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준성은 제 손을 기어코 한서의 손아귀에서 빼내며 두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남기혁이 이곳 인한병원 7층에 두고 간 휴대폰이었다.
휴대폰의 갤러리 폴더 속에 들어 있는 유일한 영상을 가리키며 준성이 말했다.
“아저씨의 팔을 자른 남자가 이 영상 속 사람인지 확인해 주세요.”
두재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을 재생했다. 이윽고 영상을 확인하는 두재의 낯빛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놈이 맞습니다. 안경은 안 썼지만 분명 같은 놈이에요.”
이를 꽉 깨문 두재의 말을 들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준성이 ‘역시’라는 말을 흘렸다. 그러는 동안 두재는 영상 외의 다른 사람들 사진을 확인하며 더욱 분노하는 중이다.
“아저씨를 습격한 그놈은 ‘남기혁’이에요.”
“남기혁?”
준성이 잠시 숨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제 꿈속에서 사람들을 죽였다던 미친 살인마 새끼요.”
두재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준성은 자신의 꿈에 관해 풀어놓을 때, 남기혁을 ‘미친 살인마’라고 칭하며 그에 관한 내용 일부 또한 말해 주었다. 반복된 꿈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을 정도로 믿고 의지하던 자였으나, 실체는 동료였던 자들조차 자신의 ‘재미’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무자비한 살인마였다는 걸.
두재는 자신이 그 미친 살인마 남기혁을 실제로 만났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와 싸웠던 때를 떠올리며 납득해 버렸다.
“그래서 그렇게 칼 휘두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거로군요. 사람을 베고 죽이는 것도…….”
잘린 팔을 휘감은 피 먹은 붕대를 쓰다듬던 두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에 그런 자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암담하게 느껴졌다.
남기혁을 떠올리는 두재를 바라보며, 준성 역시 머릿속에 그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안경?’
두재의 팔을 자른 괴한의 인상착의나 말투, 거침없이 단검을 휘두르는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상대는 더 고려해 볼 것도 없이 남기혁이다. 두재가 남기혁이 제대로 나온 영상까지 직접 보면서 확인해 주기도 했다. 안경을 안 썼지만 분명 같은 놈이라고.
하지만 남기혁은 꿈에서 ‘안경’을 쓴 적이 없었다.
혈액원의 CCTV에 비친 그의 모습도 그랬고 지하철 대피소에서 촬영한 저 휴대폰 속 영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왜 두재와 싸울 땐 안경을 써야만 했을까.
‘갑자기 왜?’
두재가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었던 건 남기혁이 안경을 쓰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준성이 보기에, 남기혁은 안경의 렌즈가 깨져서 눈에 박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던 것 같았다. 한쪽 팔이 잘렸다고는 해도 두재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생각으로 한껏 폭주하던 중이었다. 그런 사람과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태로 계속 맞붙었다가는 남기혁 역시 치명상을 당할 수 있었다.
안경은 남에게 훤히 드러낸 ‘약점’과 같았고, ‘눈’은 싸움에서 아주 중요했다.
안경 렌즈의 위치와 부서졌을 때의 파편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맞았을 때 능히 실명에 이르게 할 수 있고,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눈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그걸 남기혁이 몰랐을 리 없었다.
‘멋으로 쓴 건 아닐 테고……. 시력이 나빠졌나?’
그건 또 이상했다. 꿈속에서의 남기혁은 안경과 전혀 연결점이 없을 정도로 시력이 좋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좌우 시력 1.0인 자신보다 더 먼 거리의 간판도 맨눈으로 척척 읽어 낼 정도였다.
크나큰 변수들이 있긴 해도 꿈속에서 겪은 나날이 오늘날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꿈속에서처럼 현재의 남기혁이 가진 시력 또한 그대로여야 할 텐데, 이렇게 갑자기 안경을 써야 할 정도로 나빠졌다는 게 확실히 이상했다.
문득, 남기혁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흠칫 놀란 준성이 얼른 머릿속을 지워 냈다.
‘그 새끼가 안경을 쓰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은 인간의 그런 자잘한 변화 따위, 굳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남기혁이 왜 대피소마다 찾아가서 생존자들을 전부 죽여 왔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도 그놈에게서 안전하다고 볼 순 없어요.”
준성은 두재에게 남기혁이 헬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포함해 현 상황에 대해 전했다. 그가 일부러 지하철 대피소까지 찾아가 동생을 납치하려 했었고, 일부러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그런 잔인한 영상과 사진까지 굳이 이 병원에 두고 갔다는 것도 말했다.
