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쌍안경을 눈에 댄 준성은 지안이 확인한 곳이자,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경로의 초입을 바라보았다.
인한병원 외부 주차장을 둘러싼 높다란 화단 사이의 좁은 틈. 비에 젖은 높은 화단 옆에 몸을 푹 숙여 쭈그린 세 명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가장 앞에서 병원의 동태를 살피는 근육질의 대머리 중년 남자와 그 뒤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젊은 남녀.
준성은 그들을 보자마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단 세 명만 살아남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머리 남자의 상태가 문제였다.
왼쪽 팔의 절반이 사라졌다.
접히는 지점으로부터 기껏해야 5cm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고, 팔뚝 중간부터 시작해서 잘린 부분까지 칭칭 감아둔 붕대는 붉은 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왜?’
셋밖에 남지 않은 인원.
언제나 멀쩡한 모습이던 꿈속과 달리 왼팔을 잃어버린 남자.
꿈속과 전혀 다른 그들의 상황에 혼란이 밀려왔다.
그 혼란 끝에 떠오른 건, 이 자리에 없는 ‘또 다른 변수’의 얼굴이다. 그가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개새끼가…….’
이가 뿌득 갈렸다.
남기혁 그 인간은 대체 현실에서 뭘 하고 싶은 건지, 사사건건 문제만 일으키는 느낌이다. 제 계획이란 계획도 전부 건드려대고.
순간 준성이 흠칫했다.
‘내 계획을?’
남기혁의 움직임에 의문이 들었다.
‘아니, 계획도 계획이지만 어쩐지 ‘기본 전제’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동생 강채이의 안전.
주 아지트로 삼았던 인한병원에서 구조헬기를 탔어야 할 초기 생존자들.
발생지인 인한시가 빠르게 봉쇄되어 더 이상 넓게 퍼지지 않게 된 좀비 바이러스.
지금은 구멍뿐인 자료라는 걸 알지만, 꿈속에서는 믿어 의심치 않던 해결책의 존재.
그리고 마지막으로, 7일째까지 각 대피소를 돌며 생존자들을 구출해 올 든든한 아군인 대머리 중년 곽두재까지.
새로운 꿈이 시작될 때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계획을 짜던 준성이었는데, 정작 ‘현실’은 기본 전제부터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기본 전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망가뜨리려 한 건 변수 덩어리 남기혁이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그 인간은?’
생각도 하기 싫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게 너무나 화가 났다. 남기혁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진정하자.’
남기혁이 일부러 자신의 기본 전제들을 깨부수고 다니고 있다는 건 너무 앞서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자신의 루트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겹친 걸 수도 있다. 그렇다기엔 단시간에 너무 많은 문제가 생겨버렸지만.
준성은 깊은 생각에 빠지기보다, 일단은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은 아저씨부터 구하는 게 먼저야.’
상황이 어떻게 변했든, 지금 당장 급한 건 곽두재와 그 일행들을 인한병원 안까지 안전히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먼저 경오의 도움이 필요했다.
쌍안경에서 눈을 뗀 준성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오에게 부탁했다.
“드론, 준비됐어요?”
“응, 언제든 말만 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선 경오가 한 손에는 드론을, 다른 손에는 그걸 조종하기 위한 무선 리모컨을 들어 보였다. 드론의 배 부분에는 준성이 미리 써둔 쪽지와 무전기 하나가 붕대로 감겨 있다.
경오는 긴장한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준성의 지시에 따라 병원 밖으로 드론을 띄웠다. 좀비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드론을 어느 정도 높이 비행시키고는 있었지만 육안으로는 높낮이에 대한 감이 잘 잡히지 않을 수밖에 없어서, 지안이 쌍안경으로 주변 상태를 꼼꼼히 살피며 비행을 도왔다.
채 도착하기도 전에 두재는 그 좋은 시력으로 단박에 드론을 알아보았다. 병원의 활짝 열린 한쪽 창문에 옹기종기 모인 준성 일행 또한 눈치챘다.
드론이 두재 눈앞에 멈춰 설 수 있도록 세심히 지시하던 지안은 쌍안경을 통해 그들이 쪽지를 확인하고 무전기를 손에 쥐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막 쪽지 내용 확인했어요.”
“경오 아저씨는 2m쯤 고도를 높여주시고, 지안이는 저쪽에서 무전기에 인이어를 연결하면 다시 알려줘.”
경오와 지안에게 지시한 준성은 이번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한서와 창민에게 말했다.
