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한서의 진심 어린 적의를 받은 대욱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졌다. 목울대에 차가운 이빨이 닿는 느낌이라,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제야 알았다.
눈앞의 남자는 위험한 놈이라는 걸.
‘준성이는 왜 이런 놈과…….’
도한서의 벼려진 살기를 체감한 대욱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 위험성을 준성이 모를 리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굳이 옆에 두고, 심지어 오래도록 절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붙어 있었다.
준성이 한서를 얼마나 가깝게 생각하는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무심하고 한편으로는 냉정하기까지 한 준성이 한서에게는 스스럼없이 제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기대기도 한다는 걸 알아챘다. 한서 역시 준성과 같은 느낌이었고, 그를 보호하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도 엿볼 수 있었다.
대욱이 기억하기로, 준성에게 그의 꿈에 대해 들을 때 도한서 같은 인물은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서창민, 이지안, 황경오, 곽두재, 이런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아봤지만, 두 명의 낯선 남녀와 도한서만은 예외였다.
‘이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내가 듣고도 모를 리가 없어.’
하물며 타인에게 쉽게 살기를 날리는 위험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처럼 준성과 절친한 친구 포지션으로 곁에 붙어 있다는 게 영 불안했다.
한편으로는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준성인데, 왜 그를 가까이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욱이 한서를 말없이 마주하며 짙은 경계심을 품기 시작할 때.
한서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손등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강준성하고는 언제부터 친했어?”
적의를 담은 벽을 쳐둔 것치고는 의아할 정도의 평범한 질문이었다.
대욱은 한서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거의 10년쯤 됐을걸. 고딩 때부터 붙어 다녔으니까.”
“흐음….”
한서의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 ‘10년’이라는 단어와 ‘붙어 다녔다’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곱씹어졌다.
자신이 모르는 10년.
그 시간 동안 준성은 도한서라는 인간이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눈앞의 장대욱과 마음껏 웃으며 가까이 붙어 다녔다.
친구, 라는 이유 하나로.
“나도 친구인데. 불공평하게.”
“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라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째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느낌이 무색하게도, 한서의 얼굴에 아까와는 다른 매력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경계하던 대욱조차 일순간 생각을 멈춰버릴 정도로.
한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를 돌아 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대욱이 앉은 소파 뒤로 천천히 향했다.
“강준성 친구 중에 아는 놈 더 있어?”
한서가 얼굴에 내건 미소 때문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온몸이 수많은 송곳에 쿡쿡 찔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또 아무렇지 않아졌다.
“몇 명 있긴 한데…….”
“그놈들도 너처럼 10년이나 알고 지낸 놈들이야?”
“아니, 내가 제일 오래 친구 먹었을걸. 그리고 다른 놈들은 다들 연락 끊긴 거로 알아.”
“그래? 그 정도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놈들이겠네.”
홀린 것처럼 순순히 대답하던 대욱은 어느새 한서가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젖혀 한서를 거꾸로 올려다보니, 그의 입가가 만든 곡선이 이상할 정도로 무서웠다.
한서가 몸을 숙여, 대욱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너만 없으면…….”
대욱은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뭔가를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날카로운 얇은 칼날에 비친 자신의 놀란 눈동자가 마주 본다.
한서의 입술 사이로 희미하고도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제일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될 수도 있겠어? 그치?”
* * *
채이의 손에 방으로 끌려 들어간 준성은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를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채이는 버스 안에서 부둥켜안았을 때부터 지금 이때까지도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겨우겨우 흐르지 않게 버티고 있던 게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빠른 속도로 셔츠를 적시고 있는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오래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서 준성마저 당황하는 중이다.
그만큼 동생이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숨죽여 운 지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준성은 그녀를 침대에 앉혀두고서 눈물로 엉망인 그녀의 얼굴을 티슈로 상냥히 닦아주었다.
“못생겨졌잖아. 그만 울어.”
