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얼마 후, 휴게실에 일행 전원이 모였다.
“죄송합니다!”
맨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이마를 박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여 보인 남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저는, 정말 저는 제 폰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진정하세요.”
눈가까지 붉게 변해서는 눈 둘 곳도 못 찾고 시선을 방황하던 남자는 준성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휴대폰에서 발견된 건 맞지만, 스파이라고 단정 지었다는 소린 아니에요.”
“정말이죠? 저, 진짜 결백해요! 진짜!”
자신에게 다가온 준성의 두 팔을 아플 정도로 꽉 붙잡은 채 절실하게 외치는 남자의 얼굴엔 스파이 혐의에 대한 억울함이 가득했다.
준성의 팔에 매달린 남자를 보고 눈가를 꿈틀한 한서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아 떼어 냈다. 손을 통째로 으스러뜨릴 것 같은 강한 힘에 짧게 비명을 지른 남자가 뒤이어 살벌한 눈빛에 잔뜩 주눅이 들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의 뒤에서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지듯 말했다.
“왜 스파이가 아니야? 저 남자 휴대폰에서 도청기가 나왔다며?”
여자의 일그러진 미간이 선명한 불쾌감을 내보였다.
“시청에서부터 같이 움직였는데 저 사람한테 도청기 심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다들 저 사람 휴대폰을 볼 새도 없이 금세 다 죽었다고! 그럼 처음부터 도청기를 갖고 있었다는 소리 아니야?!”
“맞아요. 하지만 그걸 ‘본인이 도청기를 직접 심었다’라곤 볼 수 없죠.”
“뭘 근거로?!”
여자는 이미 남자를 혐오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일주일간의 동료애조차 모두 사라진 듯했다.
여자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 역시 준성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도한서 혼자만 아무렴 상관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스파이가 아닐 거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여럿 있어요.”
준성이 남자의 휴대폰에서 빼냈던 검은 도청기를 들어 보였다. 정확히는 케이스만 같을 뿐, 안에는 납작하고 작은 돌이 들어 있었다. 캔에 자갈을 넣고 만든 폭탄 속에서 딱 알맞은 사이즈를 꺼내어 넣어 둔 것이었다.
준성이 도청기를 가볍게 흔들자, 안에서 달각거리는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첫째로, 정말 스파이가 맞다면 이게 도청기라는 것도 한눈에 알아봤겠죠. 아군이 뻔히 귀 기울여 듣고 있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소리 나도록 흔들어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사람들을 한데 모았을 때 이게 도청기라는 것과 안의 내용물을 돌로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눈앞의 여자도 화가 난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휴대폰을 돌려주면서 남자에게 물었을 땐 도청기에 대해 한마디도 밝히지 않았었다.
“저 사람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근거가 있어요.”
준성은 여자를 포함한 일행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하나 근거를 늘어놓았다.
휴대폰을 찾아 줬을 때 남자는 곧바로 휴대폰 화면을 켜서 잘 작동되는지만을 확인했다. 휴대폰에 직접 도청기를 심었다면 당연히 그 자리를 가장 먼저 확인했을 텐데.
휴대폰에 담긴 사적인 사진도 근거 중 하나로 꼽혔다.
도청기를 갖고 염탐을 위해 들어간 곳에서 자신의 부인과 아들 사진까지 메인 화면에 떡하니 걸어 둘 리도 없거니와, 잠금도 걸어 두지 않은 허술한 휴대폰 속에는 가족들 사진과 영상이 가득했다.
2년 반쯤 전부터 찍어온 가족들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단기간에 흉내 낼 수 없는 생활감 짙은 잔 기스들.
오로지 도청을 위해 휴대폰을 준비했던 거라면 그토록 본인의 사적인 부분이 다 드러나는 걸 쓰진 않았을 것이다. 눈속임용으로 일부러 썼다고 보기엔 그 흔한 잠금장치도 없었고, 들켰다간 제 가족들에게 원한의 불똥이 튈 수 있는데 굳이 그러한 사진들을 전부 보관해 둘 필요도 없다.
그러느니 아무 정보도 없는 새 휴대폰을 쓰고 ‘며칠 전에 새로 바꿨다’라는 아주 평범한 이유를 대는 게 백번 나았다.
또한, 남자의 성격이 절대 스파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청기처럼 절대 발견되면 안 되는 물건이 있다면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는 게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뒀는지조차 까먹을 정도였고, 오래된 덜렁거림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한 잔 기스와 깨진 자국도 휴대폰에 여실히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스파이라면 저렇게 불필요하게 덜렁거릴 리도 없고, 덜렁거려서도 안 된다.
준성은 이하의 근거를 토대로 남자의 스파이 혐의를 풀어주었다. 남자는 진심 어린 눈물을 보이며 고맙다고 머리를 숙였고, 여자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다른 말을 더 얹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렇게까지 해서 도청기를 심은 이유가 대체 뭐야? 일주일간 뭘 들으려고?”
준성은 두재에게 말했던 것처럼 도청기를 굳이 심어야 했던 남기혁의 의도를 들려주었다. 대피소의 위치 파악 및 생존자 제거, 그리고 대피소 대부분이 사라진 적당한 때에 두재 일행을 없애기 위해.