“각자 정해준 자리에서 대기하면서 장치 한 번씩만 확인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한서와 창민이 비상계단과 가장 가까운 바깥 창가 두 개 앞에 각기 나뉘어 섰다. 그들이 선 창가에는 창문이 완전히 빠져 있었는데, 장치를 준비하기 위해 일부러 틀에서 빼둔 상태였다.
창가의 좌우 테두리에는 쇠파이프 두 개가 몇 겹의 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유일하게 테이프가 둘리지 않은 쇠파이프 중앙 부분에는 흔히 병원에서 지혈을 위해 쓰는 ‘토니켓’이라는 노란 고무줄 두 줄이 거의 겹칠 정도의 간격으로 팽팽히 묶여 있다.
한서와 창민이 아무런 창문도 없이 두 줄의 토니켓으로 허공의 반을 가르고 있는 창가 앞에서 각자 쇠파이프와 매듭의 접착을 확인하는 동안, 두재 쪽의 상태를 확인한 지안이 준성에게 알렸다.
“연결 확인했어요.”
“고마워.”
준성은 지안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이 두어 번 쓰다듬어 주며 동시에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몇 초 후, 무전기에서 알림음과 함께 두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립니까?
굵직한 음성 속에 담긴 긴장감은 이쪽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묵직하고 탁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준성이 남몰래 씁쓸함을 삼켰다. 아마도 이 음성과 긴장감은 무려 21명의 생존자와 본인의 팔 한쪽을 잃는 동안 그가 필연적으로 얻게 된 것일 터다.
“잘 들려요, 아저씨.”
-이쪽에 무전기와 인이어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설마 그쪽들도 살인마 패거리들인 겁니까?
살인마 패거리들.
준성은 두재에게 지난 이야기를 자세히 듣기도 전에 그들이 남기혁과 만났을 거라는 걸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남기혁과 한 패거리는 아니었지만, 준성은 현실에서 이번에 처음 만나는 곽두재가 이미 무전기와 그걸 이용하기 위한 인이어를 갖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해병대 출신의 곽두재는 10년 넘도록 경호업체에 몸을 담고 있는 베테랑 경호원이었다. 사건 당일에도 그는 경호 임무를 수행 중이었으며, 그 때문에 업무용으로 사용하고 있던 무전기와 인이어를 지금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그 무전기와 인이어로 연락하던 동료는 이미 이곳으로 오는 동안 모두 죽어버린 듯했지만.
두재가 무전기용 인이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뻔했다.
이동하는 길을 지시하려면 어쩔 수 없이 계속 통신을 해야 하는데, 사방에 가득 찬 좀비들 때문에 자칫 무전 자체가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인이어가 있다면 무전기의 알림음이나 목소리가 외부에 흘러나갈 리가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저흰 그런 놈들과 달리 선량한 생존자들이에요.”
남기혁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린 준성이 결백을 말하자, 두재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꿈속에서는 이렇게까지 딱딱하지 않았는데, 당해온 것이 있다 보니 경계심이 높아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준성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일행이 만났던 무리가 저희와 같은 무리라면 왜 굳이 살리려고 이렇게 무전기까지 줘가면서 연락하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곧 비가 또 쏟아질 텐데, 그전에 병원 안으로 진입하셔야 해요.”
-…….
갈등하는 듯, 두재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러다 곧 긴장을 더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도 보이지 않습니까? 좀비가 너무 많아요.
“알아요.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길로 안내할 테니, 드론을 잘 따라서 움직여주세요.”
-후우…, 알겠습니다.
그들로서는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라도 많았으면, 아니, 최소한 왼팔이라도 멀쩡하면 어떻게든 대응해서 돌파해볼 생각을 해봤을 텐데, 지금처럼 부상자를 포함한 단 세 명만으로는 불가능할 게 뻔했다.
-믿어보겠습니다.
다짐한 듯한 굵은 목소리와 함께 두재 일행이 움직였다. 그들은 천천히 움직이는 드론을 따라 좀비들의 눈을 피해 화단 테두리를 훑듯이 나아갔다. 화단 틈새로 좀비에게 발각될 것 같은 타이밍엔 쌍안경으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지안이 신호를 줬고, 경오가 그에 맞춰 드론을 멈추거나 방향을 바꿔줬다. 덕분에 약 5분가량 나아가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명의 좀비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준성이 한서와 창민에게 지시했다.
“슬슬 준비할게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서와 창민이 창가 아래에 나란히 세워둔 몇 개의 커피 캔을 집어 들었다. 음료 대신 다른 게 채워진 캔의 입구는 테이프로 꼼꼼히 막혀있었는데, 그 중앙쯤엔 바깥으로 길게 뻗어 나온 종이 심지가 있었다.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열심히 만들어둔 ‘아이템’을 이제야 쓸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