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 7일째
이른 새벽.
한서는 옆으로 누워 있던 그 상태 그대로 별다른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눈만 뜨고 있었다.
묵직한 정적 속, 펜이 종이 위를 춤추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렸다.
사각사각-
글씨를 쓰다가도 길게 미끄러지며 선을 그렸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선 빙글빙글, 펜촉으로 종이를 유린하는 듯한 굴리는 소리가 났다.
한서는 펜으로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준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두운 실내에 들어오는 빛을 그 혼자만이 품은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그밖에 안 보였다.
‘또 자기 머릿속이라도 그리고 있는 건가?’
일전에도 종이에 선을 직직 그어대다가 또 동그라미를 마구 그리던 이상한 낙서를 봤던 적이 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자신의 머릿속이라는 답이 돌아왔었다.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형상화한 낙서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이후 자신들이 움직여야 할 다양한 루트에 관한 테스트 노선이었다.
그러니 아마 저 낙서는 그가 자신의 머릿속에 펼쳐둔 지도의 다양한 이동 루트일 것이다.
저런 걸 굳이 이런 새벽에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저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준성은 자고 싶어도 잠들 수가 없는 듯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침대에 누운 준성은 도통 잠을 자지 못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나 싶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금 흠칫하며 눈을 떴다. 새벽빛이 들기 전에는 워낙 깜깜한 어둠 속이라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흐트러진 숨소리와 힘겹게 삼키는 신음으로 봐선 그 잠깐만에 악몽이라도 꿨던 것 같다.
두 번 연달아 그러기에, 한서가 자신의 개인 침대를 벗어나 준성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랬더니 소리를 듣고 알아챈 준성이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난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
그런 말 따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한서가 보기에 준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절대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고 이러다간 날이 새도록 그가 잠도 한숨 못 잘 게 뻔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한서는 잠자코 물러나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대신, 본인 또한 잠들지 않고 어둠 속에서 준성을 가만히 관찰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새벽빛이 들기 시작할 때까지도 준성은 몇 번의 잠을 청하다가 다시 깨고 뒤척이길 반복했다.
한서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한 번쯤은 도와달라고 할 법도 한데, 준성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홀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안 되겠는지, 육안으로 사물이 충분히 분간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엔 저렇게 종이를 꺼내 들고 열심히 펜을 움직이는 중이다.
준성이 저렇게나 잠들지 못하는 데에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는 해도 직접 확인하지 못했으니 걱정되는 거겠지.’
정황상 강채이는 준성의 친구라던 장대욱과 함께 있을 확률이 높았다.
듣자 하니 장대욱은 준성과 함께 e-스포츠 프로팀에서 활동할 당시, 주로 정찰과 트랩 설치를 도맡았다고 한다. 감도 좋고 상황판단과 예측도 뛰어난 편이라, 메인 오더인 준성을 다방면으로 서포트해왔던 듯했다.
단순히 친한 친구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믿을 만한 능력을 가진 자이니, 그와 함께 채이가 있다면 그리 큰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준성은 마음이 심란한 걸 어쩔 수가 없었나 보다. 눈을 붙이면 자꾸만 동생이 아른거리고 안 좋은 방향으로 펼쳐진 꿈을 보고선 깜짝깜짝 놀라서 깬다. 일말의 불안감이 쉴 새 없이 꿈속으로 기어들어 와서 그를 괴롭혔다.
준성에게 있어 꿈이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현실감이 지극한 좀비의 악몽을 수도 없이 꿔왔던 그는 아마도 꿈속에 동생이 나오자마자 굉장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꿈속에 나타난 동생의 길이 안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게 자신의 불안감에서 찾아온 일개 악몽인지, 아니면 이전에 꾸었던 ‘현실과 이어진 예지몽’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이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 건지도 모른다.
일찍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느슨했던 준성은 연이은 악몽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처럼 깨어있기로 한 듯했다. 잠들어버리면 어떤 게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런 것만은 천하의 도한서도 해결해줄 수가 없다.
현실과 이어진 꿈을 꿔왔던 건 강준성뿐이다.
기본적인 공감의 토대조차 없는 도한서로서는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남기혁인가 뭔가 하는 미친놈을 떠올리며 벌벌 떨거나 단순한 악몽의 여파로 괴로워하는 거라면 충분히 달래주고 재워줄 수 있었다. 그런 건 준성 본인부터가 괴로움을 잊고 싶어 하니까 다른 뭔가로 원하는 만큼 덮어주고 지워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준성에겐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예지몽을 꿔왔던 준성의 과거를 지워줄 수도 없고 동생을 잊으라 말할 수도 없다. 인간이 잠깐이나마 자의적인 사고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잠조차 지금의 준성에겐 오히려 독이 된다.
