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102)화 (102/240)

- 102화 -

뚝뚝.

건물에 진입한 남자들의 우비에서 미끄러진 물방울들이 점점이 흔적을 만들었다. 사방이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해서 인지 빗물로 만들어진 그들의 길은 얼핏 보기에 아무런 티도 나지 않는 듯했다.

가장 앞서 걷던 무리의 리더 격인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야간투시경을 쓴 그의 시야 너머에는 어둠뿐이던 건물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다른 상가들과 달리 대출 업무를 보던 사무실이었던 곳이라 그런지, 달랑 있는 입구용 문은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에서 흔히 쓰는 꽤 단단한 문으로 되어있었다. 심지어 그 옆에는 인터폰까지 있어, 벽면에 붙어 있는 대출 사무실 간판이 아니었더라면 주거용 오피스텔인 줄 알았을 정도다.

튼튼한 문과 인터폰이 있는 이유는 충분히 알만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단순한 대출 사무실이 아니었던 듯하다.

문을 노려보던 남자는 주변도 꼼꼼히 훑어보았다.

상가 복도의 가장 끝에 일부러 은밀하게 배치한 것 같은 이 사무실 근처에는 벽을 이룬 딱딱한 돌벽만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근처에 타인이 숨어있을 만한 공간은 없다.

‘몰아넣을 필요도 없는 환경이로군.’

인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그걸 일일이 잡아다가 몰아넣는 것도 일이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상가 건물 입구에는 코팅된 알림판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 내용이란, 좀비 사태가 터지기 전날부터 사흘간 상가 전체가 정기 휴무에 들어간다는 공지였다.

휴무 기간에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인지, 밖과 달리 이 건물 안에는 좀비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입구에서의 사투 흔적이 있긴 하지만 문 자체가 이중 문이기도 하고, 안에 있던 저들이 착실히 잠금장치도 해뒀기에 지능 없는 좀비들의 유입을 막는 건 어렵지 않았던 듯했다.

‘난리가 나지 않은 깨끗한 상태의 상가이니 쓸만한 게 많겠어. 가는 길에 여기저기 뒤져보는 것도 좋겠군.’

건물 안에는 자그마한 마트도 있었다. 슬슬 금단 증상이 올 것 같은 제게 꼭 필요한 필수품인 담배와 술이 그 안에 가득할 거라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급해졌다.

고작해야 여자애 하나 끌고 가는 게 목적이라서 참 재미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좋은 임무를 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리더 남자가 사무실의 문 앞에 일행을 끌고 선 순간.

인터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불이 처음부터 녹색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보고 있었나?’

보통은 빨간색 불빛으로, 인터폰을 통해 밖을 확인하거나 통화를 할 때는 녹색이 된다.

즉, 인터폰은 밖을 확인할 수 있게끔 아까부터 계속 켜져 있었다는 소리다.

남자 일행이 당황하던 찰나, 인터폰 특유의 울림을 가진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누가 보면 남자 일행이 웬 아파트에 찾아와서 태평히 벨이라도 누른 줄 알 것 같다.

그만큼 이 청년의 목소리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둘…. 다섯 명이나 되네요? 야간투시경을 쓴 거 보니까 평범한 생존자분들은 아닌 것 같고…….

살아남기 급급한 상태의 무지한 생존자들이 다섯 명 모두 야간투시경을 챙겨서 쓰고 다닐 리가 없다. 특히나 손에 들고 다니는 형태가 아니라 안경 쓰듯이 쓰는 야간투시경은 상당한 고가품이기도 하고 취급점도 드물었다.

당황하긴 했지만, 리더 남자는 까짓거 자신들이 수상해 보이면 뭐 어떤가 싶었다. 어차피 문을 열고 쳐들어가야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리더 남자가 거만하게 턱을 쳐들며 말했다.

“문 열어. 지금 열면 죽이진 않을게.”

물론 어디까지나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안에 들어가게 되면 맘에 안 드는 놈들은 가차 없이 목부터 따버릴 셈이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서운 소릴 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면 열어줄 것도 안 열어줘요.

리더 남자의 목소리가 워낙 걸걸하기도 하고 톤 자체도 낮아서 충분히 압박이 들어갔을 텐데, 어째 청년은 여전히 태평하다 못해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이에 리더 남자가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번 임무에서는 오직 나이프와 둔기만 쓸 생각이었지만, 협박할 때 이 총만큼 좋은 것도 없다. 일반적인 사람이 갖고 있을 수 없는 무기를 보여준다면 상대는 반드시 겁을 먹게 되어있다.

“장난치는 게 아니……!”

-오? 베레타 M9? 우와! 

이전까지와 달리 청년은 꽤 들뜬 목소리를 냈다. 보통 모르는 사람이 총을 들어 보이며 으름장을 놓기 시작하면 무서워하는 게 먼저일 텐데, 청년은 그저 총 자체에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실물 같네요! 다 큰 어른이 장난감 들고 다니는 건 좀 안쓰럽지만요.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에서 실제 총기를 보는 건 군인이 아니고서야 아주 드물었다. 가짜라고 생각하는 게 충분히 이해되긴 했지만, 남자는 그보다도 자신의 말이 잘린 게 더 짜증스러웠다.

리더 남자가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좀 더 목소리를 키웠다.

“이건 진짜야! 머리통을 쏴버리기 전에 당장 문을……!”

-아참참, 그래서 뭐 때문에 오셨다고요?

“우린……!”

