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창민에게 다가간 준성은 그가 비추는 곳을 보며 멈칫하고 말았다.
창민이 손전등을 비춘 곳은 대형 에어컨 실외기들이 늘어선 자리였다. 겨울을 앞둔 때라 당연히 에어컨을 쓸 일이 없었던 병원에서는 이 실외기들에 제각각 방수 덮개를 씌워 둔 상태였다.
그중, 창민이 직접 덮개를 반쯤 걷어 둔 것으로 보이는 가장 가까운 실외기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A4용지 정도 크기의 사각 물체 두 개가 실외기 아래쪽 바닥에 일정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손전등의 빛에 드러난 앞면에는 색색의 전선이 복잡하게 연결된 이상한 기계 덩어리가 있었는데, 회로를 품은 패널 밑으로 검은 테이프나 비닐에 싸인 것처럼 보이는 수상한 물체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물체의 정체를 금세 파악해 버린 준성을 보며, 창민이 다른 아홉 대의 대형 실외기를 가리키듯 비추었다.
모든 실외기의 덮개 아래, 텅 비어 있어야 할 여분의 공간에 수상쩍은 두 개의 물건이 놓여 있다. 멀리서 얼핏 보면 실외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넓은 다리인 줄 알 것이다. 그 물체들의 크기와 배치 간격마저 덮개를 걷어 낸 실외기 밑과 똑같은지라, 그 정체를 파악하는 건 금방이었다.
일행이 옥상을 살필 때 이를 발견하지 못했던 건 전날부터 내린 비 탓에 외부 수색이 여의치 않은 탓도 있지만, 워낙 꼼꼼히 확인해 볼 만한 물건이나 공간이 없기 때문도 있었다.
이곳 인한병원 본관 옥상은 헬기의 이착륙을 위해 이렇다 할 물건을 두거나 지형지물을 꾸밀 수 없었고, 이 실외기들조차 사이사이에 사람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간격을 두고 나열해 있었다. 실외기에는 밑바닥까지 거의 다 가려 주는 덮개가 덮여 있었으니, 지금처럼 극도의 경계심을 담아 아래쪽을 눈여겨보지 않았더라면 저런 물건이 붙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준성이 제 옆에 있는 한서의 팔을 붙잡으며 한발 물러서던 그때.
삑-
섬뜩한 기계음이 세 사람의 귀를 파고들었다. 모든 실외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렸기에 마치 한 기계가 제법 큰 소리로 알림음을 낸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창민이 든 손전등이 크게 흔들렸다.
[09:55]
손전등이 비춘 장치의 패널에는 작은 액정이 달려 있었다. 그곳에 뜬 어렴풋한 녹색 불빛이 숫자를 나타내는 게 보였다.
[09:54]
디지털 시계처럼 깜빡거릴 때마다 가장 뒷부분의 숫자가 바뀌어 갔다.
[09:53]
숫자가 줄어, 이윽고 뒤에서 두 번째 숫자가 ‘4’로 바뀌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창민이 준성과 한서에게 소리쳤다.
“시한폭탄이야!”
멈춰 있던 사제폭탄(IED)이 움직였다.
제한시간은 1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꿈속에서조차 저렇게 그럴듯한 폭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준성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 * *
인한병원 옥상의 첫 폭탄이 터지기 직전.
강채이는 버스 천장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손전등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7층을 바라보며 여전히 필사적이었다.
곧 채이는 병원 7층의 한쪽 창가에 우르르 모이는 사람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저 사람들 중에 오빠가…….’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생사도 모르고 떨어져 있던 오빠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잔뜩 흥분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무작정 준성을 쫓아 지하철을 달리다가 만난 건 정작 제 오빠가 아니라 그의 친구 장대욱이었다. 어릴 때부터 안면이 있었던 장대욱은 그녀에게 무척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중 하나가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감염자에겐 물려도 감염되지 않는다’였다.
채이는 준성이 좀비 바이러스에 걸린 남자에게 물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편지까지 남긴 채 그를 뒤쫓으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앞으로 자신이 만나게 될 좀비 중 하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도, 대욱의 말대로라면 그때 준성은 감염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감염자와 좀비들을 대피소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준성이 아무 생각도 없이 유인책을 자처할 리가 없었다.
준성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이긴 해도 매사에 굉장히 냉정한 편이었다. 대책도 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임기응변도 뛰어난 똑똑한 사람이니, 그라면 이런 끔찍한 악몽 같은 세상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채이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이윽고 그가 말했던 ‘일주일째’와 ‘인한병원’이라는 키워드를 믿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빠는 이미 이런 세상을 수도 없이 겪었으니까…….’
생각하다 보니 울컥해졌다.