경악하는 여자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새벽에 그들을 습격한 자들이 도청기를 심은 일당들이라는 것에 특히나 놀라는 듯했다.
“그럼 도청기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일주일간 정이 많이 쌓였던 탓에 남자의 결백이 증명되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던 두재가 물었다. 준성은 그 답을 위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좀비 사태가 터지기 전에 탈의실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진 못했나요? 아니면 며칠 전에 신입 청소부가 들어왔다든지.”
“어? 그걸 어떻게…….”
남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열흘 전에 젊은 신입이 한 명 들어왔어요.”
“남자였죠?”
“맞아요!”
“탈의실 로커에는 아마도 열쇠가 없을 거고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탈의실에는 CCTV가 있어서 딱히 로커를 잠그고 다니진 않거든요. 열쇠나 비밀번호 관리도 번거로워서 그냥 빈 로커 아무 데나 쓰곤 해요. 어…, 근데 그걸 대체……. 아니, 이제 좀 무서운데…….”
남자가 몸서리를 쳤다. 준성이 내놓는 말마다 다 보고 있던 것처럼 정확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청기를 설치한 범인은 사건이 터지기 사흘 전에 청소부로 취직한 남자 신입이에요. 탈의실의 상태와 사건 당일에 근무하는 청소부를 물색했고, 때마침 덜렁대지만 휴대폰에 애정이 많은 사람을 찾아냈겠죠. 어차피 좀비들이 들이닥치면 CCTV가 있든 없든 상관도 없으니, 당일에 미리 준비해 둔 도청기를 심었을 테고요.”
준성이 술술 풀어내는 말을 듣던 남자가 이젠 경이로워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말대로면 스파이 쪽에서는 지금처럼 좀비들이 생겨날 걸 미리 알았다는 거잖아요? 그게 가능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기혁이라면 가능한 얘기였다.
남기혁은 꿈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여러 준비를 해 두었다.
꿈속에서 남기혁은 만날 때마다 혼자였다. 그에게 악독한 아군들이 생기기 시작한 건 좀비 사태가 터진 이후의 일이었고, 총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지금의 남기혁 일당은 총이 있을 뿐만 아니라 헬기와 도청기, 심지어 생존자들을 상대로 장기 적출을 하기 위한 밑준비까지 해 둘 만큼 일찌감치 움직였다. 좀비 사태가 일어날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남자와 여자에게 구구절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남자의 스파이 혐의는 벗겨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는 준성이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자 쪽은 남기혁 본인 혹은 그의 부하들이 관여하여 억지로 두재와의 만남 루트를 만든 덕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두재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좀비 무리를 돌파하다가 시청 청소부 전용의 남자 탈의실에 숨어들었고, 그곳 창문을 통해 일행들과 함께 밖으로 탈출했었다. 남기혁은 꿈속에서 이미 두재와 만났던 적이 있으니, 이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만했다.
그러니 남자는 남기혁이라는 변수에 의해 두재의 일행이 된 것이고, 이를 위해 그의 휴대폰에 도청기를 심은 거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대피소의 위치를 파악해서 생존자의 씨를 말리고, 나아가 이 병원에서 쓸 만한 대화를 잡아내기 위해서.
꿈속에서 본 적 없던 남자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그렇게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 쪽은 어떨까.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충분히 알아내지 않는 한, 절대 신뢰할 순 없었다.
그때,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준성 대신 남자에게 던지듯 말했다.
“뻔한 거 아니야?”
여자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그 씨발 새끼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린 거겠지.”
험한 말을 내뱉은 그녀가 준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보스라는 놈 이름이 혹시 남기혁이야?”
준성은 남자와 여자에게 ‘남기혁’이라는 이름을 아직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그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 보였다.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자, 여자가 살의를 담은 허탈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놈 패거리들인 줄 알았으면 죽기 살기로 붙잡아서 족쳐 봤어야 했는데…….”
여자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용감이 꽤 있긴 했지만,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해 훨씬 관리가 잘 된 깨끗한 외관이었다.
화면에는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내용이 가득했다. 준성은 그중에서도 의아한 반응의 여자 쪽 메시지보다 상대방의 말에 주목했다.
[오늘 좀비 바이러스가 터질 거야]
[누나는 내가 알려 준 대로만 도망치면 돼]
[곽두재라는 사람하고 꼭 붙어 다니다가 6일째에 내가 알려 준 곳에 숨어 있어]
[그렇게만 하면 누난 안전해]
1일째 이른 아침에 도착한 메시지들은 이러했는데, 이때는 아직 좀비 바이러스가 터지기 이전이었다. 이후, 통신이 끊기기 직전에 보낸 것으로 보이는 메시지들이 보였다.
[들켰어]
[기혁이 형이 날 죽일 거야]
[무서워]
[살려줘 누나]
메시지를 읽고 고개를 들자, 그새 여자의 눈시울이 분노로 붉어져 있다.
“내 동생은 그 남기혁이라는 놈 밑에서 일하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