사각사각-
아무것도 할 수 없던 한서는 펜을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강준성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렇게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쁘네.’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게.
겉으로 드러내 보이진 않아도 준성은 지금 속으로 이성을 붙잡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어젯밤처럼 무턱대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머릿속이 객관적 사실과 그럴듯한 가설을 쉬지 않고 내보여주었기에 겨우 이 자리에 있는 셈이다. 덧붙이자면, 팀의 리더는 어느 순간에도 냉정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전날, 준성에게 으름장을 놓던 순간이 떠올랐다.
“만약 나 버리고 동생 찾으러 나갈 거라면 밖에 있는 저 새끼들 전부 죽여버릴 거야. 이젠 필요 없어졌으니까 버리려는 거잖아? 쓸모도 없는 놈들인데 네 꿈에 대한 정보까지 갖고 있으니 가만 놔둘 순 없지.”
이에 준성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협박하는 거야?”
“아니, 앙탈 부리는 거야.”
“그게 어디가 앙탈이야?”
“주인님이 얌전히 머리나 쓰다듬어 줬으면 해서 생떼 쓰는 거니까 앙탈이지.”
어이가 없는 말에 당장 반박하지 못하던 준성에게 한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난 네 개새끼야. 근데 버려지면 그건 그냥 주인 없는 들개지. 들개는 예쁨 못 받잖아.”
준성이 ‘이상한 논리야’라고 말하는 걸 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난 쭉 네 개새끼인 채로 예쁨받고 싶거든. 그러니까 주인님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자각했으면 해.”
준성은 한서의 괴상한 말에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으름장 대신 다른 말을 해줄 수도 있었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들었을 때 함께 나가보자고 말해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준성은 겨우 침착해졌다고는 해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확률 높은 가정은 아무리 그래도 가정일 뿐, 100%의 확신이 될 순 없다.
그러니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이동 루트를 되짚어 가보는 것도 확신을 위한 방법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위험지대를 되돌아가는 것이니만큼 도한서가 필수불가결했다. 그렇다고 둘만 나가는 걸 받아들여 줄 일행이 아니다. 한서와 밀착해있으면 좀비들이 접근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일행들은 어떻게든 갈 길을 막을 게 뻔했다.
어찌어찌 그들 눈을 피해서 몰래 나왔다고 해도 문제였다.
준성의 말에 따르면 새벽 넘게도 계속 많은 비가 내릴 것이고 이는 7일째까지 이어진다. 우산도 없이 폭우를 맞으며 대피소까지 되짚어가다간 절대 몸 상태가 멀쩡할 리 없다. 튼튼한 도한서는 그렇다 쳐도 1일째부터 신경을 곤두세워 왔던 준성은 피로와 겹쳐서 곧바로 앓아누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걸어서 오갈 걸 생각하면 이동에만도 시간이 워낙 많이 소요되기에 일행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사라진 걸 알아채면 창민 성격에 절대 얌전히 있지 않을 게 뻔했고, 결국은 창민 혼자든 일행 모두든 또다시 위험지대로 나와버릴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준성이 겨우 구축해둔 이 일행, 이 루트가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서는 앙탈을 가장한 협박으로 준성을 이 자리에 묶어두었다.
다행히 준성에겐 한서의 말이 꽤나 잘 먹혀들어 간 듯했다.
대신 그 탓으로 준성은 지금처럼 자신을 다스리려고 아등바등 중이다.
뜯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준성의 복잡한 머릿속이 바로 지금, 노트의 13번째 종이를 까맣게 만들어버렸다.
겹치고 또 겹쳐서 이젠 어느 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된 13번째 종이를 뜯어낸 준성은 곧바로 14번째 종이에 펜을 대었다.
점을 하나 찍고서 밑으로 쭉 그어 내려가려던 준성이 멈칫했다. 초점 없던 그의 눈동자가 약간의 빛을 머금은 채 한서를 향했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
그 말은 조금 맞지 않는다.
아예 자지도 않았으니까.
“오래됐어.”
“일어났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머쓱한 듯이 노트를 덮은 준성이 그것과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옆으로 조금 비켜서 공간을 만들더니, 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리와.”
준성의 명령에 한서가 자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의 부름에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움직이는 강아지의 본능처럼 준성의 침대로 향한 한서는 그가 원하던 대로 옆자리에 앉아주었다.
준성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한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키스해봐.”
절대 마다하지 못할 명령이라는 생각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한서의 입술이 준성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