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 8일째
점심시간이 멀지 않은 오전.
일행 중 몇 사람을 스위트룸 거실에 모아놓은 준성이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의 일에 관해 얘기하려고 불렀어요.”
앉을 때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눈가를 한차례 꿈틀한 준성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모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거실에 모인 건 6인이었다.
강준성, 도한서, 서창민, 황경오, 곽두재, 그리고 장대욱.
전원 ‘강준성의 꿈’에 대해 아는 자들이었다.
원래는 강채이도 이 자리에 부르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채이를 무시하는 건 아니나,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는 그녀라면 겨우 만난 제 오빠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을 하게 놔두지 않을 것 같았다. 준성 본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서 지안에게 채이와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친화력 좋은 지안이라면 채이와 금세 친해질 수 있을 테고, 불안해하는 그녀의 좋은 말벗이 되어줄 수 있을 거다.
잠시 채이를 떠올려 보는 사이, 대욱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목은 왜 그래?”
준성이 흠칫하며 제 목을 쓰다듬었다. 아침에 급히 감았던 붕대의 까끌까끌한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벌레가 심하게 물어서…….”
“겨울이 코앞인데?”
“몰라, 겨울 벌레인가 보지.”
물린 면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밴드가 아니라 붕대를 감을 수밖에 없었던 준성은 남몰래 그 ‘벌레’를 힐끔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다.
목을 휘감은 붕대에 쏟아진 불필요한 시선을 쳐내듯, 준성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욱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그쪽 생존자들은 지금쯤 총 32명일 텐데, 맞아?”
대욱이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채이를 제외하면 나까지 32명이야.”
“인원수가 똑같으면 아마 구성원도 같겠지. 주 전투원은 버스에 있던 사람들하고 다른 쪽에 남겨둔 세 명뿐일 테고.”
“…알고는 있었지만 좀 소름 돋는데.”
대욱이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무섭다는 듯이 말했다.
버스에 탑승해 있던 대욱 일행은 장대욱과 강채이, 그리고 운전수를 포함한 12명뿐이었다.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는 15명, 그중에서 세 명은 다른 생존자들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남겨두었다.
버스의 인원을 전투 가능자들로만 구성했던 이유는 일찍이 준성에게 들었던 인한병원의 정보 때문이었다. 언제나 좀비들이 가득 둘러싸고 있는 건물이라고 들었기에, 그때 들어둔 진입 루트를 알고 있음에도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준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모두를 바라보았다.
“다들, 대욱이네 생존자 집단과 합류하세요. 합류 이후의 루트는 제가 미리 짜드리겠습니다.”
준성의 말에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건 서창민이었다.
“왠지 넌 빼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맞아요.”
둘러댈 생각도 없이 즉답했다. 그러자 일행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우, 우리만 가라고?”
“준성 씨는 같이 안 가겠다는 겁니까?”
당황한 경오와 심각한 얼굴의 두재가 동시에 물었다. 이번에도 준성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대욱이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라렸다.
“야, 말이 돼? 너 혼자 남아서 뭘 어쩌려고?”
“진정하고 앉아봐, 장대욱.”
대욱의 목소리가 화를 낼 것처럼 낮아지기에, 준성이 그에게 진정하라며 눈짓했다. 못마땅한 얼굴의 대욱이 입술을 꾹 깨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대부분의 흐름은 제 꿈과 같지만, 결정적으로 크게 두 가지가 달라요. 하나는 이미 좀비들이 인한시를 뚫고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꿈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 …그 살인마를 말하는 거 맞지?”
어렵잖게 두 번째 차이점을 파악한 창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변수 중의 변수.
준성의 꿈을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그를 괴롭히고 집착하는 살인마.
꿈을 기억하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남기혁은 분명 그 안에서 움직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꿈속의 일개 주민에 불과했던 남기혁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 새로운 회차가 시작될 때마다 ‘강준성을 만나기 이전’으로 기억이 리셋되었다. 해사한 미소를 건 채 착한 척 위선을 떨던 모습에는 눈치 빠른 준성마저 속아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는 준성에게 ‘남기혁의 장난감’이라는 형태로 돌아왔었다.
