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96)화 (96/240)

- 96화 -

강도라도 든 것처럼 난잡한 환경 한가운데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선물상자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의 작은 크기임에도 민트색이 상당히 선명해서, 인식하지 않고 두리번거린다고 해도 결국은 그 상자에 시선을 두게 될 것 같았다.

카운터로 다가가는 준성의 걸음이 어째 무거웠다.

저딴 센스없는 상자를 두고 간 자가 누구일지 알기에, 아예 손끝도 대고 싶지 않았다. 반면, 상대가 얼마나 간악한 자인지 알기 때문에 그가 뭘 두고 갔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걸 굳이 이런 곳까지 찾아와서 두고 갔을 리가 없으니까.

카운터 앞에 선 준성의 손이 선물상자를 향했다. 그 손목을 옆에서 한서가 덥석, 붙잡아 멈춰 세웠다.

“보지 마.”

그도 불길함을 느낀 걸까.

준성이 돌아본 한서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움이 없다.

한서의 기색이 이상해서 멈칫했지만, 준성은 다시금 선물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자신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선물상자를 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일행들이 있었기에 내용물은 결국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서의 손을 떼어낸 준성이 이내 선물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는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목걸이나 긴 브로치 같은 걸 넣어둘 정도로 가벼운 느낌의 액세서리 상자인데 말이다.

준성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상자의 뚜껑에 손을 대었다.

그 사람, 남기혁이 남긴 물건이라면 절대 정상적인 게 들어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친놈 중의 미친놈이니,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게 되는 ‘사람의 신체 일부’라든지, 죽은 동물이나 징그러운 곤충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걸 넣어두었을 수도…….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선물상자 안에는 아주 멀쩡한 게 들어있었다.

휴대폰.

핏자국은 고사하고 일말의 손때조차 없는 새것과 같은 휴대폰의 모습을 보자, 직전까지 있던 긴장의 끈이 반쯤 풀릴 것만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일행들도 그걸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웬 휴대폰?”

“누구 거지?”

고개를 갸웃하는 일행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물상자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상상했던 끔찍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기혁이 굳이 남기고 갔을 정도이니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거다.

‘통신을 위해서…는 아닐 텐데.’

통신이 완전히 끊겨 있는 상황이니, 이런 휴대폰으로 전화나 문자메시지 소통이 가능할 리 없었다. 된다고 해도 받아 줄 생각도 없고.

휴대폰의 전원을 켠 준성은 이 휴대폰이 애초에 개통조차 되지 않은 완전히 새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좀비 사태의 꿈을 꾸기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났을 무렵, 괴상한 꿈속 세상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다가 휴대폰을 잘못 밟는 바람에 새것을 사러 나갔어야만 했다. 그때 휴대폰을 둘러보면서 봤던 기본 배경화면이 지금 이 휴대폰의 것과 똑같았다. 더불어 개통해달라는 경고 표시 또한 일치했다.

‘휴대폰 매장이라도 털었나?’

남기혁이라면 아주 태연한 얼굴로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문제는 왜 굳이 그래야만 했는가.

개통도 안 된 새 휴대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어떠한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순간적으로 오싹해져서 어깨를 떨었다.

굳은 얼굴의 준성은 휴대폰의 메인 화면에 있는 ‘갤러리’를 클릭했다.

역시나 그 안에는 몇 장의 사진과 동영상 하나가 들어있었다. 긴장한 눈으로 사진의 작은 썸네일들을 노려보던 준성이 이윽고 첫 번째 사진을 클릭했다.

“악!”

숨을 삼킨 일행들 사이로 지안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사람 목에 칼이 박혀있는 사진을 보았으니,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충격에 빠질 만도 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목에 칼이 박힌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당긴 채 태연히 카메라를 겨눈 듯했다. 머리채를 잡힌 채 숨을 쉬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는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을 그의 피만큼 흥건히 흘리고 있었다.

아직 초점이 살아있는 눈.

좀비들의 것과 달리 투명하고 맑은 눈물.

허우적대던 것처럼 허공에 살짝 떠 있는 손.

사진 속 남자는 누가 보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이젠 살아있‘던’ 사람일 것이다.

“이, 이게 뭐예요?! 누가……, 누가 이런 짓을……!”

지안이 울먹이며 외쳤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다독이던 창민의 얼굴이 분노를 억누르듯 일그러졌다. 경오도 충격이 상당했는지, 거친 숨을 헐떡이다가 급히 흡입기를 꺼내어 제 입에 가져다 대었다.

준성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액정 위를 천천히 미끄러져 움직였다.

