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46)화 (146/240)

- 146화 -

무전기를 통해 인질과 이야기가 오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부르며 우는 소리만 말하고 들을 뿐.

한서는 귀가 시끄러워서 경오가 거슬리긴 했지만,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본능대로 굴어주는 게 나았다.

황경오의 성격과 터져 나온 감정의 정도로 추측건대, 그가 이런 상황에 인질의 상태를 조목조목 묻거나 위치를 조사하려들 것 같진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할 새도 없이 그저 안도와 걱정으로 둘러싸여 눈물만 펑펑 흘려댈 게 뻔했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남기혁이란 놈도 그걸 아니까 인질을 직접 연결해준 거겠지.’

인질을 연결해주겠다는 결정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걸 보면, 남기혁은 이미 거기까지 계산해둔 상태로 승인해줬을 확률이 높다.

황경오를 잘 알고 있을 남기혁은 그와 인질이 만났을 때 얼마나 오열하며 야단법석을 떨지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황경오가 감정적인 부분을 누르며 ‘이성적으로’ 구는 게 보인다면 응당 의심했겠지.

무전기를 든 황경오의 뒤에 혹시나 강준성이 서있는 건 아닌지.

‘그 정도 생각은 이쪽도 읽고 있어.’

그랬기에 황경오에게는 무전이 연결되면 뭘 물어봐라, 어떤 걸 확인해봐라, 이런 종류의 미션은 전혀 주지 않았다. 그가 느낀 감정 그대로를 표현해서 상대를 낚아 올려야 했기에.

-들었다시피, 네 엄마는 무사해.

무전기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들려온다 싶더니, 이번엔 인질팀의 목소리 낮은 남자가 말을 건넸다. 그의 뒤로 황경오의 엄마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강준성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터넷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은 정확하게 잘만 흘러가고 있었다.

황경오가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상대에게 목소리를 보냈다.

“어, 어떻게 하, 흡, 하면 엄마를 보내줄… 거예요? 흑, 우리 어, 엄마 살려주세요….”

끅끅 소리를 내며 울음을 참기 바쁜 황경오에게,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 하지만 신호만 보내면 된다고 해놓고… 알고 보니까 포, 폭탄이었잖아요! 나도, 나도 죽을 뻔했다고요!”

-안 죽었으면 됐잖아.

왠지 ‘그게 뭐?’라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하는 상대의 화법에 경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황경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수신음이 들렸다.

-아저씨는 여전히 시끄럽네. 위험한 거 안 시키니까 그냥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하라고.

갑자기 바뀐 목소리.

그걸 듣자마자 한서의 눈가가 꿈틀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듣기 좋은 바리톤. 목소리에 담긴 웃는 기색이 일종의 매력이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무전기를 통해 전달된 목소리라서 아주 깨끗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말투와 억양, 목소리 굵기는 확실히 특정적이었다.

인한병원에 남겨져있던 휴대폰 속 영상에 고스란히 담긴 바로 그 목소리.

-내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

-걱정하지 마. 네 동생은 저 안에 없어.

-‘아직’ 죽이진 않았는데, 혹시 만나고 싶으려나?

-네가 그렇게나 아끼는 동생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까지 살려둘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오직 단 한 사람뿐이다.

‘남기혁.’

바뀐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챈 건 한서뿐만이 아니었다. 창민마저 긴장한 얼굴로 무전기를 노려보고 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송신 버튼을 누르고 몇 초를 흘려보내어, 그 시간 동안 중간 다리 역할의 팀들이 순서대로 버튼을 눌러 전달하는 기존의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낭비되는 텀은 동일.

그렇다면 남기혁은 인질팀과 함께, 혹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서는 손에 들고 있던 준성의 휴대폰 액정을 다시금 확인했다.

‘3분 52초. 약 4분이로군.’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남기혁이 있는 위치까지의 거리는 고작 4분 미만.

아주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그냥 인질팀이 곧 남기혁 본인의 팀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준성이는 같이 없어? 준성이 목소리 듣고 싶은데.

무전기를 통해 어이없을 정도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가 되어서야 이 목소리의 주인이 남기혁이라는 걸 알아챈 경오가 한서의 눈치를 살피며 무전을 보냈다.

“주, 준성이 목소리 들려주면 어, 엄마 놔줄 거예요? 그런 거면 지, 지금 당장 준성이한테 갔다 올게요!”

