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강준성, 얘기 좀 해.”
경계의 빛을 품은 대욱이 한서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거 일일이 터치 안 하는데…….”
“그럼 쭉 터치하지 마.”
한서가 눈꼬리를 휘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선택은 개개인이 하는 거지. 안 그래?”
“그 선택이 강압에 의한 거라면 말이 달라.”
“강압이라…….”
안 그래도 차갑던 한서의 눈동자에 한기가 서렸다. 대욱에게서 물러날 때 준성이 볼 새도 없이 주머니 속에 숨겼던 잭나이프가 그의 손에 착 감겨들었다.
“강압?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야기에 의아함을 내보이던 준성이 대욱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순간, 눈앞이 홱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에 몸이 휘청했다.
“야, 괜찮아?!”
“오빠!”
준성의 다리가 꺾이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으며 외친 대욱과 채이보다 도한서가 한발 빨랐다.
준성의 뒤에서 그의 허리를 팔로 휘감아 당겨 제 품에 안은 한서가 주변을 찌를듯하던 한기를 금세 거두었다.
한서의 몸에 완전히 기대어 선 꼴이 된 준성이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머리를 두어 번 내저었다.
“미안, 어제 잠을 좀 못 잤더니…….”
“억지로라도 잤어야지. 오빤 잠 모자라면 바로 반응 오잖아.”
종종 준성이 수면 부족 때문에 휘청거리던 걸 기억하는 채이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차마 ‘네 걱정하다가 못 잤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준성은 그저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짧게나마 잔소리를 하려던 채이는 준성의 이마를 자연스레 짚어 보는 한서를 올려다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자신을 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따뜻한 눈빛이 준성을 어루만지듯 내려다보고 있다.
“열도 있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말 들어.”
모두가 무사한 걸 두 눈으로 보기도 했고 큰 고비를 넘기면서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그 탓에 여태껏 버티던 몸이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한서는 자신의 손에 얌전히 이마를 맡기고 있는 준성을 자상하게 내려다보다가 도로 눈빛을 바꾸었다. 준성을 바라볼 때와는 또 달라져 버린 차가운 눈빛이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는 대욱과 채이에게 향했다.
“얘기할 거 있으면 내일 해. 보다시피 좀 재우고 싶어서 말이야.”
마치 보호자처럼 구는 한서가 마음에 안 들었던 대욱이 준성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 방에서 같이 자자.”
한서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가 대욱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쥐었다.
“누구 마음대로?”
“윽, 너……!”
대욱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으득, 하는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센지, 제 손목이 통째로 부러져 뽑혀 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대욱은 꽉 붙잡은 준성의 팔을 놔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위험한 놈에게 맡겨뒀다가는 준성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앞섰다.
이글거리는 눈빛의 두 사람 사이에 껴 있던 준성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중재에 나섰다.
“둘 다 그만 안 해?”
준성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대욱의 손을 떼어냈다. 한서가 떼어내려 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손이 얌전히 떨어져 나갔다.
“나까지 가면 네 방에만 셋이야. 한 침대에서 남자 셋이 부둥켜안고 자자고?”
“한 명 여기로 보내면 되지.”
“그 사람이 얘 눈빛 보고 퍽이나 그러겠다고 하겠다.”
도한서의 눈빛에 문제가 있다는 건 준성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나마 기존 동료들에게는 너그러운 편이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으니, 그와 같은 방을 쓰겠다는 사람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한서에게 붙잡혀 있던 손목을 홱 당겨서 빼낸 대욱이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를 보던 준성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얼굴을 했다.
“나 진짜 졸려 죽을 거 같아서 쉬긴 해야겠다. 내일 얘기하자.”
“…괜찮겠냐?”
걱정스러운 눈의 대욱이 여전히 한서를 경계하며 물었다. 준성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작게 웃었다.
“얘 통제할 수 있는 건 어차피 나밖에 없어. 떨어져 있는 게 더 불안해.”
“…….”
준성의 말을 들은 대욱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서를 노려보다가 결국 채이를 데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걱정과 경계의 눈빛을 잃지 못하던 대욱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안에 남아있던 따가운 공기가 금세 평온하게 바뀌었다.
