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누구?’
처음 보는 남자였다.
자신만만한 눈동자와 틀어짐 없이 여유로운 입매, 선량한 분위기.
“밀쳐서 미안해. 일어날 수 있겠어?”
도통 두려움을 찾을 수 없는 차분한 목소리까지.
준성은 자신을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뻗는 그를 긴장한 눈으로 응시했다.
겉보기엔 ‘착한 사람일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같은 꿈을 반복하며 그 안에서 며칠간 다양한 사람을 만난 나날 모두를 합하면 한 달은 족히 넘을 것이다.
본심과 전혀 다른 겉모습을 가진 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깨닫기엔 그리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준성은 남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본심이 어떻든, 도와준 건 명백했기에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했다.
남자는 어색해진 손을 내리면서도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그런데… 혼자야?”
“원랜 동생도 같이 있었는데 떨어졌어요.”
“저런……. 미안하게 됐어.”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준성이 좀비 때문에 억지로 동생과 헤어진 처지인 줄 알았나 보다.
준성은 그런 남자의 반응과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감흥 없이 대답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멀쩡히 잘 살려서 밖으로 내보냈으니까.”
“그런 거라면 다행이야.”
남자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일으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다.
“난 남기혁이라고 해. 좀비만 보다가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니까 반갑네.”
“…강준성이라고 해요.”
준성은 이번에도 남자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그저 한 번 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제 이름을 밝혔을 뿐이다.
남자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어색함을 두 번이나 겪은 손을 내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형은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오늘 아침부터야. 어찌어찌 쫓기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그렇군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준성의 눈은 남기혁 대신 옥상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오피스텔 이용자들이 쉴 수 있는 벤치와 이를 둘러싼 화단이 있었고, 미관을 해치지 않는 형태의 환풍구와 에어컨 실외기 여러 대도 보였다.
잘 꾸며둔 한쪽과 달리 반대쪽에는 건물을 지으면서 들어갔을 각목과 쇠 파이프 몇 개, 시멘트를 포함한 공사 자재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외부에 오래 놔두지 못할 만한 물건들도 섞여 있는 거로 보아, 최근에 오피스텔 어딘가를 보수하다가 잠깐 놔둔 게 아닌가 싶었다.
“형 짐은 없어요? 구조가 올 때까지 버틸 만한 먹을 거라든가, 담요 같은 거요.”
“응, 도망치기 급급해서 아무것도 없어. 기껏해야 라이터 하나?”
“그런 거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아하핫.”
너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남기혁을 한 차례 노려봐준 준성이 옥상 난간 쪽으로 향했다. 난간을 붙잡고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던 준성에게 남기혁이 슬쩍 가까이 다가갔다. 말을 걸지도 않고 건드리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준성을 바라보고만 있다.
준성이 주변을 훑고 옥상까지 꼼꼼히 확인하듯 다녀보는 동안, 남기혁은 무슨 금붕어 똥처럼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마지막으로 옥상 입구에 붙어 귀를 기울여보던 준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로 나가긴 그른 것 같네.’
옥상에 이제 막 들어왔을 땐, 문에 달라붙은 좀비들이 철문을 부술 것처럼 두드려대고 괴성을 질러댔었다. 지금은 그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비 모두가 제 갈 길을 간 건 아니었다. 문 너머에서 타깃을 잃은 좀비들의 멍한 신음이 수없이 들려왔다.
‘몰려있는 상태로 배회하는 거라서 시간이 지나도 그리 멀리 퍼지진 않겠어. 7층 복도에 거의 가득 찼다고 봐야겠지.’
어쩌다 보니 옥상에 고립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오늘은 일부러 로프도 아주 넉넉히 챙겨왔다. 가방의 절반을 채웠을 정도이니 이쯤이면 말 다 했다.
‘문제는…….’
준성이 그제야 눈을 돌려 남기혁을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로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남기혁이 여전히 사람 좋게 웃고 있다.
“형은 앞으로……. 형 맞죠? 저 스물일곱인데.”
“응, 내가 두 살 위야.”
“형 맞네요, 그럼. 형은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여기 계속 머물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식량도 없고, 비를 피할 공간도 없다. 쌀쌀한 가을바람을 견디기 위한 이불이나 모포 대신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그가 입고 있는 고가의 트렌치코트 하나가 전부였다.