말하자마자 한서에게 ‘노, 농담이야’라고 변명했다. 어디까지나 멍청한 척하며 남기혁을 떠볼 마음으로 던진 질문이었을 뿐이다. 한서도 이를 알고 있기에 그저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것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하하! 아저씨 진짜 웃긴다!

신나게 웃어젖힌 남기혁이 돌연 살기가 느껴지는 무서운 목소리를 냈다.

-그랬다간 아저씨 엄마 모가지 따서 드론으로 날려 보내줄게.

“히익!”

경오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협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만 무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는 사이, 남기혁이 귀찮은 듯 말했다.

-내일 어떻게 움직일 생각인지부터 말해봐.

“아, 음, 아직 몰라요. 준성이가 다, 다들 피곤했을 테니까 일단 쉬자고 했거든요. 아마 내일 아침에 회의하고 출발하지 않을까요….”

-그럼 출발하기 전에 이후의 계획과 이동 경로를 쪽지로 남겨놔. 아저씨 방에 놔두면 우리 애들이 알아서 가져갈 거야.

“네에…. 저기, 그, 위, 위험한 거 하려는 건… 아니죠?”

경오의 덜떨어진 질문에 남기혁의 무전이 아주 잠깐 멈췄다.

다시 무전이 왔을 땐, 한참 웃던 걸 겨우 멈춘 것 같은 남기혁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우리가 굳이 아저씨를 위험하게 만들진 않을 거야. 그 폭발을 겪고도 소중한 엄마를 되찾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려는 아주 바람직한 ‘스파이’인걸.

경오의 어깨가 움찔했다. ‘스파이’라는 낙인이 경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준성이는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되었든, 동료를 위험하게 만든 새끼를 다시 받아주는 짓은 하지 않아. 아저씨가 인한병원을 폭파해서 무너뜨린 범인이라는 걸 알면 좀비가 바글거려도 매정하게 버리고 갈 거라고.

남기혁은 일부러 인한병원의 폭발이 다 경오의 탓인 것처럼 겁주듯이 말하고 있었다.

-혼자 버려진 채로 엄마를 구할 수 있겠어? 아저씨가? 무슨 수로?

무전기를 쥔 경오의 두 손이 벌벌 떨렸다.

-아저씨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대로 얌전히 내 스파이 짓이나 하는 거야. 그렇게만 해주면 관심도 없는 아저씨 엄마, 상처 하나 없이 보내줄게.

퇴로가 없음을 자각시키고 선택지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걸 때려 넣는다.

-대신… 아저씨가 개수작 부리면 1시간에 한 번씩 ‘엄마의 몸 조각’을 받게 될 테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흡, 윽….”

경오가 신음을 삼키며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섣불리 무전을 하거나 패닉을 일으키진 않았다.

황경오 혼자였다면 분명히 흔들렸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남기혁의 잔인한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도한서가 있었다.

“알겠다고 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으응….”

한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경오가 그제야 무전을 했다. 그러는 동안 한서는 남기혁의 무전에만 귀를 기울인 채 집중하고 있었다.

-일만 잘해주면 내일 또 엄마 목소리 듣게 해줄게.

“그럼 어, 언제까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준성이가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준성의 이름을 입에 담는 남기혁의 목소리에는 도한서 못지않은 진한 집착이 묻어나있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내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게 좋아. 준성이만 손에 넣으면 인질이든 뭐든, 다 필요 없으니까.

목소리의 마지막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의아해할 새도 없이 그 말을 끝으로 남기혁과의 무전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무전을 연결해주던 큰 체구의 남자는 드론과 무전기를 순순히 돌려보내 주었다. 둘 다 경오가 관리하는 물건들이라, 멀쩡히 보내주지 않으면 예리한 강준성이 상황을 의심할 가능성도 있었다.

경오는 드론을 회수하고 창문을 닫은 후에야 긴장이 풀린 것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다가 울먹울먹하더니, 기어코 또 울음을 터뜨렸다. 이럴 때 보면 아저씨가 아니라 어린애 같다.

창민은 훌쩍거리는 경오를 부축해 침대에 앉혀두고서 여전히 표정 변화 없는 한서를 바라보았다. 한서는 어느 순간부터 준성의 휴대폰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서가 이쪽을 볼 생각도 않고 집중하고 있자, 창민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한서에게 다가갔다.

“뭔가 좀 알아냈어?”

“좀?”

한서가 피식 웃었다.

“좀이 아니야.”

고개를 든 한서의 예리한 눈빛이 창민을 향했다.

“인질들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는걸.”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느낌에 축 처져있던 경오가 그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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