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결연함까지 느껴지는 청년의 말에 두재는 자신의 머릿속을 채운 의심을 거두기로 했다. 저런 목소리는 절대 그딴 살인마 무리가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답 대신 묵묵히 지시를 따르던 두재는 인이어를 타고 넘어온 멈추라는 지시에 곧바로 걸음을 세웠다. 두재 일행의 행동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청년이 침착하게 말했다.
-2시 방향을 보시면 약 100m쯤 되는 거리에 응급의료센터 입구가 보일 거예요.
화단에 몸을 숨긴 채로 머리만 살짝 내밀어서 확인해보니, 청년의 말대로 ‘응급의료센터’라는 글씨가 크게 박힌 입구가 보였다. 하지만 그 주변에는 배회 중인 좀비가 상당수 있는 상태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달릴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세요.
“이대로 달리면 좀비들 눈에 띌 겁니다.”
붉은 피막이 덮인 좀비들의 시야는 굉장히 좁고 얄팍했다. 하지만 그건 아예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일정 거리까지밖에 분간을 못 한다는 소리일 뿐이다. 입구까지 달리는 동안 그 주변에 있는 좀비들의 눈에 전혀 안 띄고 뛸 수도 없을뿐더러, 오래 쏟아진 비로 인해 바닥에선 찰박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릴 게 뻔했다.
덩치에 비해 몸놀림이 빠르고 임기응변도 뛰어난 두재라면 어떻게든 파고들 수 있겠지만, 훨씬 빈약한 육체를 가진 다른 두 일행은 어림도 없어 보였다.
-괜찮아요. 좀비들의 눈과 귀는 저희가 막아드릴게요.
7층에서 도대체 어떻게 막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아무 대책도 없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두재 일행의 길잡이 노릇을 하던 드론이 높이 상승했다. 드론은 세 명이 서 있는 7층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번엔 한 명만 서 있는 다른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저건……?’
밖으로 나온 드론의 배에는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아까와 같은 무전기나 쪽지 같은 게 아니었다.
‘캔?’
웬 음료 캔이 드론의 배에 2층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되돌아오듯 날아오는 드론의 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두재는 곧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음료가 들어있지 않은 캔의 입구 부분마다 작은 불덩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불덩이가 아니라 캔에서 튀어나온 심지가 타들어 가는 모습이었다. 두재가 자세를 잡은 정면에 드론이 다다랐을 즈음엔 불이 캔 안쪽으로 완전히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펑-!
분명하게 들리는 폭발음에 일행 모두가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좀비들이 있다 보니 벌떡 일어나거나 고개를 멀리까지 내밀진 못하지만, 화단 사이의 작은 틈새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펑! 퍼엉-!
크에에-!
조금 떨어진 좀비 무리의 머리에 드론의 배에 있던 것과 같은 캔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상당한 속도로 추락했는데, 단순히 높은 층에서 밖으로 캔을 던진 게 아니라 무슨 발사대라도 쓴 것 같은 무서운 빠르기였다.
떨어진 캔은 좀비들에게 맞거나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는데, 그 순간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크헥!
캬학-!
소리를 들은 좀비들은 폭발음이 들린 곳으로 무섭게 뛰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7층에서 발사한 캔들은 좀비들 머리에 하나둘 떨어져 내리며 폭발음을 발생시켰다. 얼핏 보건대 애당초 살상용 폭탄과 같은 무시무시한 양의 화약을 넣은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폭발음을 내는 데에만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뭘 어떻게 한 거지?’
폭탄처럼 폭발하는 캔이라니, 저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당황하는 사이, 인이어를 통해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호하면 바로 달리세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돌리던 두재는 지상으로부터 3m쯤 떠 있는 드론의 배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나오는 걸 확인했다. 하얗고 짙은 연기는 이내 놀랍게도 어마어마한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후우욱-
캔마다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연기는 웬만한 연막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뿜어져 나온 연기는 단숨에 두재 일행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수제 연막탄이 가동하는 동안,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발음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는 좀비들의 괴성이 들렸다. 그렇게 달려가는 좀비 중에는 응급의료센터 입구로 가는 길을 배회하던 이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두재 일행의 눈에는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연기만 가득해 보일 뿐이지만, 높은 층에 있는 저들은 아래쪽 상황이 훤히 보일 게 분명했다. 역시나 청년은 아래쪽을 눈으로 꼼꼼히 확인하고서 지시를 내렸다.
