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준성은 그를 안고 있던 한서를 주저 없이 밀어내고서 한달음에 병실을 뛰쳐나갔다. 이제껏 차분한 모습만 보이던 그였지만, 이때만큼은 느긋하게 굴 수가 없었다.
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슬의 얼굴에 안도와 흥분이 겹쳤다. 그녀 역시 동생과 떨어져 버린 준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지금의 상황에 감정을 깊이 이입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달아오르려는 눈가를 손으로 거칠게 훔친 유슬이 문득 한서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두껍고 차가운 벽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지만 준성에 관해서는 꽤 따뜻해 보였는데, 그와 떨어진 탓인지 주변 공기가 답답할 만큼 무거웠다.
‘쟤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친한 친구의 일이니까 한서도 꽤 진심 어린 안도감 정도는 보여 줄 줄 알았다.
준성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날카롭고 차가운 무표정이 유슬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역시 좀 무섭고 꺼림칙한 애야.’
짧게 몸을 떤 유슬이 얼른 병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한서는 활짝 열린 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시야에는 밝은 빛의 복도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벽을 투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준성의 작게 미소 띤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한서는 준성을 토닥였던 자신의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손아귀에 뭔가 있었다면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꽉 쥐었던 주먹을 펼치자, 하얗게 센 손바닥이 곧바로 붉게 변했다. 누군가의 피가 묻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감정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강준성에게 달라붙는 것들은 뭐든 거슬렸다. 그와 말을 섞기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직접 손을 대는 건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감정이 요동쳤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강준성에게는 그들보다 자신이 더 소중할 테니까.
그 확신이 있었기에 참아줄 수 있었던 건데, 상대가 강채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좀처럼 억누르기가 어렵다.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 병실을 뛰쳐나가던 강준성이 언젠가 강채이와 자신 사이에서 같은 행동을 할까 두렵다.
아니.
자신을 혼자 두고 갈까 봐 무서운 거다.
‘그렇군.’
새삼 느낀 거지만, 이 감정은 질투 같은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끔찍한 놈이다.
한서는 자신의 재킷 주머니 속에 있던 잭나이프를 꺼내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제외하면 아주 깨끗하고 잘 관리된 칼이었다.
한서는 여태껏 유일하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잭나이프의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서슬 퍼런 짧은 칼날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강준성이 못 봐서 다행이야.’
이런 지독한 얼굴을 그 녀석이 봤다면 이번에야말로 겁먹었을지도 모른다.
날카롭게 벼려진 이 나이프 외에는 뭔가를 내 것이라 여기고 욕심내서 가졌던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감정이 낯설었다. 집착, 소유욕, 그런 단어들보다 몇 배는 더 큰 뭔가가 자꾸만 속을 귀찮을 정도로 긁어대고 있었다.
‘괜찮아.’
강준성을 다독일 때 쓰던 말을 제게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잘 벼려진 칼날을 몸속에 접어 넣고서 이를 또 한 번 숨기듯이 재킷 주머니에 푹 넣었다.
‘날 버리고 가지만 않으면… 괜찮아.’
그 말이 맹견을 제어하는 목줄이라도 된 것처럼 도한서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혀 갔다.
로비로 나간 준성은 일행이 모여있는 창가로 달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창민이 밝게 웃는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병원으로 진입하는 도로 위일 것이다.
아래에서 위를 향해 휘적휘적 흔들리는 빛줄기가 보였다. 허공에 원을 그리듯이 움직이는 빛줄기는 지상을 향해 직접 비추는 게 아니다 보니, 눈이 어두운 좀비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손전등?’
준성은 누군가가 손전등을 들고 신호를 보내듯이 허공을 휘젓고 있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인한병원 7층은 일부러 불빛을 환하게 켜뒀다. 밤이 되더라도 채이 일행이 멀리서 이곳의 빛을 확인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오빠는 여기 있으니까, 빨리 오라고.
생존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7층의 불빛은 다행히 저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여태 창밖을 주시하고 있던 지안은 창가에 붙은 준성에게 그녀가 들고 있던 쌍안경을 건네주었다.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버스를 타고 있는 것 같아요.”
준성은 쌍안경을 들고 불빛이 보이는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불빛을 흔드는 사람의 상체 정도만 보였는데, 허리 아래로는 일직선으로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안이 ‘버스’라고 말해 준 덕분에 상대가 차량의 천장을 열고 상체만 내밀어서 손전등을 흔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손전등을 흔들고 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던 준성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멀고 어두워서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상대가 단발머리의 여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준성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확신하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남기혁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꿈속에서 채이가 장대욱과 만나서 이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려했던 게 무색하게도, 어렴풋한 채이의 모습은 충분히 무사해 보였다.
