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두재 일행이 응급의료센터 안에 있는 비상계단으로 진입한 걸 확인한 준성은 그제야 입가에 가까이 대고 있던 무전기를 내렸다.
‘됐어.’
준성은 두재 일행을 무사히 구했다는 것에 안도하며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자신이 일일이 보기 힘든 다른 위치의 좀비들 상황을 미리 꼼꼼히 확인해주던 지안과 지시대로 정확히 드론을 움직여준 경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은 저마다 활짝 웃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음으로 창민에게 먼저 다가갔다.
“형, 수고했어요.”
“수고랄 것도 없었어. 그냥 말해준 대로 던진 게 다인걸.”
창민이 자신이 섰던 창가를 바라보며 머쓱한 듯 말했다. 그가 서 있던 창가에는 여전히 가로로 배치된 노란 고무줄이 있었고, 그 근처에 있던 여러 개의 캔은 이제 네 개만 남아있었다.
창민은 남아있던 캔 중 심지가 연결된 것을 들어서 가볍게 흔들었다. 안에서 묵직하게 잘그락거리는 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어디에 쓰려나 했는데, 여기서 쓰려고 했던 거구나?”
“대머리 아저씨 일행을 모두 살려서 들여보낼 땐 이게 가장 성공률이 높았거든요.”
두재 일행이 일찍이 준성의 예측대로였다면 이렇게 캔이 남을 게 아니라 오히려 빠듯해서 몇 개를 좀 더 충원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발사 타이밍까지 전부 계산해서 지시하려고 했던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두재 일행의 수가 너무 적었다.
준성은 창민이 들고 있는 심지 달린 캔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준비해두길 잘했지.’
준성의 시선이 닿은 캔을 들고 있던 창민 역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종이 심지를 따라 캔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안엔 다양한 크기의 자갈과 스틱 폭죽에서 긁어낸 화약이 들어있었다.
자갈은 컨테이너 사무실이 있던 공사장에서 얼마든지 주울 수 있었다. 경오의 펜치를 빌려서 캔 입구를 반쯤 들어내고 자갈들을 채울 생각이었으나, 안에서 부싯돌의 원리로 돌끼리 서로 부딪쳐야 했다. 그래서 되도록 두께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녀석들로만 선별해서 개수를 많이 넣었다.
불을 붙이면 불꽃을 일으키며 화약을 따라 타들어 가는 회색의 스틱 폭죽, 흔히 ‘스파클라’라고 부르는 물건은 준성이 그의 집 근처 편의점에서 있는 대로 긁어 담아 왔었다. 다양한 폭죽도 있었다면 당연히 챙겼겠지만, 아쉽게도 편의점에서 파는 화약 담은 폭죽이라 봤자 그 정도가 전부였다.
공사장에 있던 자갈들과 스파클라의 화약을 긁어내어 담아둔 캔의 입구는 테이프를 써서 꼼꼼히 봉쇄했다. 길게 뻗어 나온 심지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서 그게 안으로 거의 다 타들어 갔을 때쯤 준성이 지시했던 위치에 맞춰 던지면 되는 게 창민과 한서의 역할이었다.
다만, 오차 범위를 줄이기 위해 간이 발사대를 사용했다. 석궁을 닮은 거대한 쇠뇌처럼, 창가에 배치한 두 쇠파이프와 연결된 고무줄에 캔의 아랫부분을 받쳐서 쭉 당겨 던졌다.
이 캔은 부싯돌, 그러니까 돌끼리 최대한 크게 부딪치게 해야 효력이 있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큰 충격이 가해져야 했고, 그래야만 큰 폭음과 함께 안에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캔 안에 들어간 화약의 양도 적었고 비 때문에 좀비들에게 불이 붙기도 쉽지 않으니, 노리는 건 오로지 ‘폭음’뿐이었다. 더불어 바람 부는 고층에서 그냥 손으로 던지는 것보다는 고무줄의 탄력을 이용한 가속도를 붙이는 편이 훨씬 오차가 적었다.
던졌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민은 자신이 어릴 때 낡은 문구점에서 가끔 사서 놀곤 했던 ‘콩알탄’과 같은 원리의 폭발하는 캔도 그랬지만, 상상치도 못했던 연막탄에 더욱 놀라 버렸다.
‘웬 탁구공인가 했더니…….’
컨테이너 사무실에 둥그렇게 앉아서 경오의 공구들로 이리저리 조각내던 노란 탁구공이 생각났다.
가위나 니퍼로도 충분히 자를 수 있었던 그 탁구공은 준성의 말에 의하면 연습용 공이라고 한다. 이 공의 재질인 ‘셀룰로이드’의 발화 문제 때문에 지금의 공식 탁구공은 플라스틱이라고.
괜히 발화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불이 잘 붙는 데다가 밀폐된 곳에 넣고 태우면 상당한 양의 연기를 발생시킨다. 마치 연막탄이라도 쓴 것처럼.
