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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14)화 (114/240)

- 114화 -

“무슨 일입니까?!”

낯익은 비명에 로비로 급히 달려들어 소리치던 두재는 곧바로 긴장을 풀어 버렸다.

비명은 휴게실로 만들어 둔 병실 안에서 난 것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휴게실 안에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은 이들이 보였다.

“어, 어어, 죄송해요! 어떡하죠….”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서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자신을 향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오에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저야말로 놀래서 큰 소리를 내 버렸네요, 하하….”

뒷머리를 긁적이는 남자의 팔을 경오가 다급히 붙잡았다.

“오래 두면 큰일이니까 제가 빨게요! 어, 어감이 좀 이상한데, 그래, 세탁을 해 드릴게요!”

“괜찮은데…….”

“빨리요! 찝찝하실 테니까 그동안 샤워라도 하고 계시면 되겠네요. 이쪽이에요!”

보아하니 경오가 남자의 셔츠에 실수를 한 것 같았다. 급한 식사를 끝낸 남녀를 위해 간호사실 비품실에 비치되어 있던 캔커피를 하나씩 줬는데, 그만 남자의 캔을 손으로 쳐 그의 셔츠에 커피를 쏟아 버리고 만 것이다. 흙이 좀 묻고 더러워졌어도 기본적으로 하얀 셔츠이다 보니, 짙은 커피 자국이 선명히 남아 버렸다.

분주히 움직이는 경오에게 질질 끌려가는 남자를 뒤로한 채 휴게실로 들어선 두재는 어느새 친해진 것처럼 대화 중인 지안과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경오와 남자의 사건은 그다지 관심도 없는 듯했다.

“진짜요? 전 두 분이 애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야. 저 사람과는 시청에서 처음 만났는걸. 들어 보니까 이미 부인에 애까지 있고, 뭣보다 저런 둔해 빠진 남자를 누가…….”

어느새 말까지 놓은 여자가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난 내 동생이랑 영원히 솔로로 살기로 했어. 우리 둘 다 연애엔 1mm도 관심이 없거든.”

“동생분도요?”

여자가 캔커피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나중에 목돈 모아서 물 좋은 리조트에 몇 년 짱박혀 있는 게 나랑 내 동생 소원이야.”

“와아-! 어디로 가시게요? 제주도?”

“가려면 해외로 가야지. 몰디브나 괌으로!”

“저도! 저도 데려가요, 언니!”

눈을 반짝이며 살갑게 달라붙는 지안을 향해 여자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고 쾌활한 여고생의 애교를 마주하게 된 여자는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얼굴로 지안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들을 자상하게 바라보고 있던 창민이 뒤늦게 두재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은 벌써 많이 친해졌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지안 학생이 참 친화력이 좋네요.”

치료를 받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친자매처럼 친해진 두 사람을 보다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팔 상태는 어떠세요?”

창민이 두재의 팔을 보며 물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 달리 새하얀 붕대가 깔끔히 감겨 있긴 했지만, 그래도 워낙 큰 상처인지라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두재는 창민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잘린 왼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여전히 아프긴 해도 멀쩡합니다. 한서 씨가 의사 못지않게 처리를 잘해 줘서…….”

한서를 칭찬하며 뒤를 돌아보던 두재는 어느새 그가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준성이한테 갔을 거예요.”

한서라면 휴게실에 준성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서 곧바로 그를 찾아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한 창민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말 충견이라니까요.”

“하하, 그렇네요.”

너무 충성스러워서 광적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볼을 긁적이며 웃는 두재에게 창민이 휴게실 밖으로 나가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간호사실에 진통제가 있는 걸 봤거든요.”

두재로서는 꼭 필요한 약이었기에 순순히 창민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간호사실에 발을 들였을 때.

“곽두재 씨, 잘 들으세요.”

목소리를 낮춘 창민이 간호사실 데스크를 둘러보는 척하며 말했다.

“함께 온 두 사람 중에 스파이가 있을지도 몰라요.”

눈가를 꿈틀하긴 했지만 겉으로 티가 나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한 두재가 힐끗 휴게실을 바라보았다. 안에서는 여전히 지안과 여자가 즐겁게 대화 중이었고, 남자가 입었던 젖은 셔츠를 들고 허겁지겁 튀어나온 경오는 근처를 두리번거리며 옷을 말릴 위치를 찾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자세한 건 준성이한테 들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일단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서 저도 눈여겨보는 중이에요.”

간호사실 데스크에 미리 비품실의 진통제를 꺼내뒀던 창민은 그것을 집어 두재에게 건네주었다.

“진통제는 이게 전부니까 잘 갖고 계세요. 준성이도 아까 많이 걱정하던데, 기왕이면 가서 상태 좀 보여 주세요.”