동생 강채이의 행방 예측에 관한 것까지 말하고 나자, 진지하게 듣던 두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준성 씨가 예상한 대로 오늘 동생분과 그 친구분 일행이 여기로 오겠군요.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뭐든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저씨 팔부터 치료를 좀 해야겠는데요.”
준성의 걱정 어린 말에 두재가 자신의 잘린 팔을 내려다보았다.
새벽에 몇 번을 갈다가 이곳으로 향할 때 다시금 두껍게 감아 뒀던 붕대가 지금은 하얀 부분을 찾을 수도 없을 만큼 새빨개져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응급처치는 했습니다만 이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두재가 난감한 얼굴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혹시 일행 중에 의사나 간호사이신 분이 있습니까?”
“아뇨….”
준성이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게임 속에서 아군을 치료하는 힐러가 귀하고 중요한 것처럼, 이런 재난 속 현실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일행 중에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옆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간단한 처치 정도라면 내가 해 줄게요.”
말을 꺼낸 사람은 도한서였다. 이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무감정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두재의 잘린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서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이야?”
“응. 완전히 치료하는 건 어려워도 며칠간 큰 문제 생기지 않도록 봐주는 건 가능해. 마침 아래층에 꽤 많은 약품도 남아 있고.”
“하지만 아저씨 상처는 단순한 생채기 같은 게 아니잖아.”
살갗이 찢기고 쓸리거나 얻어맞은 것도 아닌, 무려 ‘잘린 팔’이다. 잘려 나간 단면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 있을 텐데, 그런 부위를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조치한단 말인가.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눈앞이 깜깜할 텐데.
우려한 것과 달리, 한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도 알아.”
한서가 몸을 숙여, 준성의 귓가에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사람의 절단된 신체 같은 건 질리도록 봐 왔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싱싱하게’ 둘 수 있는지도 알아.”
싱긋 웃는 한서의 얼굴을 마주한 준성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한서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제게 축약해서 말해 준 그의 과거 속에 얼마나 많은 잔인한 날들이 숨어 있었는지 차마 낱낱이 물어볼 수가 없었다.
준성의 생각대로, 한서의 기억 속에는 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끔찍한 장면들이 있었다.
살인마만큼이나 잔인하던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살아있는 사람이든, 시체가 되어 버린 사람이든, 전부 단순한 연구재료로만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일반인이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팔에 바이러스를 넣고서 곧바로 그 부위를 잘라냈을 때 감염되는지 안 되는지 몇 차례에 걸쳐 확인해 본 적도 있다. 완전히 감염된 상태에서 머리 이외의 급소를 포함한 몸의 일부를 잘라도 움직이는지 아닌지 체크하는 건, 좀비로 변한 실험체 누구나가 머리를 꿰뚫리기 전까지 무조건 겪는 일이었다.
특히나 살아 있는 인간 상태라면, 최대한 그들을 오래 살려 두기 위해서 잘린 부분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서 며칠 뒤에 또 같은 짓을 반복하기도 했다.
한서의 양부모는 그의 도파민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시점부터 이런 실험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대동하려 들었다. 인간의 고통과 피, 죽어 가는 모습 등이 한서의 도파민에 영향을 주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절대 좋은 일이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겠지만, 한서는 그때의 기억을 토대로 곽두재의 잘린 팔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두재가 조심스레 묻자, 한서가 먼저 병실 문으로 향하며 대꾸했다.
“부모님이 의학 관련 연구원이에요. 대충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좀… 끔찍할 텐데요.”
자기가 자기 입으로 제 팔을 끔찍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에 절은 붕대 속에 감춰진 팔은 확실히 일반인이 두 눈 뜨고 보기엔 상당히 충격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서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빨리 따라오라는 듯이 시선을 주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르는 두재의 얼굴은 여전히 난감해 보였다.
한서와 두재가 자리를 떠난 후.
다른 일행들에게 돌아가자며 자리를 뜨려던 창민을 준성이 붙잡아 세웠다.
“형, 부탁이 하나 있어요.”
창민은 뭐냐고 묻지도 않고 얌전히 준성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두재 아저씨와 같이 온 두 사람, 눈여겨봐 주세요.”
“왜?”
두재에 비해 그다지 존재감 없던 생존자 남녀를 떠올리던 창민에게 준성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사람들, 제 꿈속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창민이 두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