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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37)화 (137/240)

- 137화 -

“솔직히 말할게요. 난 아직 누나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욱이랑 같이 온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동급이라고요.”

매몰찬 말이었지만 유슬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준성에게 있어 기껏해야 어제 처음 만난 사람에 불과하니 유대라고 할 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준성의 계획에 큰 도움을 주거나 자신의 쓸모를 보여 줄 기회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냥 일개 생존자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의 형제가 살인마에게 붙잡혀 있다고 해서 팀 전체를 움직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비정상적으로 착해 빠진 주인공들이 아니고서야.

하물며 인질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두재의 팔을 베었던 무서운 살인마였다.

듣자 하니 준성은 남기혁이라는 살인마에게 예전부터 시달려 왔다고 한다. 당연히 그에게 잡히지 않도록 도망치고 싶을 텐데, 이제 막 안면을 트게 된 일행의 동생을 구한답시고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준성이 인질들을 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에게 잘난 듯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사납던 유슬의 감정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퐁퐁 흘러나왔다.

“나도…, 나도 알아…. 내가 모두와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도 아니니까… 같이 구하러 가 줄 이유도 없지…. 위험한 걸 누가 모르겠어…. 동생이 구하고 싶으면 나 혼자 가라는 대답이 나올 거…, 다 안다고…….”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만, 유슬의 허물어진 얼굴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 동생이 살아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최소한 동생이 살아있다는 확신만 있어도 혼자 가보겠는데…….”

무서웠다.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동생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것도 두려웠지만, 동생을 찾고 난 이후가 더 무서웠다.

만약 동생이 이미 죽었다면?

유슬의 동생은 남기혁에게 있어 조직에 있으나 마나 한 부하, 중요 사항을 멋대로 유출한 배신자였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던 끔찍한 살인마가 과연 쓸모없어진 부하를 굳이 잡아두고 있을까.

남기혁을 떠올릴수록 동생이 그에게 이미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유슬을 괴롭혔다.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찾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이미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올까 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런 상황을 향해 자신 혼자 찾아 들어가야 한다니,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다. 동생의 죽음을 홀로 마주한 자신이 과연 망가지지 않고 복수를 다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에게 붙잡힌 동생을 떠올릴 때마다 별의별 공포가 다 찾아왔다. 간밤에 동생을 걱정하며 두려워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퀭한 눈이 그 증거였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면…….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이 두려움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유슬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물기가 가득 찬 눈가를 떨었다.

준성은 기운 빠진 유슬을 바라보다가 완강하던 눈매를 천천히 누그러뜨렸다.

“한 가지 알려 줄게요.”

유슬이 붉게 변한 눈가를 문지르며 준성을 바라보았다.

“남기혁은 목적이 달성되기 전까지는 절대 인질을 죽이지 않아요. 의외로 삼시 세끼 굶지 않게 꼬박꼬박 먹을 것도 주고 말만 잘 들으면 굳이 패지도 않죠.”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꿈속의 기억을 더듬은 준성이 마구 흔들리는 유슬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누나 동생이 나온 사진을 왜 굳이 남겨둔 줄 알아요?”

“그건… 내 동생 뒤에 찍힌 사람들까지 네게 보여주려고 그런 거 아냐? 그중에 아는 사람도 있었다며.”

유슬은 김태주인가 하는 준성의 지인이 함께 찍혀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를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동생이 찍힌 사진을 놔두고, 자신이 이를 확보해서 잘 갖고 있다가 준성에게 전달한다. 사진을 남겨둔 건 그걸 위한 장치이지 않았을까.

준성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남기혁은 대책 없는 살인마처럼 보여도 생각보다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다.

“잘 생각해봐요. 누나 동생이 남기혁에게 발각돼서 구타를 당한 시점은 아마도 1일째일 텐데, 남기혁이 직접 인한병원에 들렀던 건 추측하건대 5일째쯤이에요.”

“그게 왜?”

갑작스러운 추리 타임에 곧바로 답을 내지 못하고 의아함을 느끼는 유슬에게 준성이 이어 말했다.

