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41)화 (141/240)

- 141화 -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영상 파일의 제목은 1101.

11월 1일.

바로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1일째다.

그리고 영상 파일 속의 남자가 정말 한서의 양아버지라면, 그가 반쯤 남은 혈액 팩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 혈액 팩을 준 건 도한서이고, 부인까지 죽여가며 그걸 독점하고 뛰쳐나간 건 그였으니까.

문제는 그런 남자가 왜 원장을 찾아왔었냐는 거다.

제집처럼 거실까지 들어온 한서의 양부, 도지훈이 원장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디 나갈 생각이었어?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랬잖아.

원장의 차림새는 집에만 있던 사람의 것이라기엔 외투까지 꼼꼼히 갖춰 입고 있는 상태였다.

-아, 이건 그냥… 네가 안 와서 나가볼까 했던 것뿐이야.

원장이 당황한 모양새로 벗은 외투를 거실 소파의 팔걸이에 대충 걸쳐두었다. 그러는 사이, 이번엔 다른 질문이 찾아왔다.

-가족들은?

-잠깐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

-흐음.

복도의 굳게 닫힌 문들을 바라보는 영상 속 도지훈을 보며, 준성은 확실히 그와 한서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뭔가를 가늠하듯 생각에 빠질 때 내는 흐음, 하는 소리라든지,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점이라든지.

외견만 보면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사소한 습관이나 저런 분위기 부분은 빼다 박은 느낌이 들었다.

-혈액은?

-…기다려 봐.

-가면서 이거나 갖다 버려.

도지훈의 말에 어느 방으로 향하려던 원장이 그를 돌아보았다. 도지훈이 내민 건 그가 꺼내 들고 있던 혈액 팩이었다.

-이건… 한서 혈액 아냐?

-감염 진행 시간에 큰 변화가 없어. 아마도 네임택만 바꿔치기한 가짜일 거야.

영상을 바라보던 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정 도파민 수치를 넘긴 도한서의 혈액이 바이러스의 감염 진행을 어느 정도 늦출 수 있다는 건 이미 확실하게 밝혀진 바였다. 좀비 바이러스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도지훈이다 보니, 본인 육체의 감염 진행이 혈액을 먹지 않았을 때의 실험체와 동일해서 그만 눈치채 버린 모양이다.

받아든 누군가의 혈액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원장이 어딘가로 향하며 카메라의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원장을 기다리는 동안, 도지훈은 수시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고 가끔은 누가 어딘가를 쿡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아마도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한 육체의 변화 때문인 듯했다.

원장은 금세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창고에서 봤던 것과 같은 네임택 없는 혈액 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내가 가진 건 이거 한 팩뿐이야. 나머지는 전부 청무시 연구소에 있어.

-흐음, 정말이야?

의심하는 듯했지만, 지훈은 ‘어차피 한 팩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라는 말을 하며 원장에게로 손을 뻗었다.

원장은 자신에게로 내뻗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감염의 영향으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손가락 관절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감염됐다며. 다른 실험체들처럼 좀비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마냥 태연한 건 아냐. 생각을 좀 정리했을 뿐이지.

지훈이 원장에게 뻗었던 손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움찔거리는 손가락 관절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분명 차가웠지만, 그 안에 어딘지 모를 광기가 엿보이는 듯했다.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인한시 연구소는 이제 끝났어. 안에는 실험체로 쓸 수도 없는 좀비들밖에 없지.

아깝다는 듯이 말하던 지훈이 돌연 씩 웃었다.

-하지만 아직 감염 진행 단계에 있는 ‘나’는 충분히 실험체로 써먹을 수 있어. 내 몸에서 바이러스를 추출하고 청무시에 남아있는 혈액으로 백신을 완성시키면 되는 거야.

자기 자신이 감염되었음에도 웃을 수 있다니, 준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영상 속에서 지훈을 마주하고 있던 원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신이 완성되기 전에 네가 좀비가 될 수도 있어!

-연구소에 도착하는 대로 팀 꾸려서 도한서부터 회수하면 돼. 혈액만 넉넉하면 몇 달간 진행을 늦추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그만큼 늦추려면 하루에 몇백mL가 필요한지 알아? 연구소에 남겨둔 혈액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그렇다고 한서를 너무 자주 도파민 과잉 상태로 만들면 몸에도 무리가……!

-그게 뭐?

지훈이 심드렁하게 말을 끊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면 되잖아. 정신병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녀석의 ‘혈액’이야.

-넌… 그걸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어차피 평생 시험관에 넣어두고 늙어 죽을 때까지 피만 뽑을 생각이었어.

