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준성의 이야기는 상당히 길 예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꿈에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현실에서 그들이 겪어온 것들까지 나열해야 했다. 말이 쉽게 끊기지 않을 거라 예상하는 게 당연했다.
그 전에, 얼핏 봐도 피로감이 상당해 보이는 두재 일행을 계속 세워두기엔 너무 가혹한 것 같아, 경오와 지안이 병실 하나를 아예 휴게실처럼 만들었다. 두 개의 침대를 한쪽에 밀어 넣어 붙여넣고는 간호사실의 테이블을 가져다가 그 주변에 의자들을 배치했다.
난리통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새 일행들을 위해 테이블에 얼마 남지 않은 칼로리 바와 물을 놔주자, 두재에 비해 그나마 멀쩡한 몰골이던 남녀가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목을 축였다.
준성은 한창 먹을 것에 취해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은 여기서 쉬고 계세요. 지안아, 먹을 것 좀 더 가져다줘.”
“네.”
“경오 아저씨는 이분들이 쉴 방을 정리해주세요.”
“으응, 그럴게.”
지안과 경오에게 두재 일행 두 명을 맡긴 준성은 다른 이들과 함께 휴게실을 나섰다. 두재도 분명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를 텐데 그보다는 이야기가 먼저라는 것처럼 자꾸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휴게실을 나서려던 찰나, 입에 칼로리 바를 밀어 넣기 바쁘던 두 명 중 남자 쪽이 화들짝 놀라며 준성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크흠! 저희도 얘기 듣고 싶은데요!”
급하게 먹는 바람에 목에 조각이 걸려서 헛기침한 남자가 얼른 일어났다. 그가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어깨를 급히 두드리자, 그녀 역시 물을 마시다 말고 다급히 움직인다.
“드시고 계세요. 어차피 다들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 이따가 다 드시면 또 얘기해드릴게요.”
“아…, 그렇다면야…….”
안도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은 아직 덜 찬 배를 마저 채우기 위해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휴게실을 나와, 조금 떨어진 병실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에는 두재를 포함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준성이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와 두재, 한서와 창민이 병실에 완전히 발을 들인 후였다.
준성은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창민 일행에게 그랬던 것처럼, 두재에게도 자신이 두 달간 겪었던 꿈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안에서 일행들을 이미 만났던 적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두 달간의 반복된 꿈속에서 드디어 해결책을 찾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시작된 ‘현실’의 악몽.
꿈속에서 체험한 회차들의 간략화된 나열을 지나, 이제 현실에서 겪어온 것들을 말하기 시작한 준성은 힐끗 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에 관한 주요 내용이 쏙 빠진 일주일의 축약본을 들으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도한서에 관한 정보는 ‘동생의 학교 선배’라는 것과 그녀를 구하러 갔을 때 일행이 되었다는 정도만 공개했다. 그 외의 내용은 창민이나 경오, 지안조차 모르니 당연히 두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한서에 관해선 나만 알아야 해.’
곽두재는 서창민만큼이나 정의롭고 올곧으며, 경호원답게 남을 몸 바쳐 지키는 것에 사명감까지 갖고 있다. 그 증거로, 그는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을 찾아 인한시의 모든 대피소를 확인해왔다. 꿈에서도, 지금 이 현실에서도.
그런 그가 살아있는 백신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안다면, 한국의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연히 도한서를 어떻게든 정부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서창민 역시 그에게 동조할 수도 있다.
그러니 도한서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생존자1’ 혹은 ‘동료1’에 불과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준성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던 이야기의 흐름이 어느덧 오늘인 7일째에 다다랐을 때.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재가 창백한 낯으로 입을 뗐다.
“그 말이 다… 사실이란 겁니까?”
“예, 사실이에요.”
두재의 물음에 답한 건 창민이었다.
“실제로 준성이의 꿈속 기억 덕분에 저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예요. 이후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으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기엔, 준성이 말해준 꿈속의 일들이 너무나 세세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준성 일행 앞에 서 있을 수 있던 것도 그가 꿈속의 기억을 가진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생존자들이 있는 걸 봤어도 이 병원 안으로 진입하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
게다가 그는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두재가 일주일간 인한시의 모든 대피소를 돌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재 딴에는 대피소에 들를 순서를 그때그때의 상황판단 하에 정해왔는데, 준성은 그 모든 걸 하늘 위에서 낱낱이 내려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짚어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살면서 예지몽이라는 걸 믿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판타지 소설 속의 마법사라도 마주한 것처럼 눈을 빛내는 두재에게 준성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런데 현실의 아저씨 쪽에서 일어난 일은 제가 겪었던 꿈속의 패턴과는 상당히 달라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 예상대로라면 이곳에 다다랐어야 할 인원이 지금의 8배는 되죠.”