하루, 혹은 이틀.
이런 휑한 옥상에 아무것도 없이 홀로 갇혀버린 채 멀쩡히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아마도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기혁은 해맑았다.
“기다리다 보면 어떻게든 구조되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보통은 저 밝은 미소만큼이나 머릿속도 꽃밭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겠지, 아마도.’
준성은 남기혁을 단순히 해맑고 머리가 빈, 대책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것과는 본질적으로 좀 달랐다.
준성이 옥상 밖을 둘러보며 물었다.
“형은 아침부터 쭉 여기 계셨다고 했죠? 잠이라도 잤어요?”
“아니, 못 잤어. 높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춥더라고.”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는 장난치듯 눈가를 찡그리며 덜덜 떨어 보였다.
준성은 그런 남기혁을 예리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럼 잠도 못 자고 계속 하늘만 보셨겠네요. 때아닌 풍경 감상 좀 하셨겠어요.”
“그렇지, 뭐.”
옥상의 사면은 전부 갈비뼈 높이의 난간만 있을 뿐, 시야를 가리지도 못하는 상태다. 옥상 어디에 붙어서 내다보든,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그래서 ‘이상한 점’이 참 많았다.
준성이 방금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옥상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새삼 형이 대단하네요. 지금도 문밖에 좀비가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도 문을 열어서 절 구해 주셨잖아요.”
“위험한 사람을 어떻게 가만히 놔둬.”
“정말 그뿐이에요?”
한없이 선량한 말에 가시를 들이댄 건 준성이었다. 가시에 찔린 남기혁의 눈매가 일순 차가워지는 듯했다.
“그뿐인데? 다른 이유가 더 있어야 해?”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99%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준성의 경계심과 냉기 서린 눈초리가 남기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 옥상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돌려보긴 했지만 그게 다예요. 아무 목소리도 안 냈죠. 잠긴 상태라서 손잡이가 크게 돌지도 않았으니, 덜컥거리던 건 사람이 아니라 좀비일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문을 등진 저를 좀비들이 에워싸고 있는 상태였고요.”
“좀비들이 막 소리 질렀잖아. 좀비들은 사람을 발견하면 소리 지르면서 달려들기 일쑤니까 당연히 누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옥상 문 가까이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밖을 훤히 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겁도 없이 움직일 수가 있어요? 마치… 좀비가 전혀 무섭지도 않은 사람처럼.”
다시 생각해보면 참 위험했다. 몰린 수로 봐서는 조금만 방심해도 금세 팔다리가 붙잡혀 뜯겨 나갈 정도였으니, 남기혁이 몇 초만 늦게 열어줬어도 꼼짝없이 물리고 말았을 거다.
그만큼 문을 열어준 남기혁 또한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을 열고 발로 좀비들을 차내며 문을 닫는 빠른 움직임 속에 약간의 주저함과 두려움이 있었더라면 둘 다 죽었을 거다.
그럼에도 남기혁은 아무 위험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태연하고 차분했다. 뭔가 대비책이 많아서 저토록 여유로운 건가 했는데, 살펴본 결과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천만에.
“그리고 형이 아까 그랬죠? 어떻게든 구조되지 않을까, 라고.”
“그랬지. 그게 왜?”
“애초에 그게 잘못됐잖아요.”
남기혁의 웃는 얼굴이 고개를 갸웃한다.
자신이 뭘 잘못 말했냐고 말하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린애 같기도 한 밝은 얼굴을 보며 준성이 경계심 어린 눈에 힘을 주었다.
“처음부터 구조될 생각 따윈 아예 없었으면서.”
그 말에, 남기혁의 미소가 일순 덜컥거리는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상냥하던 눈가가 기묘하게 휘어지고, 그의 입매가 금세 기이한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길게 올라갔다.
“들켰어?”
갑자기 훅 달려드는 듯한 위험한 느낌에, 준성이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온 남기혁의 얼굴이 그의 바로 코앞에 멈춰 섰다.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준성이는.”
방금 알려줬을 뿐임에도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읊어댄 것처럼 무섭게 속삭이는 이름.
등허리에 휘감긴 그의 팔이 얼음을 끼얹은 것처럼 굉장히 차가웠다면, 제 이름을 내뱉은 그의 숨결은 육체의 모든 열기가 한데 모인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