남기혁에게 끝없이 목이 졸리던 때를 떠올리며 입술을 떨던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의 남기혁은 그냥 무시해도 될 정도였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저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꿔온 꿈을 그도 기억하고 있다지만, 그와 함께했던 회차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기혁과 만나지 않은 회차의 기억들만 조합해서 안전 루트를 만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남기혁은 그렇게 놔두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할 법한 루트를 방해하고 동생의 목숨까지 위협하며, 나아가 전원을 병원 밑에 매몰시키려 했다.
어쩌면 남기혁은 7일째에 강채이가 병원에 다다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7일째 밤에 예쁨받던 그 공장으로 와.]
[안 오면 동생 머리 들고 내가 직접 데리러 갈 거야.]
남기혁은 마치 지하철 대피소에 남겼던 그 메시지대로 7일째 밤에도 오지 않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8일째가 되자마자 인한병원을 무너뜨렸다. 병원 건물에 깔려 죽은 채이의 머리를 들고 자신을 찾아오려던 거였을까. 어쩌면 시체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자신에게 굳이 동생의 머리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남기혁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만, 그놈은 내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아.’
인한병원에서의 일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상당히 많았다.
자정에 터진 경고성 폭발, 자신이 확인하길 기다린 것처럼 뒤늦게 가동하던 시한폭탄들.
마치 준성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잘 살아남아 보라고. 너라면 가능할 거라고.
즐거운 눈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남기혁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폭탄의 이상함뿐이었다면 이처럼 민감하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기혁의 또라이 짓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겠지.
무너지는 건물에서 한 줄기 동아줄을 잡으라는 것처럼 나타난 대욱 일행의 버스.
장담하건대, 그건 분명 남기혁의 의도일 것이다.
‘미친 새끼. 대체 뭘 얼마나 기억하는 거야?’
남기혁과 함께했던 회차는 장대욱과 일행이었던 회차이기도 했다.
그 회차에서 장대욱은 동료라고 믿었던 남기혁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일행이 여기까지 타고 왔던 바로 그 버스 안에서.
준성은 밝은 빛이 내리쬐는 아침에 창밖을 보다가 뒤늦게 대욱 일행의 버스를 알아보았다. 공사장의 철판을 덧댄 성능 좋은 고속버스가 모텔 주차장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꿈속에서 나름 활약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 버스는 꿈속에서 일찍이 대욱과 합류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 버스에 철판을 덧대어 방어력을 높이는 방법을 생각한 것도 준성이었다.
그런 버스가 그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눈앞에 있다. 그것도 저 버스 안에서 죽음을 맞았던 장대욱과 함께.
이게 과연 우연일까.
장대욱의 이동 루트에는 원래 저런 버스 따위, 있지도 않았다.
‘대욱이 일행이 움직이는 루트에 일부러 보란 듯이 버스를 놔둔 거겠지.’
대욱 일행 중에 베테랑 버스 운전수가 있다는 건 남기혁도 알고 있는 바였다. 눈앞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이동 수단이 있고 그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잘 아는 사람과 운전수까지 갖춰져 있으니, 손을 대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해서 장대욱과 버스라는 키워드를 들이민 이유가 뭘까.
‘대욱이를 또… 내 앞에서 죽일 생각인가.’
그때를 상기하라는 것처럼 들이밀어진 키워드에 준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쩌면 눈앞에서 무턱대고 죽이려는 게 아니라 인질로 삼고 뒤흔들려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는 게 싫다면 스스로 자신에게 오라는, 남기혁의 좆같은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성은 남기혁의 메시지대로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행이 그딴 놈에게 이용당해 죽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제 생각을 간략하게 전한 준성이 어두운 낯빛의 일행에게 말했다.
“남기혁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게 절 압박하려 들고 있어요. 그러니 두 패로 나눠서 움직일 겁니다.”
“두 패로 나눠서 탈출하자는 말입니까?”
“한쪽은 탈출구를 찾아 움직일 거지만, 다른 한쪽은 아니에요.”
“그게 무슨…….”
이런 상황에서 남기혁을 피해 좀비 소굴을 탈출하는 방법 말고 뭘 더 찾아야 한다는 걸까.
준성은 의문을 담은 일행의 얼굴을 보며 제 옆자리에 앉아있는 한서를 가리켰다.
“저와 이 녀석은 이 좀비 세계를 끝낼 ‘진짜 해결책’을 찾으러 갈 겁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일행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오직 도한서만이 준성이 말하기도 전에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