눈을 부릅뜬 원장을 바라보며, 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하잖아, 대체할 원재료가 없는걸. 그럼 어쩌겠어? 최대한 오래 살려서 가능한 많은 재료를 확보해야지.

원장이 입술을 꾹 깨물며 침음을 삼켰다.

그건 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준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생 시험관에 넣고 피를 뽑아? 누굴? 도한서를?’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건 남기혁도 마찬가지였지만, 솔직히 머릿속만큼은 눈앞의 이놈이 압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주먹 쥔 손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깨문 입술은 조금만 더 세게 물어버리면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았고, 구겨진 미간의 주름은 도저히 펼 수가 없었다.

한서에게 직접 과거 얘기를 들었을 때, 그의 양부모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하지만 이렇게 영상으로 보며 직접 머릿속의 말을 엿들어보니, 그 짐작조차 안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밖에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냉정을 잃는 법이 없던 준성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기에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진정해.”

그런 준성을 진정시키고자, 한서가 손을 뻗어 그의 떨리는 주먹을 감싸주었다.

준성이 돌아본 한서의 얼굴은 이런 것쯤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고 여유로우며, 아예 입가에는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어떡해.’

차라리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내주길 바랐다. 본인이 왜 그런 처지에 놓여야만 하냐며 억울해하고 분해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자신을 붙잡고 서럽게 울어보든가.

어느 것이든 도한서라는 인간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감정 표현들이었지만, 그런 걸 바랄 정도로 지금의 그는 인간으로서 너무나 많은 구멍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준성이 한서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삼키는 동안, 영상 속 지훈은 원장에게서 기어코 혈액 팩을 가져갔다.

혈액 팩에 연결된 호스 부분의 조절기를 연 지훈은 그 입구에 주저 없이 입을 댔다. 새빨간 혈액이 호스를 통해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마치 맛있는 음료수를 마시듯이 꿀꺽꿀꺽 피를 마시는 그 모습이 괴이하기 짝이 없다.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직통으로 연결된 것처럼 까딱거리며 움찔하는 손에 자꾸만 눈이 갔다.

-하아…. 실험체들이 말하던 감각이 이런 거구나.

감탄하듯이 중얼거린 지훈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3-4초에 한 번꼴로 까딱거리던 손가락이 지금은 10초가 지나도록 얌전하다.

씩 웃은 지훈이 혈액 팩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원장이 꾹 참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말을 꺼냈다.

-…그럼 영인이도 대체할 사람이 생겨서 버렸어?

-뭐?

-네가 죽이고 버렸잖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버린 원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훈을 몰아세웠다.

-차라리 놔두고 혼자 도망치지 그랬어! 죽일 것까진 없었잖아!

지훈은 대답 없이 원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집 안의 닫힌 문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듯 바라보았다.

-연구소에 왔었군. 어쩐지…….

원장이 외투를 입고 있던 이유.

그건 밖으로 나가려던 게 아니라, 이미 밖에 나갔었다가 이제 막 들어왔다는 걸 말해주는 거였다.

중얼거리던 지훈이 가소롭다는 듯이 실소했다.

-목 졸려 죽은 영인이를 봤을 때의 네 생각, 내가 말해줘?

혈액이 새지 않도록 조절기 부분을 조정한 지훈이 가장 가까이 있던 닫힌 문을 벌컥 열었다.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듯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죽은 첫사랑이 좀비가 되면…….

또 한 번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미 화면에서 사라진 지훈을 쫓아간 원장은 방 하나에 모두 들어가 있던 가족들에게 문을 잠그라고 외쳤다. 덕분에 그 방은 지훈이 열지 못하고 지나친 듯했다.

지훈이 아까 떠벌리던 말의 뒷부분부터는 거리가 멀어져서 구체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몇 개의 단어 정도는 엿들을 수 있었다.

좀비, 혈액으로 통제, 공격성 제어.

그런 단어를 겨우 알아들은 직후.

-열지 마!

원장의 외침이 들리고, 뭔가를 보다가 멈칫한 것처럼 한 박자 늦게 지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면에는 거실과 현관 정도만 보일 뿐이라서 슬슬 답답해지려던 찰나.

방들이 줄지어 있는 복도 가장 안쪽에서 뭔가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만 이윽고 지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끌려 나온 것은 흰 가운을 입은 비슷한 연배의 여자였다. 옷의 칼라 뒤쪽을 거칠게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 나오면서도 두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꿈 깨. 영인이는 죽어서도 내 파트너야.

-도지훈!

뒤쫓아온 원장이 소리치자, 축 늘어져 있던 여자의 손끝이 이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그 움직임은 지훈이 보이던 바이러스 감염 반응과 동일해 보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의 꿈틀거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지훈이 기분 나쁜 미소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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