-셋까지 셀게요.
청년의 지시를 듣자마자 다른 남녀 일행에게 ‘셋을 세면 달려라’라는 말을 전했다. 긴장한 얼굴의 그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셋.
두재가 정면을 응시한 채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뒤에서 그 손가락을 주시하는 남녀 일행의 시선이 느껴졌다.
-둘.
드론의 배에 붙은 캔에서 점차 더 많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면 사람이 서서 뛰더라도 연기에 완벽히 가려질 것 같았다.
-하나.
두재 일행은 화단 높이 밖으로 머리가 튀어나가지 않을 만큼만 엉거주춤하게 선 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달려요!
청년의 지시에 맞춰 두재의 다리가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 뒤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남녀가 바짝 따라붙었고, 제대로 사물을 분간할 수 없는 연기 속에서 그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펑-!
캬아악-!
쿠헥!
폭발음에 이끌린 좀비들의 목소리가 세 사람에게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7층의 이들은 폭발음에 이끌려 모인 좀비들을 응급의료센터 입구 방향에서 조금씩 떨어뜨려 놓았다. 일반 캔이었다면 바람에 날려 방향이 크게 틀어질 수도 있었지만, 캔 안에는 부싯돌로 쓸법한 돌과 화약이 가득했고 충분한 가속도를 줄 장치까지 창가에 준비해 둔 상태였다. 캔의 추락 위치는 그들의 리더인 청년이 예상한 오차범위 이내였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청년은 연막탄 기능을 하는 캔까지 추락시켰다. 덕분에 폭발음을 듣고 몰린 좀비들은 갑자기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온 연기로 인해 안 그래도 좁던 시야를 완전히 차단당하고 말았다. 그런 그들이 연막에 완전히 둘러싸인 채로 달려나가는 두재 일행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로 앞이 입구에요. 열려 있으니까 그대로 뛰어들어가세요.
긴장감과 연막 속에서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달리던 두재는 상공에서 멈춘 드론의 연막 영역 밖을 뚫고 나갔다. 청년이 그대로 뛰어들어가라고 했으니만큼, 입구에는 좀비가 없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연막을 나서자,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입구를 배회하고 있는 좀비는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좀비들이 있긴 하나, 연이은 폭발음에만 정신이 팔려서는 이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바깥 방향의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태다.
인이어를 통해 이어진 목소리는 또다시 길 안내를 했다. 그는 응급의료센터에서 이어진 비상계단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비상계단까지는 다행히 길이 복잡하지도 않고 멀지도 않아서 금방 다다를 수 있었다.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문은 그들을 위해 미리 안배한 것인지 전혀 잠겨 있지 않았고,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통해 두재 일행 모두 안전히 계단을 밟았다.
안심이 된 탓에 비상계단에 진입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문을 쿵, 소리가 나도록 굳게 닫아버린 두재는 그제야 깊은숨을 토했다.
“후우….”
두 일행도 긴장이 풀렸는지 소리 내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벽에 등을 기댄 채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숨을 고르던 두재는 아까 했던 생각에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좀비가 없을 거라는 믿음에 건물 안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병원의 1층부터 4층까지는 이미 좀비로 가득하다는 걸 직접 봤음에도.
그만큼 청년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강인했고, 믿음직스러웠다.
-괜찮으세요? 다들 다친 곳은요?
진심 어린 걱정이 엿보이는 이런 목소리도 한층 신뢰를 더했다.
안심해버린 두재는 주저앉아 있던 남자 일행을 일으켜 세우며 청년에게 답했다.
“무사합니다. 올라가면 제대로 고마워할게요.”
청년과 그들 일행에 대한 의심을 거의 지워버린 두재가 겨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 난…….”
-알아요, 곽두재 아저씨.
밝히기도 전에 제 이름을 입에 담은 청년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뜬 두재는 곧바로 상대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전 강준성이에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청년은 자신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뒤이어 청년이 이상한 말을 건넸다.
-‘현실’에서도 잘 부탁해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