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쓰러진 준성은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금세 눈을 떴다. 몰려든 일행들이 저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아…, 미안해요. 괜찮으니까 다들 걱정 마세요.”
어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은 준성이 일행들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한서의 품에 쓰러졌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준성도 자신의 몸이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이틀간 뜬눈으로 버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신이 들자마자 뒷머리가 곤두설 것 같은 긴장감과 피로감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럼에도 아직은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강채이, 너 대체 언제 오는 건데…….’
초토화된 대피소에서 한서가 찾아낸 채이의 쪽지를 굳게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이동한 시간이나 방향을 생각해 봤을 때 또 하나의 안전 루트인 장대욱 일행과 합류했을 게 뻔했다.
채이에게는 대피소에서 일주일을 버티라는 말과 함께 그날 찾아올 두재를 따라가면 병원에 도착할 거라는 말도 전했다. 즉, 일주일째에 자신이 인한병원에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긴 것과 같았다.
그러니 채이라면 자신이 있을 거라 믿는 7일째인 오늘, 바로 이곳에 왔어야 했다. 그보다 훨씬 일찍 병원에 왔더라면 자신을 기다린다고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을 거고, 만약 그럴 때 남기혁이 찾아왔다면 사람이 반항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했다.
준성이 보기에, 채이와 그녀의 일행은 아직 이 병원에 도착한 적이 없었다.
한서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준성은 초조한 눈으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11시 50분이 되고 있었다.
‘10분….’
10분이 지나면 8일째가 된다.
준성의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그에 맞춰 온몸이 삐걱거리는 듯한 피로감과 지독한 긴장이 그의 정신력을 잔뜩 흩트려 놓았다.
준성은 초조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자정 무렵에 비가 그쳤던 것처럼, 지금도 창밖의 빗발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줄어들어 가는 빗발이 마치 폭탄의 초읽기처럼 느껴졌다.
제대로 된 빛도 없는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준성에게 지안이 다가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제가 잘 보고 있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쉬어요.”
“나도, 저기, 비가 그치면 드론이라도 띄워서 찾아볼게. 쉬고 있어.”
빗발이 약해진 걸 보고서 경오 또한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에도 준성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들 동생 얼굴도 모르잖아요.”
“이 거리에선 얼굴을 알든 모르든 다 똑같아. 고집 피우지 말고 쉬고 있어.”
준성의 말에 언제나 동의해 주며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창민조차도 이번만큼은 강하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블랙 아웃 현상이 준성의 몸 상태를 대변해 줬기에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사람 같은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알려 줄게.”
“하지만…….”
창민은 여전히 물러나려 하지 않는 준성의 양어깨를 붙잡아,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게 했다.
“우리도 네 동료야. 이럴 때 좀 믿어 주면 안 될까?”
준성은 씁쓸한 얼굴로 말하는 창민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얌전히 바라보고 있던 한서가 그제야 움직였다.
“가자.”
한서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준성의 팔을 꽉 붙잡고서 그들이 쓰던 병실로 향했다.
“잠깐만, 아직 나는……!”
“또 들쳐메기 전에 얌전히 굴어.”
전날에 한서가 자신을 들쳐메고 병실에 들어갔던 걸 떠올린 준성이 말을 삼켰다. 창민도 그렇고 한서도 꼭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이 강하게 말하니 그 기백에 조금 머뭇거리게 된다.
병실로 끌려간 준성은 밖에 있을 때보다 더욱 강하게 차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속까지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는데,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읍, 뭐야?”
시야가 흔들려서 눈살을 찌푸리던 준성은 자신을 안아 들고서 침대에 털썩 걸터앉는 한서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눕혀 봐야 잠도 못 자잖아. 잘 생각도 없을 거고.”
“그거랑 이 포즈가 무슨 상관인데?”
준성은 한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그의 무릎 위에 옆으로 앉혀진 포즈를 지적했다. 대답하지 않고 준성을 제게 옆으로 눕게끔 하다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허리를 붙잡아 돌렸다. 준성의 가벼운 몸이 단번에 마주 안는 자세로 바뀌었다.
“음, 이게 더 낫네.”
“그러니까 뭐가?”
