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36)화 (136/240)

- 136화 -

버스팀이 움직일 구체적인 루트를 짜는 작업이 끝난 후.

준성의 방에서 생각보다 긴 시간을 보낸 일행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은 지금도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준성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재로서는 그가 설명해 준 방법과 루트가 가장 확실해 보였고, 무엇보다도 준성이 한서와 단둘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를 납득해 버렸다.

그럼에도 대욱은 연신 괜찮겠냐며 준성의 팔을 붙들었다. 일행을 나누는 이유와 준성이 그리는 그림을 이해한 것과 별개로, 도한서는 그에게 있어 남기혁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이었다.

“최소한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냐?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장대욱은 확실히 많은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꿈속뿐만 아니라 프로팀에서 쭉 함께 활동했었기에 잘 아는데, 장대욱의 함정 만드는 솜씨와 타고난 임기응변 능력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월등했다.

장대욱이 함께 있다면 남기혁이 갑자기 들이닥치든, 앞서 함정을 지뢰밭처럼 깔아놨든, 무서울 게 없었다.

꿈속에서 그가 남기혁의 손에 몇 번이나 죽어가는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준성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

장대욱이 죽은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의 꿈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꿈을 꾸던 날부터 루트가 막힐 때마다 대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힌 부분을 뚫거나 새로운 루트를 만들려고, 혹은 자신의 몸을 지킬 임시 방어구나 쓸 만한 함정을 만들기 위해 그와 머리를 맞대었다. 가끔은 직접 고안한 생존용 아이템을 치킨과 함께 싸 들고 와서 열렬히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악몽의 한복판에서 만난 장대욱은 언제나 준성의 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꿈이구나.

그럼 나는 네 꿈속에 있는 거냐, 아니면 현실에 있는 거냐.

해맑게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준성은 둘 중에서 딱 한 가지 답을 짚어주진 못했다.

꿈속에서 남기혁의 손에 죽어가던 대욱이 내질렀던 비명은 너무나 짙은 현실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이 순간이 정말 꿈이 맞는 건지, 아니면 현실인지, 준성조차 장담하지 못하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담할 수 있다.

이건 ‘현실’이다.

“넌 나랑 같이 움직이면 안 돼.”

대욱이 스스로 고비를 잘 넘겨준 만큼, 이번엔 절대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남기혁이 채이를 노리고서 대욱이 이끄는 생존자 무리를 위협하러 갔었다는 얘길 들었다. 대욱이 확보한 다섯 개의 야간투시경이 그들을 제압하고 빼앗은 거라는 것도.

준성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침음을 삼켰다.

남기혁은 채이가 대욱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꿈속의 갖은 루트를 더듬어서 찾아낸 거든, 아니면 지하철 대피소에 채이가 없는 걸 알아채고 그녀의 움직임을 분석하다가 알아낸 거든.

남기혁의 목적은 강채이뿐만이 아니었다.

장대욱의 죽음.

남기혁은 그 장면을 채이가 바로 눈앞에서 보기를 바랐을 거다. 오빠인 강준성에게 그녀 입으로 낱낱이 말해줄 수 있게끔.

‘남기혁이 대욱이를 얕봤기에 망정이지.’

사실 남기혁이 보낸 사람 중에는 총을 든 자도 있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얕봤다고 볼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공격 한번 못 해보고 대욱의 손에 제압되고 말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장대욱을 또다시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도한서 외에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마는, 남기혁의 집요한 공격만큼은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남기혁이 제 손발을 자르듯이 아군을 위협하는 걸 완전히 멈췄다고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버스를 꽉 채울 만큼의 많은 인원을 노리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네가 버스 팀의 리더를 맡아줘야 해. 너 말곤 없어.”

대욱에겐 미안하지만, 부담감으로 똘똘 뭉친 책임감을 부여해서라도 그를 버스 팀에 넣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인원을 통솔할 수 있을 만한 인재로 가장 적합한 건 장대욱이기도 했다.

“왜 나야? 두재 아저씨나 창민이 형이 나보다 더 나을 텐데.”

“널 믿고 따르는 일행 수가 훨씬 많아.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수가 따르는 네가 리더를 맡는 게 낫지.”

“단지 그것뿐이야?”

아직 납득하지 못한 대욱이 되물었다. 따르는 인원수 때문에 자신이 리더가 되어야 하는 거라면 제 일행들을 얼마든지 설득해보겠다는 얼굴이었다.

준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좀 더 확실한 이유를 덧붙였다.

“내 꿈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만, 너처럼 대다수의 루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야…, 내가 너처럼 기억력 좋은 줄 알아? 그런 건 진작 다 까먹었다고.”