한서는 여전히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준성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쩐지 장대욱과 강채이를 한 번에 이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유치한 감정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 준성을 한서가 안아 들어 소파에 앉혀주었다. 제대로 움직일 힘도 없는 것처럼 늘어진 준성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듯 앉은 한서가 양말을 벗겨주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바로 잘까?”
“아니, 씻어야지. 모처럼 욕조도 있겠다, 마음 놓고 씻을 수 있으니까 이럴 때…….”
채이와 대욱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나마 또렷한 맑은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피곤함이 뚝뚝 묻어버린 나른한 음성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여태까지 잘 버텨왔고 지금은 굳이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여줄 사람도 없었기에 너무 편안해진 탓이다.
준성의 양말을 곱게 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늘어진 몸을 안아서 코트까지 벗겨준 한서가 이번엔 그의 셔츠에 손을 대었다.
“내가 씻겨줄까?”
단추를 세 개째 풀어줄 때쯤, 준성이 그의 손을 붙잡아 멈췄다.
“아니, 넌 왠지 하루 내내 씻기고 있을 것 같아.”
“눈치가 빠르네.”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피식 웃은 준성이 한서 대신 직접 제 옷을 풀기 시작했다. 한서가 얼핏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눈앞에서 준성이 나른한 표정으로 옷을 벗고 있으니 그건 그거대로 마음에 든 눈치였다.
셔츠까지 벗어버린 준성은 하얀 상체를 드러낸 채 바지만 입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당연한 것처럼 뒤를 따르는 한서에게 매몰찬 눈빛과 함께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물소리가 멈추고 참방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다가 멈추었다. 그 후로 몇 분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욕실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준성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서는 문득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욕조 얘기까지 한 걸 봐서는 피로도 풀 겸 몸을 푹 담글 모양이던데, 아무리 그래도 20분이 넘도록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반투명한 유리로 된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려던 한서는 잠깐 멈칫하다가 짧게 노크했다.
“강준성.”
방음이 잘되지 않는 유리문이라 노크든 목소리든, 안에서는 다 들렸을 텐데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노크를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한서는 문을 잠그는 기능조차 없는 조악한 유리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에 차 있던 따뜻한 수증기가 한서의 차가운 얼굴을 덮었다. 뿌연 시야를 안고 더 깊이 들어가니, 원형의 넓은 욕조 밖으로 나와 있는 준성의 얼굴이 보였다.
욕조에 가득 담긴 따뜻한 물에 취해버린 준성의 얼굴은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를 시원하게 쓸어올린 덕분에 훤히 드러난 둥그런 이마와 섬세한 눈썹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굳게 닫힌 눈꺼풀에서 길게 뻗어 나온 까만 속눈썹이 수증기를 머금어 촉촉하게 빛났고, 그 아래에 열매처럼 붉게 떠오른 광대뼈가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미약한 숨소리를 흘리는 붉은 입술에 시선이 닿았을 즈음, 한서는 어느새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음….”
한서의 기척을 느끼고서 눈가를 파르르 떨던 준성이 스르르 눈을 떴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서 몇 번 눈을 깜빡여 보니, 눈앞에 상체 탈의를 마친 도한서가 있었다.
“뭐야…, 나 잠들었어?”
물기 묻은 손으로 눈가를 비비던 준성은 이어진 첨벙 소리에 눈을 들었다. 어떤 미친 사람들이 옷 벗기 대회를 연다면 이놈이 단연코 1등을 먹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옷을 벗어버린 한서가 이젠 욕조 안에 발을 들이고 있다.
모텔이라고는 하지만 스위트룸에 준비된 욕조답게 두 사람이 들어와 있어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라, 물이 넘치거나 비좁진 않았다.
피곤함 때문에 평소보다 신경이 무뎌진 준성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씻으려고? 난 이제 나갈 테니까 물 버리고 새로 받아서…….”
“그럴 필요 없어.”
준성의 말을 막은 한서가 그의 위에 올라타듯이 몸을 기울였다. 옆에 버젓이 앉을 공간이 있음에도 준성을 덮치듯이 두 팔 안에 가둔 한서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씨발, 이걸 왜 버려? 누가 씻은 물인데, 아깝게.”
한서를 올려다보던 준성은 일순 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자신의 배를 쿡 찌르듯이 닿아버린 단단한 게 무엇인지 눈치채버린 탓이다.
‘이 새낀 왜 또 발정 나고 지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