그는 대체 이 악몽을 두 눈에 몇 번이나 새겨야 했던 걸까.
“바보…. 등신….”
오빠를 향해 흘러나온 욕설에는 불온한 악의 대신 측은함과 미안함만이 담겨 있었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두 달 넘게 연락도 주고받지 않는 일 따윈 없었을 테고, 준성이 꿈에 대해 가장 먼저 말한 상대는 자연스레 장대욱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괜한 후회를 하며 손전등을 꽉 쥐던 그때.
쾅-!
멀리서 들린 갑작스러운 폭음과 번쩍이는 불빛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서 짧은 비명을 터뜨리다가 후다닥 입을 막는 듯했다.
캬아악-!
폭음을 들은 인근의 좀비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주변에는 건물을 에워싸는 것처럼 좀비가 바글바글했는데, 폭음으로 청각에 자극을 받은 이들이 몰려들어 더욱 불어나고 있었다.
얼른 손전등을 끄고서 숨죽인 채 병원을 눈으로 살피던 채이는 다행히 폭발이 일어난 부분이 병원 옥상이며 7층은 아무 피해도 없다는 데에 안도했다.
“채이야, 괜찮아?”
채이의 아래쪽에서 한 남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밟고 서 있던 나무상자 아래로 내려온 채이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대욱에게 대답했다.
“응, 난 괜찮아. 그보다 병원 옥상에서 뭔가 폭발한 것 같던데.”
“터지는 모양새로 봐서는 자연스러운 폭발이 아니야. 저 위는 헬기장이라고 들었으니 폭발할 만한 물건도 없을 거고.”
기껏해야 비를 잘못 맞은 가전제품 같은 게 터진 게 아닌가 생각했던 채이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굳혔다. 대욱의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당장은 그런 걸 낱낱이 따져 보고 조사할 틈이 없었다.
대욱은 야간투시경 너머로 보이는 강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돌렸다. 채이를 노리고 습격해 왔던 자들에게서 빼앗은 야간투시경 5개 중 하나를 쓰고 있는 운전수가 그에게 뭐든 명령만 하라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계획을 변경하죠. 버스는 이대로 대기하고 저랑 몇 명만…….”
“대욱아, 저기!”
또 하나의 야간투시경을 쓴 채 버스 후미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여자가 병원 쪽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상한 게 날아와!”
그 말에 버스 안의 십여 명이 단숨에 병원 방향 창가에 달라붙었다. 채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의 눈에는 주변이 워낙 깜깜한 터라 뭐가 날고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야간투시경을 쓰고 있는 대욱에게는 아주 잘 보였다.
“드론이야. 뭔가를 매달고 있어.”
날아오는 것의 정체를 말해 준 대욱이 채이에게서 손전등을 받아들고는 그가 직접 상자 위에 올라섰다. 상체를 밖으로 내밀고서 손전등으로 등대처럼 원을 그리듯이 휘두르되, 좀비들의 시야에는 자극을 주지 않도록 조심했다.
등대 역할 덕분인지 허공을 천천히 날던 드론이 버스 쪽으로 속력을 높였다.
대욱이 상체를 내밀고 있는 버스 지붕에 도착한 드론은 배 부분에 뭔가를 붙이고 있었는데, 확인해 보니 경호원들이나 쓸 법한 인이어가 연결된 작은 무전기 하나와 작은 쪽지였다. 쪽지 안에는 무전기의 기본적인 사용법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기에 받는 상대가 누구든지 쉽게 무전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쪽지까지……. 태평하다고 해야 하나, 냉정하다고 해야 하나.’
막상 무전기를 받은 상대가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면 보낸 의미가 없다. 자칫 잘못 만졌다가 큰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좀비가 몰려갈 게 뻔하기에 이렇게 쪽지까지 적어 준 것이다. 갑작스러운 폭발을 겪었음에도 이런 데에까지 세심히 신경을 쓸 수 있다니, 꽤나 냉정한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냉정한 사람’이란, 역시나 대욱이 예측하던 인물이었다.
-들리나요?
쪽지에 적힌 대로 인이어를 귀에 꽂고서 손전등을 휘저어 신호를 보내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욱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직 살아 있네, 강준성.”
-너도 잘 살아 있었네.
맞대응하듯이 장난스러운 말을 건넨 준성이 잠시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대욱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안다는 듯, 그가 먼저 대답했다.
“채이는 나랑 같이 잘 있어.”
-그래. …고마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억누르는 게 보이는 짧은 인사였다. 대욱은 그런 준성의 얼굴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여,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 달리 준성의 분위기는 단숨에 급변했다.
-가능하면 우릴 좀 도와줬으면 해.
“당연하지. 애초에 그러려고 왔는걸.”
대욱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인한병원 7층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뭘 하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