“당장은 까먹었을지 몰라도 막상 위험해지면 나보다 더 잘 떠올리잖아. 네 주특기를 내가 모르냐?”

갑자기 가해진 부담감 때문에 표정이 복잡해져 버린 대욱의 등을 준성이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만약 다 까먹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사람은 원래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잖아. 네 본능이 알아서 잘 해결해주겠지.”

“누가 들으면 내가 짐승 새끼인 줄 알겠네.”

피식 웃은 대욱이 준성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진짜 짐승 새끼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지? 조심해라.”

말은 준성에게 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그의 뒤에 선 그림자를 노려보는 중이다.

대욱은 도한서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준성이 자신의 뒤에 선 한서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안 보이냐? 이쪽 짐승 모가지에 목줄 채워진 거.”

장난스레 말하는 준성을 바라보던 짐승의 입꼬리가 유려하게 올라갔다. 반면 대욱의 입꼬리는 묘하게 어그러져 버렸다.

“후우…. 알았다, 알았어.”

포기한 것처럼 두 손을 들어 보인 대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잡아먹히든 말든 이제 난 모르겠다. 할 만큼 했어.”

돌아선 대욱의 등마저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채이가 이 얘기 들으면 아마 너 패러 올 거야. 복근이나 단련해 놔.”

“…그래.”

대욱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는 말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강채이가 대학 체육관에 있던 샌드백을 권투 선수처럼 무자비하게 패더라, 라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 얘기를 해준 목격자가 다름 아닌 눈앞의 장대욱이었던 터라,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남몰래 자신의 배를 쓰다듬어보는 준성을 뒤로한 채, 대욱은 아직 머뭇거리고 있던 일행 몇 명을 다독이며 밖으로 향했다.

유독 발걸음을 뗐다가 다시 멈추길 반복하는 건 황경오였는데, 그는 자꾸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기 일쑤였다.

‘응? 경오 아저씨 목이…….’

겉옷 자체가 목깃이 서 있는 상태라서 고개를 들고 있을 땐 몰랐는데, 푹 숙이니까 그제야 목에 붕대가 감겨 있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 창민에게 비상용으로 건네주었던 붕대가 있었으니, 같은 방을 쓰기로 한 경오가 사용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어제 병원을 빠져나올 때 다치기라도 하셨던 건가.’

긴장의 연속이던 상황에서 급히 도망쳐야 했으니 어딘가 상처가 났을 만도 했다.

경오가 마지막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준성을 와락 껴안는 두 팔이 있었다.

“이젠 아예 네 거라고 말해주네.”

한서의 숨결이 준성의 붕대 감긴 목을 쓰다듬었다.

“넌 이런 거 좋아하잖아.”

시선을 돌리며 능청스럽게 말하자, 목에 닿은 입술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 조련하는 거야?”

“왜? 불만이야?”

“아니, 전혀.”

붕대 표면을 더듬듯이 움직이던 입술 사이로 길고 빨간 혀가 튀어나왔다. 붕대를 쓰다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더 해줘요, 주인님.”

“너 하는 거 봐서.”

가볍게 튕긴 준성이 자신을 속박한 두 팔을 떼어냈다. 순순히 떨어져 준 한서가 앞서 걷는 준성의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끝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강준성, 얘기 좀 해.”

나타난 건 임유슬이었다.

모두가 인한시를 탈출하기 위해 피난소로 향할 거라는 말을 듣고 이를 납득하지 못해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녀로서는 남기혁이 붙잡아둔 자신의 동생을 찾아야 하는데, 그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쪽으로 인한시를 탈출하겠다고 하니까 마음이 급했던 듯하다.

“난 내 동생과 같이 나가는 거 아니면 못 가. 나 혼자서라도 남기혁을 찾으러 갈 거야.”

“남기혁이 어디 있는 줄 알고요?”

유슬이 눈가를 구기며 이를 갈듯 말했다.

“몰라.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내고 말겠어.”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움직여주세요.”

“알긴 뭘 알아?! 넌 인질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네.”

준성의 냉정한 시선과 얼음송곳 같은 말이 유슬을 향했다. 그녀의 두 눈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뭐?”

“인질 따위, 상관없다고 했어요.”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분노에 찬 유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준성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날카로운 쐐기를 박았다.

“알지도 못하는 인질 챙기다가 내 사람들이 위험해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누나가 책임질 수 있어요?”

“책임이라니…….”

기세에 눌린 유슬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준성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속삭였다.

“내 사람들 뒤지면 그 책임, 누나가 어떻게 져줄 건데요?”

혹한을 닮은 싸늘한 공기가 유슬을 가차 없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준성의 눈동자가 이때만큼은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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