있었다. 환풍구와 연결된 튼튼한 콘크리트에 로프를 충분히 매듭지어 묶고, 그 뒤엔 자신의 허리에 두 번 돌려 감은 채로 준성에게 돌아온다.
준성에게 다가간 기혁이 코트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도톰한 검은 가죽 장갑을 꺼내었다.
“길은 내가 다 봐놨어. 최대한 안전한 길로 모실게.”
“모실게……?”
장갑을 낀 기혁이 의문을 표하는 준성의 허리를 꽉 감아 안았다.
“갑자기 뭐 하는 거예요?”
“꽉 잡아. 날 믿으면 안 붙잡아도 되고.”
당황하는 준성에게 해맑게 웃어 보인 기혁이 바닥을 힘차게 박찼다. 얼결에 그에게 안겨 달리게 된 준성이 고개를 돌리다가 경악했다.
“헉……!”
오직 로프 하나에만 의지한 두 사람의 몸이 7층 옥상 난간 밖으로 던져졌다.
“이거 미친 새끼잖아아-!”
“아하핫!”
준성은 거세게 몰아닥치는 풍압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남기혁의 몸을 와락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찍어누르는 듯한 강한 중력이 두 사람을 몸을 빠르게 추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