그 원리를 이용한 캔 연막탄은 이번에 충분히 활약해주어, 두재 일행이 무사히 병원에 진입하는 걸 도왔다.
창민은 새삼 준성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겉보기엔 어디 한 곳 툭 치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처럼 가냘파 보여도 그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대담하고 냉정하며 머리가 좋았다. 꿈을 통해 미리 봐온 게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구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그가 쥔 정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준성을 기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창민은 그에게 다가가는 키가 큰 검은 개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가만히 서 있으면 선뜻 다가가지 못할 정도의 강한 위압감과 차가운 눈을 가진 개인데, 제 주인만 곁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드는 순둥순둥한 강아지 같다.
물론, 순둥순둥한 이미지를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강준성 한 명에게만이다.
검은 개, 도한서는 창민과 대화 중이던 준성의 뒤로 다가가서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선 습관처럼 짓던 미소를 지운 얼굴로 차갑게 창민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네 주인님 안 뺏어가.’
저도 모르게 눈앞의 두 사람을 ‘주인님과 사냥개’의 관계로 인식해버린 창민이 피식 웃으며 다른 일행에게 걸어갔다.
멀어지는 창민의 등을 바라보며, 준성이 자신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검은 개에게 말했다.
“너도 수고했어.”
“응. 잘했으니까 칭찬해줘.”
“그래, 그래.”
한서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준성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준성의 손은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특히나 뭔가 큰일을 겪은 뒤에 안도하는 그의 손길은 유독 기분이 좋다.
하지만 지금의 준성은 손끝이 차가웠다. 아직 그는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
이유는 알만했다.
원래대로라면 곽두재 일행이 안전히 병원에 진입하는 것만으로 오늘의 큰일이 끝났겠지만, 그들만큼이나 중요한 사람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
“강채이도 무사히 돌아올 거야.”
한서가 흘린 말에 준성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한서가 ‘왜?’라고 되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새삼스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도한서가 ‘평범한 사람’처럼 위로하다니.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다지 영양가 없는 말로 들릴 텐데, 도한서가 말하니까 제대로 된 위로처럼 들렸다.
그건 도한서가 이런 위로 따위를 할 리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자체가 특별해서일까.
명확히 정의할 순 없어도 도한서의 위로가 제 역할을 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준성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싸늘하던 손끝에 조금씩 혈색이 도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한서의 팔을 꼭 붙잡았다.
“그래. 그래야지. …그럴 거야.”
곽두재처럼 강채이 역시 이곳에 올 것이라고 믿었다.
준성의 머릿속에 한서가 전해준 동생의 쪽지가 떠올랐다.
[혼낼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만약 대피소로 돌아왔는데 내가 없으면 그때 말했던 인한병원에서 만나.]
[나도 오빠 찾으면서 거기로 향할 거야.]
[만날 때까지 죽으면 용서 안 해, 오빠새끼야.]
제 동생은 본인이 먼저 내건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켰으니까, 곧 만날 수 있을 거다.
비상계단을 통해 일행과 함께 7층까지 올라온 두재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준성 일행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안도했다. 두재가 보기에 준성 일행은 도저히 간밤의 괴한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물부터 드시고 숨 좀 고르시죠.”
간호사실에 비치되어 있던 종이컵에 생수를 담아 나눠준 준성은 며칠간 물도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급히 들이켜는 두재 일행을 눈여겨보았다.
“푸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고서 소리 내어 숨을 토한 두재가 웃는 얼굴로 준성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지시하던 사람이 그쪽인 거 같은데, 맞습니까?”
“네,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다들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어요. 사실은 좀비가 너무 많아서 포기해야 하나 했거든요.”
말을 이어갈수록 두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혹시나 여기도 생존자가 모두 죽어버렸으면 어쩌나, 하고…….”
“안 그래도 묻고 싶었어요.”
준성이 어두워진 두재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로 여기까지 다다랐어야 할 생존자의 수는 여러분보다 훨씬 많았어요. 지하철 대피소에서 아무도 합류하지 못했다고 가정해도 24명은 되어야 했죠.”
준성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그의 시선은 두재의 잘린 왼팔에 닿아 있었다.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걸 대답하기 전에 여러분들 얘기부터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두재의 미간 역시 선명한 주름이 졌다.
“내 이름도 그렇고, 생존자들의 수나 지하철 대피소에 대해서도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말하는데…….”
“맞아요.”
“…농담합니까?”
“아뇨,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준성은 처음부터 모든 걸 밝힐 예정이었다. 눈앞의 곽두재는 꿈속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믿어주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애초에 이쪽이 먼저 패를 까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일단 제 이야기부터 시작할게요.”
‘이번에는 절대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준성은 두재에게 꿈과 현실에 관한 모든 걸 털어놓았던 회차를 떠올렸다.
그 회차에서는 남기혁과의 사투 끝에 처참히 죽어버렸던 사람이지만, 이번엔 절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