-아! 혹시 어제쯤부터 몰래 미행하던 분 일행이세요? 그럼 좀 열어주기 싫은데……. 꺼림칙하게 미행이 뭐예요, 미행이.

“아니, 그러니까……!”

-정신없을 때라서 모르는 척했는데, 그때 도촬도 해갔죠? 찰칵하는 소리 다 들렸어요. 다 큰 어른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겁도 없이 도촬이라니……. 어휴, 정말 할 짓 없는 새끼들이네요.

연이어 말이 끊긴 데다가 ‘새끼’라는 단어까지 들어버리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리더 남자가 버럭 화를 내려 할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풍선 같은 게 터지는 소리에 움찔하던 남자의 야간투시경 너머로 웬 가루가 떨어졌다. 정확히는, 그들 다섯 사람 전원에게 쏟아져 내렸다.

“이게 뭐지?”

“퉤! 밀가루?”

허공에서 떨어지는 가루를 저도 모르게 맛봐버린 한 일행의 말을 듣자마자 리더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급히 야간투시경에 묻은 밀가루를 털어내며 복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주변은 그리도 꼼꼼히 살폈으면서 단 한 번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복도 천장.

그곳에는 무슨 파티라도 있었던 것처럼 빼곡하게 매달린 여러 개의 풍선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터져, 풍선 조각이 대롱거리고 있는 빈 곳이 보였다.

천장에 매달린 풍선 속에는 아마도 지금 그들에게 떨어져 내린 것과 같은 밀가루가 그득할 것이다. 다른 일행에겐 그게 아무 타격도 없는 단순한 밀가루 장난에 불과해 보이겠지만, 총기와 폭탄에 관심이 많았던 리더 남자에게는 덫 중의 덫에 걸린 거나 다름없었다.

분진 폭발.

밀가루와 같은 아주 미세한 가루가 공기 중에 퍼져 있을 때 그곳에 불꽃이나 열을 가하면 연쇄적으로 불이 붙으며 폭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만약 밀가루가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지금, 그들을 협박하기 위해 꺼내든 총을 그대로 발사했다간 남자 일행 모두가 폭발에 휘말리게 된다. 절대 무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총만 안 쓰면 될 일 아닌가.

‘밀가루는 좀비들이 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연막용인가?’

이곳을 찾는 이들이 총으로 위협할 거란 생각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 기껏해야 좀비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한 연막탄 같은 대체품이라 생각했다.

살기 위해 꽤나 머리를 썼다는 생각을 하며 품에 총을 집어넣은 남자가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때려 부숴.”

“예.”

리더 남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 중 두 명은 두껍고 견고한 쇠파이프를 무기로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문쯤, 어렵잖게 부숴 보이겠다는 자신감 어린 얼굴로 문 앞에 섰다.

그때, 삐빅-하는 무전기 소리와 함께 눈앞의 문 너머에 있을 청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저씨, 가둬버려요.

“응!”

갑작스러운 청년의 목소리와 누군가의 우렁찬 대답 소리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촤르륵-!

야간투시경에 비친 뒤쪽 복도 한가운데에는 어느새 지그재그 모양의 접이식 보안 철창이 펼쳐져 있다. 후다닥 달려가 보니, 여닫는 부분에 쇠사슬을 두 번 감아서 큰 자물쇠까지 끼워두었다.

불법적인 일도 겸하는 대부업체 사무실이었나 보다. 그런 거라면 경찰 혹은 적대 세력의 진입을 막아서 물건 혹은 자료를 폐기할 ‘시간 벌이용 철창’을 만들어두는 것도 이해가 갔다.

철창 너머에 보이는 건 겁먹은 얼굴의 왜소한 중년 남자 세 명으로, 한 대만 때려도 저 멀리 나가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거 안 열어?!”

“히익!”

기겁한 중년 남자들이 헐레벌떡 복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쳐버렸다. 아무래도 어둠을 틈타 다른 상가 건물에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리더 남자의 다른 일행이 쇠파이프를 쳐들고서 철창을 내려치려는데, 허공에서 한 번 더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밀가루들이 떨어져 내렸다. 터진 위치는 철창 바로 위라서 다섯 사람 모두 다 밀가루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지금 설치된 밀가루들이 설마 시시하게 연막용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인터폰을 통해 청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한 리더 남자가 아직 허공에 자욱한 밀가루들을 두 손으로 털어내며 다시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빼곡한 풍선 사이를 훑어보던 남자의 눈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버튼형 라이터가 보였다.

매달려 있는 라이터의 버튼 부분에는 동전이 얹어진 채로 와이어가 몸체를 세로로 가르듯이 감겨 있었다. 그렇게 감은 와이어는 길게 뻗어 나가, 청년과 그 일행이 숨어있는 문의 틈새로 이어져 있다.

조금 전, 밀가루가 든 수많은 풍선 중에서 리더 남자 일행의 바로 위에 있는 것만 터졌다. 그건 사무실 안에 있는 저 청년이 충분히 천장의 물건들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지정된 자리에 배치된 라이터를 켜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갑작스레 복도에 갇힌 것으로도 모자라 도리어 분진 폭발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당황하는 리더 남자의 귀에,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 파악하셨으면 제대로 물을게요.

청년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

-채이는 왜 찾아다니는 거예요?

이 사무실에 아지트를 둔 생존자 무리의 리더인 청년, 장대욱은 이곳을 찾은 불청객들의 목적이 제 절친의 여동생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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