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40)화 (140/240)

- 140화 -

“내가 그렇게 갖고 싶으면 기다리지 말고 직접 데리러 오라고.”

유혹하는 듯한 야릇한 목소리를 남긴 준성이 허공에 뜬 드론을 올려다보았다. 드론 조종기를 쥔 남자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처박혀 있는 바람에 렌즈의 방향이 조금 맞지 않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전부 생생히 촬영되고 있을 거다.

준성은 드론의 렌즈가 촬영하는 범위를 가늠하며 바로 앞의 남자에게 물었다.

“녹화 중이죠?”

목에 닿아 있는 마체테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고 있던 큰 체구의 남자가 대답 대신 말없이 눈만 굴렸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준성이 빈손을 뻗어 도한서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까딱했다.

자신이 찍어 누르고 있는 왜소한 남자의 목을 당장이라도 회칼로 썰어버릴 것처럼 살벌한 기색을 풍기던 한서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준성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곧바로 한서의 멱살을 틀어쥔 준성이 그를 확 끌어당겼다.

“헉!”

소리를 낸 것은 목에 여전히 마체테가 겨눠진 큰 체구의 남자였다. 준성의 움직임 때문에 목에 닿은 마체테가 약간 움직인 탓인지 베인 듯 짜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한서를 멱살 잡아 끌어당긴 준성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그에게 키스했다.

한두 번 입을 맞춰본 게 아닌 것처럼 입술이 정확히 맞닿았다. 거의 동시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지 않는 두 살덩이가 자연스레 얽혀들었다.

칼을 든 한서의 팔이 준성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고 다른 한 손이 그의 뒷머리를 받쳐 당겼다. 작은 머리통이 큼직한 손아귀 안에서 순식간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음….”

준성의 눈가가 움찔했다.

남기혁을 자극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키스였을 뿐이다. 하지만 도한서에게는 그딴 건 아무렴 상관없었던 모양이다.

준성의 입 안을 파고든 혀가 치아 곳곳을 핥아댔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다가 강하게 쓸고 두드리더니, 이젠 입천장과 목구멍 앞을 간질이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정도 호응해주려던 준성의 혀도 이젠 한서의 가슴팍을 밀어내려는 손처럼 약한 방어를 시작했다. 그래 봐야 곧바로 붙잡혀서 자극당할 뿐이었지만.

잠깐만 입을 맞추고 말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입가에 타액이 흘러내릴 정도로 격렬히 키스 당해버렸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진하게 키스를 나눈 준성을 놔주며 그의 입가와 턱까지 흘러내린 타액을 긴 혀로 핥아 올린 도한서가 큰 체구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본의 아니게 두 남자의 노골적인 키스신을 일등석에서 관람해버린 남자의 얼굴이 어느새 후끈 달아올라 있다.

눈을 들어 드론을 올려다보던 도한서가 제게 기대어 있는 숨 가쁜 준성의 머리에 보란 듯이 입을 맞췄다. 그의 샐쭉 웃는 모양새의 눈매는 얄미울 정도로 의기양양해 보였다.

제 주인만큼이나 도발에는 상당히 일가견이 있는 대형견이었다.

* * *

남기혁의 부하들을 강제로 떼어놓은 준성과 한서는 곧바로 원장의 아파트로 향했다.

감시역들이 다시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이 갖고 있던 드론의 프로펠러는 나는 걸 시도조차 못 할 만큼 죄다 부러뜨려놨고, 조종기까지 발로 밟아 망가뜨렸다. 그렇게 해놔도 따로 기계 자체를 건드리진 않아서 영상은 잘만 녹화되어 있을 테니, 부러 찍혀줬던 내용은 남기혁에게 잘 전달될 것이다.

그럼에도 감시역들이 두 다리로 직접 쫓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손발을 묶어두었다. 근처의 안전해 보이는 작은 옷가게 안에 두 남자를 놔둔 준성은 그들이 당연히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무전기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무전기를 통해 남자들과 드론을 회수해가라는 말과 함께 대략적인 위치를 말해준 준성은 그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원장의 아파트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감시역들과 떨어진 후, 아파트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0분이었다.

정직하게 향했다가는 눈치 빠른 남기혁이 목표 지점을 눈치챌지도 몰라서, 감시역들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일부러 아파트 방향이 아닌 쪽으로 나아갔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걸린 이유로는 ‘약발’이 다 되었기 때문도 있었다.

“난 지금도 좋지만, 역시 만일을 위해 피 좀 더 뽑아놓는 게 어떨까?”

아무도 없는 아파트 복도에 들어선 후에야 밀착 태세를 푼 준성이 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된다고 했잖아. 너 빌빌거리면 답 없단 말이야.”

“왜 없어.”

한서의 손이 준성의 턱을 붙잡아 돌려, 그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네가 아까처럼 키스해주면 정신 번쩍 들 텐데.”

“정신만 번쩍 드는 게 아니라 아래쪽도 벌떡거리니까 문제지.”

“들켰어?”

이번엔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덧붙이는 한서를 노려보며, 준성이 원장의 집 앞에 섰다. 아직 전기가 돌고 있는 도어 록에 자신이 기억하는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의 풍경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굳이 달라진 걸 꼽아보라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를 파리 몇 마리가 거실의 목 잘린 시체들에 붙어 있었다는 것 정도.