일부러 목소리를 약간 키워서 말한 창민이 두재에게 몰래 눈짓했다. 두재는 호흡을 맞추듯이 마주 웃어주며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뒤이어 휴게실을 지나 준성과 아까 대화했던 병실로 향했다.

“경오 씨, 죄송한데 옷 좀…….”

“아앗-! 죄송해요! 그, 이게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가는 길에 샤워실 입구에서 젖은 머리만을 불쑥 내민 남자와 깨끗한 남성용 간호사복 상의를 들고 달려가는 경오가 보였다. 어째 비슷한 느낌의 두 사람이다.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두재는 준성이 있을 병실 앞에 섰다.

‘스파이? 누구의?’

그의 일행인 남자와 여자는 시청에서부터 함께 했던 자들이었다. 대부분 두재가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이었지만, 협력해야 할 때는 둘 다 빼지 않고 응해 주기도 했다. 여기까지 올 때도 생각보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이 스파이라니?

누구의? 뭘 위해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당연하게도 남기혁이었다.

‘설마.’

남기혁이 준성을 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자신이 그에게 합류할 거라는 것도 알고, 그걸 제지하려는 것처럼 남기혁이 직접 새벽에 습격했을 거라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새벽에 남기혁 일당이 습격했을 때 그 스파이도 자신에게 무기를 겨눴어야 맞다. 새벽에 괴한들과 대치했을 때 남녀도 각각 야전삽과 목재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었고, 상대와 싸우다가 무기가 다 박살이 날 정도로 열심히 싸워 주었다.

두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서 수상한 점을 짚어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에 속했다.

준성이 분명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두재가 노크를 위해 손을 들었다.

똑똑, 가볍게 노크하고서 문을 열었다.

“준성…….”

준성을 부르며 안에 들어서던 두재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준성은 병실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아까 사라졌던 도한서가 있었다. 그는 잠든 것처럼 보이는 준성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어 놓고 허리를 팔로 감아 안은 채였다. 한서가 때마침 준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찰나, 두재가 타이밍 좋게 들어왔던 것이다.

한서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은 두재가 입을 다문 게 무색하게도, 준성은 금세 눈을 떠 버렸다.

“음…, 오셨어요?”

제대로 푹 자지도 못하고 짧은 선잠이 들었던 준성이 피곤한 듯 눈가를 비볐다. 그 모습을 방금과 전혀 다른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한서를 보며 두재가 몰래 혀를 찼다.

과도하게 밀착해있는 한서를 손으로 밀어내며 한층 또렷해진 눈으로 두재를 올려다본 준성이 입을 열었다.

“창민이 형한테 얘기는 들으셨나요?”

“예, 대충은 들었습니다.”

문을 닫자마자 얼굴을 굳힌 두재가 눈가를 찌푸렸다.

“정말 스파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50% 정도는 그렇게 생각해요.”

“50%라면… 아닐 수도 있는 거군요?”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려다가 잘린 팔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얼굴만 더 찌푸리게 된 두재가 나름 그들을 변호했다.

“남기혁 쪽에서 심은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거라면 아마 아닐 겁니다. 새벽에도 그 일당들과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에요. 무엇보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 시청에서 우연히 합류했던 사람들입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겠죠.”

단호히 말한 준성이 말을 이었다.

“한서가 그러는데, 두 사람 다 손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물집이 있던 걸 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뭔가를 들고 휘둘렀을 거라더군요.”

“맞아요. 무기를 들고 같이 괴한들과 싸워 줬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두재 아저씨와 다르게 둘 다 큰 상처가 없던데요.”

“그야 무기가 박살이 난 시점에 제가 뒤로 빠져 있으라고 했으니…….”

준성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다수의 괴한이었잖아요? 들어 보니까 남기혁과 거의 1 대 1로 사투를 벌이셨는데, 다른 괴한들은 왜 그걸 얌전히 보고만 있었을까요? 무기도 없는 저 사람들을 잡아다가 인질로 삼아 버리면 금방 정리될 텐데.”

“그건…….”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괴한들은 왜 두 사람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기만 박살 내고서 가만히 있었을까? 그렇게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두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준성이 의심의 근거를 하나 더 보탰다.

“저 사람들은 제가 수없이 겪었던 꿈속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사람들이에요. 이런 눈에 띄는 변화는 항시 ‘변수’인 남기혁과 연관이 있었죠.”

준성의 지난 이야기와 그의 꿈에 관해 들었던 두재로서는 그가 제시한 근거를 쉽사리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멀쩡히 살아서 이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준성의 꿈 덕분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남기혁 본인이 부하들을 이끌고 습격까지 했는데 저 사람들은 보란 듯이 살려 뒀어요. 그것도 큰 상처 하나 없이.”

50%라고 했지만, 준성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차갑고 예리한 준성과 시선을 마주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본 준성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제 말이 맞았나 봐요.”

병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상대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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