이어진 사진도 같은 남자였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반쯤 뜬 눈이 생기를 잃은 채 그의 피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죽기 직전의 순간과 죽은 직후의 사진을 연달아 찍어두다니, 엄청난 악취미다.

눈썹을 꿈틀한 것 말고는 얼굴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던 한서가 슬쩍 준성의 낯빛을 살폈다.

역시나, 준성의 하얀 얼굴 위에 떠 있는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그럴 만도 했다.

사진 속 남자는 좀비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준성이 구했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양지우.

앳된 얼굴의 대학생이자, 준성의 동생 강채이의 친구였다.

“하….”

얇게 흘러나온 준성의 숨소리가 위태롭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양지우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찍힌 이 사진 속 배경이 어디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준성으로서는 당장 쓰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세 번째 사진에는 양지우만큼이나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이소연.

그녀 역시 채이의 친구이자, 준성이 대피소에 두고 온 인물이었다.

소연은 안경을 쓴 채로 주먹에라도 맞았는지, 눈물진 눈가에 깨진 렌즈 조각이 더덕더덕 박혀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벽을 등진 채, 휴대폰을 든 자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이 손바닥을 앞으로 들어 보이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소연의 얼굴에 만연한 공포가 휴대폰을 통해 여실히 전해져 왔다.

네 번째 사진은 역시나 그녀의 죽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좀비들과 싸울 때 으레 하는 것처럼 깊이 꽂혀 버린 정수리의 군용 단검이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다.

다섯 번째 사진은 김철호였다.

두 다리의 발목 부분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을 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찍혀 있다.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철호의 눈동자가 꿈에 나올 것처럼 선명했다.

이어진 사진에선 어김없이 시체가 된 철호가 있었다. 심장 부분을 수없이 찔린 피투성이 몰골이 너무나 끔찍했다. 더 무서운 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듯한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이후로도 사진은 네 장이 더 있었다. 하지만 그 네 장의 사진들은 사람들의 사체로 가득한 대피소를 찍은 것일 뿐이다.

사진을 모두 확인한 준성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마지막 영상을 꾹 눌렀다.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봐야만 했다.

‘채이야….’

사진 속에는 동생이 없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대피소에 얌전히 있어야 했을 동생이.

‘너는, 괜찮은 거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대피소의 상태를 지금 두 눈으로 봐버렸고, 그곳 밖에는 좀비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아직 동생이 잘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어찌나 세게 누르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하얗게 변해버린 손가락을 떼자, 영상이 시작되었다.

-준성아.

대피소의 활짝 열린 문을 비추며 시작된 영상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성은 두 손을 들어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핏발이 서기 시작한 눈으로 영상을 노려보았다.

화면이 천천히 움직여, 길을 만들 듯이 길게 묻어있는 핏자국을 따라갔다.

천천히 드러나는 피투성이 모습의 대피소 내부.

하얗던 벽면과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가득하고, 사람들이 열심히 쳐뒀던 텐트는 전부 박살이 나 있다.

난장판이 된 대피소 내부를 훑듯이 보여주던 카메라는 이윽고 시체가 모여 있는 한가운데를 보여주었다.

시체가 된 대피소 사람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게 하여 옹기종기 앉혀둔 모습이다. 그들은 머리나 목, 심장처럼 즉사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피를 쏟아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

영상에서 해맑은 느낌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성은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영상을 주시했다.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문 채 시체들을 살폈다.

끔찍한 몰골 때문에 눈을 돌릴 법도 한데, 준성은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 안에 혹시라도 동생이 있진 않은지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걱정하지 마. 네 동생은 저 안에 없어.

준성의 생각을 잘 아는 것처럼 나긋하게 말한 남기혁이 화면을 돌려 그 본인을 비추었다. 피가 튄 얼굴로 밝게 웃고 있는 남기혁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예쁘고 멋지게 나오고 싶은 사람의 심리처럼 카메라를 위에서 아래로 향한 채, 고개를 45도 정도로 살짝 기울여 웃었다.

그 탓에 활짝 열린 문가 너머에 누군가가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어둡기도 하고 바깥쪽 문가 옆에 있는 탓에 보이는 거라고는 푹 숙인 머리뿐이었지만, 그 사람이 ‘여자’라는 것과 ‘단발머리’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크게 뜬 준성의 호흡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악마처럼 웃고 있는 남기혁이 쥔 피 묻은 단검이 문가에 있는 단발머리 여자를 겨누었다. 

-‘아직’ 죽이진 않았는데, 혹시 만나고 싶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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