그 말은 두재의 마음을 상당히 무겁게 만들었다.
준성이 정말 예지몽을 꾸던 자이고, 그가 꿈속에서 곽두재라는 인물과 함께 합류할 일행들까지 모두 봐온 게 맞다면…….
‘마치… 내가 구하지 못한 것 같아.’
지나쳐온 대피소의 시체들과는 아무런 일면식도 없었다. 대피소에 도착했을 땐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이미 싸늘히 죽어있던 자들이니, 그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거운 건, 준성이 봐왔던 7일째의 자신이 언제나 많은 생존자를 구해서 도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할 새도 없이 죽어버린 생존자들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간밤의 괴한 무리가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자신의 팔을 잘라버린 무서운 청년이.
-아하하하하-!
지금도 떠오른다.
위험천만한 칼부림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던 그의 맑은 목소리가.
‘아니, ‘미친 사람처럼’이 아니야. 그냥 미쳤어, 그놈은.’
한쪽 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돌아갈 때까지도 섬뜩한 미소를 잃지 않던 남자의 모습이 두재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간밤의 일을 떠올리던 두재는 곧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천천히 말해주었다.
수많은 대피소와 시체들을 지나온 두재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를 듣고 있던 준성 일행은 각기 다른 표정 변화를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같은 사람끼리……!”
대피소의 참상을 머릿속에 그려가던 창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피소에서 관리하던 물품을 생존을 위해 탈취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면 그나마 조금, 아주 티끌만큼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만했다. 그래도 무자비한 살인마들임에는 변함없지만.
하지만 몇몇 대피소에는 구호 물품이나 식량이 충분할 정도로 남아있었다. 얼핏 보기에 아예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것들일 텐데.
덕분에 두재 일행이 6일째인 전날까지 그 식량들로 버틸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좀비들이 지금도 이토록 많은데 그 안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굳이 찾아내어 죽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 무슨 득이 있다고?
창민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 때문에 붉게 변한 낯빛을 억누르기 힘든 창민과 달리 준성은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있지 않고 서 있었다면 간간이 비틀거렸을 것이다.
‘남기혁….’
대피소를 습격하고 두재의 팔을 베어낸 자가 역시나 남기혁이라는 걸 알게 되자, 물밀 듯한 혼란이 찾아왔다. 그의 결정적인 의문은 창민의 것과 같았지만, 그로부터 오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오한이 들어서 어깨가 떨렸다. 차가운 숨결과도 같은 스산한 냉기는 이윽고 어깨를 지나 훤히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마치 남기혁의 손아귀가 점점 제 목을 졸라 오는 것만 같다.
무의식중에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싼 준성은 어느새 제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냉기가 덮인 준성의 목을 핏기 없는 손이 느릿하게 조른다.
그때, 준성의 차가운 손에 온기가 닿았다.
“괜찮아.”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서가 준성의 목에 감긴 손을 떼어내, 자신의 손아귀에 가두었다. 평소에는 준성보다 체온이 낮은 터라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을 텐데도 지금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 따뜻했다.
준성은 고개를 돌려 한서를 바라보았다. 입가의 미소와 상반될 정도로 잘 웃지 않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다. 안심하라는 듯이.
“괜찮아.”
다독이듯이 한 번 더 속삭인 한서가 준성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안에 갇혀버린 준성의 손이 빠르게 온기를 되찾아간다.
준성은 자신의 불안한 감정과 창백한 안색이 점점 되돌아오는 걸 느꼈다.
‘얘 손이 이렇게 따뜻했던가?’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태평한 생각을 해버릴 정도로 안정감을 얻어버린 준성은 뒤늦게 두재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얼른 손을 잡아 빼려는데, 도한서가 눈치도 없이 꽉 쥐고는 아주 당당히 놔주질 않았다.
“미안합니다. 너무 빤히 봤네요.”
두재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원래 사랑은 위기에서 싹트는 법이니까요. 이해합니다.”
“아니, 이해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정색하는 준성을 바라보며 두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있던 창민까지 그를 따라 고개를 갸웃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