“굳이 내 지인을 잡아두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진을 찍은 거라면 병원에 온 5일째에 직접 잘 보이게끔 두고 갔을 거라는 거죠.”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배신자의 사진을 찍어서 그의 누나가 움직이는 길에 놔두었다. 그렇게 배신자의 누나가 손에 넣은 사진은 7일째가 되어서야 강준성에게 다다랐고, 못 본 체할 수 없는 지인의 행방이 남기혁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슬은 준성의 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지만, 그가 두재를 잘 알고 있었고 어떤 길로 움직일지까지 대략 예측하고 있었음을 전해 들었다. 또한 함께 있던 손남섭이라는 남자의 휴대폰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를 통해 두재 일행의 대화에서 상당한 정보를 취했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렇다면 곽두재와 함께 있는 ‘배신자의 누나’가 준성과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 짐작했을 것이다.

“남기혁은 내가 제 발로 직접 자기를 찾아오길 바라는 거예요.”

어렵잖게 확신할 수 있었다.

인한병원에 남겨둔 남기혁의 흔적, 안면 있는 대피소 사람들의 살해 장면과 가짜 채이를 담은 휴대폰, 협박 편지, 혈액원 연구소에서 가져간 해결책, CCTV에 드러낸 얼굴, 그리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일부러 폭탄의 존재를 보여주고 인한병원을 뭉개 버린 일까지.

그 많은 일에 임유슬의 동생과 인질들이 찍힌 사진이 더해지니, 속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남기혁 일당들은 도청뿐만 아니라 염탐까지 하고 있겠죠. 내가 누나까지 동료로 넣어서 움직이는 것도 봤을 거고요.”

씁쓸하지만, 준성이 남기혁의 성격을 잘 알듯이 그도 마찬가지였다.

“누나가 내 동료가 되면 당연히 김태주 아저씨뿐만 아니라 ‘아군의 동생’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게 돼요. 누나는 동생을 구하고자 할 테고, 난 내 동료가 된 사람의 동생까지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고 무시할 순 없을 테니까요. 뭐, 김태주 아저씨는 내가 더더욱 무시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보험이기도 할 테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럼 남기혁이 일부러 날 이용해서 네가 직접 그놈에게 찾아가도록 판을 짰다는 거야?”

“남기혁은 분명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뒀을 거예요. 누나가 엮인 것도 날 꾀어내려는 수많은 수작질 중 하나였을 뿐이죠.”

만약 임유슬을 매정하게 내치고 그녀의 동생이든, 김태주든, 전부 모른 척한다고 해도 남기혁은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다.

수많은 그물을 펼치고 그중 하나라도 붙잡으면 만사 OK라고 생각하는 교활한 자다.

남기혁의 성정을 잘 아는 준성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나라면 내가 그 많은 그물 중에서 어떤 거에 어떻게 걸릴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인질을 죽이겠어요? 그러느니 그 인질들을 십분 활용해서 함정이나 더 파 두는 게 좋지.”

그러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누나에게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

얘기를 듣는 동안 그새 눈물을 다 닦아 버린 유슬이 물었다. 준성은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얘기를 듣고 있던 유슬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표정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유슬의 대답을 들은 준성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누나. 그럼 당장은 제 말대로 버스 팀 안에서 움직여주세요.”

아까의 초조함이나 두려움 따윈 흔적도 없이 감춰 버린 유슬이 다소 나아진 표정을 보였다.

유슬은 ‘너희 팀도 조심해’라는 말을 남기고서 뒤를 돌았다. 그대로 복도를 걸으려다가 발끝을 멈칫한다.

“내 동생, 정말 살아있는 거겠지?”

“장담할게요.”

준성의 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깊이 숨을 내쉰 유슬이 이내 씩씩한 얼굴로 준성을 돌아보았다.

“너만 믿을게.”

그 말을 남긴 유슬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서 복도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무슨 부탁을 한 거야?”

이때껏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한서가 물었다.

“누나에게 딱 맞는 일이자, 필요한 일.”

“흐음.”

한서는 준성의 말을 곱씹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담았던 보기 좋던 미소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 사람들의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인질들을 구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다만?”

준성이 고개를 돌려 한서를 마주 보았다. 준성의 무심한 듯한 눈동자에는 그에게서 보기 힘든 특별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인질과는 별개로 언젠가 그놈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준성을 지켜보는 한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여버리게.”

준성의 한쪽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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