그새 흥분으로 가빠진 숨을 고르며 준성이 지안에게 물었다.
“헤드라이트는 방금 끈 거야? 그 불빛만으로도 좀비들이 몰려들었을 텐데.”
“아뇨, 저기 나타날 때까지도 아무 불을 안 켜고 있어서 처음엔 못 알아봤어요. 도로에 뭔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길래 집중해서 보니까 버스지 뭐예요.”
준성은 의아한 얼굴로 쌍안경을 내렸다.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 전처럼 주변 건물들이나 상가 간판들이 밤에도 빛을 내주고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건 고사하고 먹구름에 가려서 달빛조차 없는 상태였다.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아무 불빛도 없이 어둠 속을 움직이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파악해 보면 될 일이다.
지금은 채이와 저 버스의 일행들과 만나는 게 더 급했다.
준성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빠르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쪽에는 헤드라이트 없이도 앞을 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미리 진입로로 쓰기로 한 입구 대신 지하주차장 쪽으로 진입시켜서…….”
콰앙-!
준성의 말을 끊어내듯, 갑자기 어디선가 강한 폭음이 들렸다. 그도 모자라 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악!”
“뭐, 뭐야?!”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리거나 웅크린 일행들은 천장에서 돌가루가 먼지와 함께 후두둑 떨어지는 걸 보며 기겁했다. 진동 때문에 휴게실의 의자와 테이블이 쓰러지고, 간호사실 쪽에서는 서류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달려 나와서 몸으로 준성을 내리누르듯이 감싸고 있던 한서는 바닥과 천장이 부르르 떠는 듯한 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뭔가가 터지는 굉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진인가 싶었던 건물의 진동도 점차 사그라졌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창민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 확인하고 올게.”
“오빠, 어디 가려고요?”
겁먹은 얼굴의 지안이 창민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그녀가 더 겁먹을까 봐 되도록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어쩔 수 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폭탄이 있었던 것 같아.”
“예?!”
머리를 감싼 채 웅크려 있던 남섭이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 역시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 그럴 리가…. 내가 아까도 드론 날릴 위치 확인할 때 가봤는데, 폭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어.”
“폭탄을 다 보이는 곳에 설치하는 바보는 없으니까요.”
사색이 된 경오에게 대꾸한 건 한서의 품에서 빠져나온 준성이었다. 먼지도 거의 뒤집어쓰지 않은 준성은 자신을 감싸 준 한서의 상태를 살피며 그의 옷에 묻은 돌가루를 가볍게 털어 주었다.
“제가 올라가 볼게요. 다른 사람들은 혹시 모를 폭발에 대비하고 계세요.”
“아니, 다들 남아 있어. 폭탄이라면 많이 봐 왔으니까 내가 확인하고 올게.”
테러 진압이 주 임무였던 창민은 해외에서 특히나 다양한 폭탄을 봐 왔었다. 구성품만 봐도 어느 정도의 폭발력이 있는지 대충이나마 알아볼 수 있다 보니, 이럴 때 당연히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창민이 형과 저, 둘이서 올라갔다 올게요. 나머지는 여기 계세요.”
갑작스러운 폭발 때문에 아직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일행들을 두재에게 맡기고서 급히 손전등을 챙겼다.
비상계단 입구로 향한 두 사람이 문을 열고 계단에 발을 디디는데, 어째 등 뒤에 한 명의 기척이 더 느껴졌다.
“넌 왜 따라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 도한서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그가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었다. 눈빛에는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거 아냐?’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준성은 고집스러운 태세로 따라붙은 한서와 실랑이를 벌일 틈도 없어서 그냥 무시한 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만약 한서가 폭발에 휘말릴 것 같으면 몸으로라도 어떻게든 막아 봐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비가 그친 옥상에 올라선 준성은 곧바로 폭발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파열되어 깨진 물탱크의 잔해와 그 주변 바닥의 균열을 본 준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저런 곳에 폭탄을 숨겨 두고 갔었나?’
남기혁 무리가 병원에 왔다 간 걸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경계할 만했다. 병원 내부와 옥상을 살피며 수상한 점은 없는지 알아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는데, 이제 보니 물탱크 벽면에 폭탄을 붙여 두고 갔었나 보다.
하지만 폭탄의 위력은 물탱크를 부수고 바닥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는 되었지만 그게 다였다. 이 정도로는 아까와 같은 진동 정도는 줄 수 있어도 7층 자체에 큰 영향이 가진 않을 텐데.
“준성아….”
의아해하는 준성의 귀에 창민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말을 건넨 창민은 준성을 바라보지도 않고 한 곳을 손전등으로 비춘 채, 그대로 딱딱히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