아마 이대로 며칠 더 놔둔다면 시체마다 징그러운 구더기가 들끓고 육체 썩는 냄새가 이 지독한 혈향을 모두 압살해버릴 것이다.

시체들에게서 눈을 뗀 준성은 집 안을 잘 아는 것처럼 익숙하게 어딘가로 향했다. 그는 꿈속의 마지막 회차에서 봤던 원장의 집 내부 구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집 안에 마련된 팬트리 옆.

아파트 구조상 알파 룸 혹은 창고 방이라고 칭하는 아주 작은 사이즈의 방이었다.

다른 방들과 달리 열쇠 잠금이 아니라 도어 록으로 되어있었지만, 이 방의 비밀번호 역시 준성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자마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리 없이 문이 열렸다.

작은 방 안에 마련된 건 냉장고를 닮은 보관 케이스와 작은 책상 하나,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노트북 한 대였다.

얼핏 보면 정말 냉장고라고 생각할 법한 하얀 보관 케이스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았다.

역시나 안에는 아무 네임택도 붙지 않은 혈액 팩이 일렬로 서서 한 칸을 꽉 채우고 있었다.

혈액 팩의 수는 총 12팩.

백팩을 일부러 넉넉하게 비워둔 덕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준성이 혈액 팩을 챙기는 동안, 한서는 노트북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노트북에는 작은 USB가 꽂혀 있었는데, 그게 신경 쓰이는지 벌써 전원까지 켜고 있다.

준성이 백팩을 가득 채우고 보관 케이스를 닫을 즈음엔 한서도 USB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복사해왔네.”

한서의 말에 준성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USB 안에는 문서 파일 하나와 영상 파일 하나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Z-프로젝트 연구자료_Ver2.6.pdf]

문서에 붙여진 이름과 버전뿐만 아니라 만든 날짜와 수정 날짜까지 확인한 한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2연구실에 놔뒀던 구멍 난 자료야.” 

원장은 연구소를 빠져나올 때, 그곳의 제2연구실에 있던 연구자료를 그대로 복사해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 자료는 이미 도한서가 자신에 관한 내용을 모두 삭제한 ‘구멍 난 자료’로, 실험의 베이스가 될 혈액 없이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자료를 하나하나 세세히 읽었다면 구멍이 있다는 걸 알아챘을 테지만, 당시 연구실에는 좀비가 날뛰고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 파일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가히 대단하다고 할 만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구멍이 있다곤 해도 이만한 연구자료까지 남아있다면 질병 관리청이 생각보다 빨리 백신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시름 놓은 얼굴을 하던 준성이 이번엔 폴더 안의 영상 파일을 가리켰다.

“이것도 네가 남겨놨던 연구자료랑 같이 있던 거야?”

[1101.mp4]

숫자가 제목인 영상이었다.

“아니. 내가 남긴 게 아니야.”

준성에게 대답한 한서가 터치패드를 이용해 영상을 재생시켰다.

화면에 뜬 건 다름 아닌 원장의 집 내부였다. 지금은 목 없는 시체들이 자리 잡은 음산한 공간이 되었지만, 영상 속 거실은 작은 강아지가 태평히 엎드려서 자고 있을 정도로 한적한 모습이었다. 

“카메라?”

그러고 보니 원장의 집 거실의 대형 TV 근처에는 작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꿈속에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카메라였는데, 지금 보니 부재중일 때 반려견의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CCTV 같은 물건이었나 보다.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를 작은 강아지가 카메라 쪽을 힐끔거렸다. 한 박자 뒤, 카메라의 방향이 바뀌었다. 누군가가 직접 손을 대서 카메라가 비추는 방향을 바꾼 모양이었다.

뒤이어 화면에 잡힌 것은 카메라의 렌즈 방향을 현관 쪽으로 돌려놓은 당사자, 바로 혈액원 원장이었다.

혈액원 원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카메라의 렌즈 쪽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원장은 자신보다 먼저 앞서 달려나가는 강아지를 뒤따라 나온 부인에게 안겨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당부를 남겼다. 어째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멀리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현관에 선 원장이 한차례 깊이 심호흡하며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짜증이 느껴지는 차가운 목소리가 영상에 잡혔다.

한서의 어깨가 아주 짧게 움찔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준성이 화면 속 현관에 들어선 또 다른 남자를 노려보았다.

의사나 연구원이 입을 법한 하얀 가운을 입은 40대 남자가 원장의 어깨를 팍 밀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이 카메라에 점점 더 또렷이 잡혀갔다.

원장이 현관문을 닫는 동안 거실 근처까지 성큼 걸어 들어온 남자가 그의 가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짧은 호스 같은 것이 연결되어있는 반쯤 남은 혈액 팩.

그 표면에 붙어 있는 네임택을 본 준성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Base_도한서(RH NULL)

저 네임택이 붙은 혈액 팩을 갖고 있을 남자라고는 딱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카메라에 비친 흰 가운의 남자는, 아무래도 도한서의 양아버지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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