“애인도 없는데 못생기면 뭐 어때.”
새침하게 받아친 채이가 준성의 손에서 티슈를 빼앗아갔다. 그녀의 거친 손놀림이 얼굴의 물기를 가차 없이 지워갔다.
‘이제 좀 괜찮나 보네.’
보아하니 스스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울었고, 자신의 유치한 말을 받아쳐 줄 정도로 기운도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안심할만했다.
하지만 반대로 준성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미안.”
“뭐가?”
축축해진 티슈를 손에 꼭 쥔 채이가 물었다.
“위험하게 만든 거.”
“그걸 왜 오빠가 미안해해? 오빠 탓 아니잖아.”
“아니, 내 탓이야.”
준성이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모텔까지 오는 도중, 대욱에게 간단하게나마 그들이 지나온 일주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대욱과 채이가 만난 건 준성의 예상대로였다.
준성을 쫓아 무턱대고 달려나간 채이는 그가 이동했던 방향의 선로를 죽기 살기로 달렸고, 도중에 대욱과 만날 수 있었다. 해당 역에 있던 모두와 합심해서 좀비들을 막아낸 대욱은 그들과 함께 이동하며 채이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렸다.
지금 이 좀비 사태가 준성이 거듭해서 꿔왔던 악몽과 똑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고.
대욱은 준성의 모든 꿈을 일일이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종종 조언을 얻고 의논을 하기 위해 연락할 때마다 들어왔던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이 어떤 역에서 좀비들을 막아내고서 그 생존자들과 무리를 만들 거라는 내용도 있었다.
준성에게 들었던 꿈속 내용은 대부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채이가 합류하게 된 건 예상치 못했지만, 준성 본인이 꿈속과 다르게 행동했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대욱에게는 모처럼 만나게 된 채이를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준성과 알고 지낸 시간만큼 채이와도 연이 깊었기에 당연히 그녀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친한 친구라는 걸 떠나, 강준성은 이 좀비 사태를 가장 잘 알고 앞날까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와 합류하면 생존율이 월등히 올라갈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 사태를 빠르게 끝낼 열쇠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내용을 모두 듣게 된 강채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납득해주었다. 아니, 납득하지 않으면 설명되지 않는 게 너무 많았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대학에 나타난 오빠.
좀비들이 날뛸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도 철저했고,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를 열어줄 사람이 나타날 시간과 그 안의 대피소에 관한 것도 수상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원래 평정심을 잘 잃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순간에 좀비가 가득해진 세상 속에서 그처럼 침착한 건 충분히 이상했다.
꿈에 대해 알게 된 채이는 정말 허무맹랑해도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알던 장대욱은 원래 거짓말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준성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던 사람 중에 유일하게 이름까지 기억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모두 납득하고 보니, 울컥할 정도로 제 오빠가 바보 같았다.
이런 무서운 꿈을 매일 꾸고 있었으면서 제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꾹 참아냈다. 만약 자신이 준성처럼 이런 꿈을 꾸고 있었다면 일주일도 안 되어 정신이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제 탓이라고 한다.
꿈을 꾸게 된 것도 본인 의지가 아니었으면서, 동생의 제멋대로인 행동조차 그의 탓으로 만들어버린다. 미련하게.
생각이 가득 찬 채이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준성이 얼른 티슈를 들어 채이의 눈가를 살살 문질러주었다.
“그만 울라니까. 내일 붕어되고 싶어?”
“몰라, 멍청아.”
새 티슈마저 축축하게 만들어버린 채이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채이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도한서 선배, 오빠 꿈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게 정말이야?”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채이가 그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그럼 상황 봐서 따로 움직이자. 그 선배, 느낌이 이상해.”
“이상하다니?”
채이가 눈을 내리깐 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한 듯 말했다.
“자꾸 오빠를 잡아먹을 것 같단 말이야.”
준성의 몸이 짧게 움찔했다.
그는 차마 이미 잡아먹힌 전적이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