준성을 마주 안은 채로 그의 등허리와 엉덩이 쪽에 팔을 둘러 바짝 당긴 한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게 더 따뜻할 거야.”
한서에게서 벗어나려고 그의 어깨를 붙잡던 준성이 멈칫했다.
맞닿은 몸을 타고 한서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만큼 준성의 몸은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싸늘히 식어 있는 상태였다.
“넌 몸이 따뜻해야 냉정해지더라고.”
한서의 손이 준성의 등을 자상하게 쓸었다.
“착하지. 긴장 풀고 가만히 있어.”
“내가 어린애냐?”
“지금은 어린애나 마찬가지야. 이러다 쓰러지면 강채이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
한서는 준성의 테두리 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인 강채이를 직접 언급하며 그녀의 걱정을 핑곗거리로 들었다. 준성에게는 동료들보다도 강채이의 걱정이 더 신경 쓰일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준성의 테두리 안에 자리 잡은 강채이의 면적이 얼마나 큰지 직접 체감하게 되니 영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긴장 때문에 뻣뻣해져 있던 준성의 몸이 조금씩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서는 준성이 긴장을 풀기 시작한 게 동생을 끔찍이 아끼니까 그녀의 걱정마저도 마음에 걸려 한 덕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쓸데없이 안고 난리야….’
준성은 자신을 토닥이며 마주 안고 있는 한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닿은 곳마다 따뜻해서 긴장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한서의 판단은 정확했다.
싸늘하게 굳어 있던 몸이 녹기 시작하면서 점차 머릿속이 생각하기 좋게 말랑해져 갔다. 쌓여 있는 피로 때문인지 금세 나른해져서는, 삐죽삐죽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서서히 나아졌다.
이런 기분 좋은 맛에 연인들이 그토록 포옹을 자주 하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채이…, 오겠지?”
“당연하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즉답한 한서가 자신에게 기댄 준성의 목에 입을 맞췄다.
“네가 그렇게 판단했으면 당연히 올 거야.”
“나라고 다 맞는 건 아니야. 이런 상황은 꿈속에서도 예측 못 한 일이고.”
“안 맞으면 내가 맞게 만들어 줄게.”
준성이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네가 어떻게?”
“잊었어? 난 ‘너의 변수’잖아.”
한서는 준성의 서늘한 목에 연달아 간지러운 키스를 내렸다. 맞닿지 않았던 목에 금세 온기가 돌았다.
“변수는 또 다른 공식을 만드는 방법이기도 해. 네가 정한 답까지 가는 길쯤, 새로운 공식으로 도달하게 만들면 되잖아.”
한서가 말할 때마다 그의 입술에 닿은 목덜미가 간질간질해서 어깨를 떨던 준성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게 가능하면 네가 신이게?”
“글쎄. 진짜 신일지도 모르지.”
“나보다 너부터 쉬어야겠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까.”
한서의 실없는 말에 준성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좀 더 긴장이 풀려 버렸다.
‘채이는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어느 정도 몸과 정신을 추스르고 긴장을 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채이에 대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일 아침까지 채이가 오지 않으면 팀을 나눠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가능한 대욱이네 일행이 이동할 동선을 예측해 보고, 조금 위험하더라도 그 길을 따라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한서의 말에 준성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입구 방향을 바라보는 채로 앉아 있던 한서와 달리 그와 마주 안고 있던 준성의 눈에 보이는 건 창밖의 비가 그친 밤하늘이었다.
병실 문에 달린 창문을 통해 방문자의 상태를 이미 확인했던 한서는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을 보며 아쉬운 내색을 했다.
“준성아! 빨리 나와 봐!”
문을 열고 들이닥친 건 임유슬이었다. 손남섭도 그랬지만 임유슬 역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동료들과는 편하게 말을 놓기로 한 상태였다.
유슬은 한서의 다리 위에 올라타서 그와 마주 안고 있던 준성의 모습을 보고는 일순 멈칫했다. 남자끼리 왜 저런 자세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샘솟았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준성이 다급히 내려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하는 얼굴로 바라보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슬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병원으로 접근하는 생존자들을 발견했어!”
준성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켰다.
[11:59 PM]
역시 강채이는 자신이 한 약속만큼은 참 잘 지키는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