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95)화 (95/240)

- 95화 -

인한병원까지 이동하는 데엔 비가 그친 1시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동이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분명 준성의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안전하면서도 좀비의 수가 적은 루트를 골라 이동하고 있었음에도 간간이 위험한 상황이 생겼다.

이는 필연적인 위험이었다기보다,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지안과 경오가 한발 늦게 움직인 탓이다. 특히나 지안은 단단히 착용하고 있던 팔 보호대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좀비에게 물려서 피를 쏟고 있었을 판이다.

“미안해요, 오빠.”

“나, 나도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지안을 따라 경오도 처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준성은 차마 그들에게 쓴소리를 할 수 없었다. 지금의 그들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하고 암담할지 알고 있었기에, 눈물을 적시며 패닉을 일으키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할 지경이다.

“괜찮아요. 하지만 여기서부턴 긴장해야 하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죠.”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인한병원의 응급의료센터 입구 앞, 구급차 전용의 외부 주차장.

나란히 주차된 두 개의 구급차 사이에 일렬로 몸을 숙이고 있던 준성 일행은 응급의료센터 입구를 통해 병원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일전에는 지하 3층 주차장 쪽의 비상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었다. 유일하게 열려 있던 비상계단 입구가 지하 3층뿐이었고 차까지 있었기에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지상에서부터 안으로 파고들려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직전에 내린 비는 상당히 빗발이 거셌다. 그 탓에 인한병원을 두루두루 에워싼 것처럼 포진해 있던 좀비들은 사나운 빗소리에 서로 방황하다가 일반 차량이 다수 주차된 정문 근처 외부 주차장까지 건드려버렸다. 그 탓에 서너 대의 차량에서 경보음이 발생했고, 그쪽으로 상당수의 좀비가 몰려가 버렸다.

마침 경보음을 일으킨 차량 중 한 대가 응급의료센터 입구와 가까웠다. 덕분에 응급의료센터 입구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들 대다수가 그쪽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비와 경보음 모두가 멈춘 지금까지도 그쪽에서 배회하는 중이다.

6일 차인 오늘 이후까지 살아남았던 어느 회차에서 그러한 상황을 직접 봤던 적이 있었던 준성은 한서와 단둘이 인한병원을 나설 때, 일부러 응급의료센터 1층과 연결된 비상계단 입구의 잠금을 풀어두었다.

준성은 손목시계에 뜬 시간과 응급의료센터 입구를 번갈아 확인했다. 지금은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멈춰버린 투명한 자동문 너머로 안을 배회하는 좀비들이 몇몇 보였다.

“앞으로 2분 뒤면 다시 비가 내릴 거예요. 꽤 강하게 쏟아질 거긴 한데, 잠깐 대기했다가 몇 초 뒤에 입구로 바로 달려가죠.”

선두에 선 준성의 바로 뒤에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민이 물었다.

“문도 투명하고 입구 쪽에 좀비들도 꽤 있는 것 같은데, 우릴 알아보고서 입구로 더 몰려드는 건 아닐까?”

“이쪽에선 잘 안 보이지만, 저쪽 주차장 방향의 유리벽 옆에 파손된 여닫이문이 있어요. 비가 쏟아지면서 일반 주차장 쪽의 좀비들이 또 난동을 부릴 거고, 그때 울린 경보를 쫓아서 주차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파손된 문으로 몰려갈 거예요. 우리가 들어가려는 입구 쪽 좀비들도요.”

그때의 꿈에서도 그 타이밍에 맞춰서 횡재한 기분으로 응급의료센터 내부에 진입했었다. 내부의 모든 좀비가 이동하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순탄히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준성의 말을 들은 창민이 잠깐 멈칫하다가 씁쓸히 표정을 풀었다.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다니, 진짜 대단하네.”

“말했잖아요. 꿈에서 겪었던 것들은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다고.”

현실보다 더,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준성이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건드려 보였다.

“이때까진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은 이 생생하고 정확한 기억에 감사하고 있어요. 이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못 살아남았을 테니까요.”

그뿐이랴.

누구도 살릴 수 없고 누구도 만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준성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창민이 젖은 땅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네가 기억하는 그 꿈의 모든 회차에선 단 한 번도 인한시 봉쇄가 뚫린 적 없는 거지?”

이때껏 말없이 괜찮은 척하고 있던 창민의 얼굴에서 얼핏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준성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할 수가 없었다. 직접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모든 꿈에서 인한시가 홀로 봉쇄되어 있다는 건 거의 기본적인 전제로 깔려있던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준성을 보며, 창민이 두 손을 꽉 쥐었다. 그의 내리깐 눈에 누군가를 향한 살기가 서렸다.

“…그래.”

그 살기가 향한 사람이 누구일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새끼는 미움받아도 싸.’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된다면 과연 창민의 저 살기 어린 눈이 누구를 바라보게 될까.

좀비들에게 인한시 밖으로 향하는 길을 내어준 변수?

좀비 바이러스를 품은 시체를 연구소 밖으로 끌고 나간 원장?

아니면… 좀비 바이러스를 탄생시킨 원료 그 자체인 도한서?

‘쓸데없는 생각을…….’

어차피 좀비 사태의 모든 전말을 창민이 알게 될 일은 없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다.

제 안의 테두리 속으로 들어온 믿을 만한 일행이라고 해도, 그들이 도한서를 비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기회 따윈 주지 않을 셈이다.

모든 비난은 제 손으로 도한서 이외의 ‘타인’에게 몰아버릴 테니까.

‘어디까지 이기적인 건지.’

스스로가 점점 손 쓸 수 없는 비열한 인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쟁과 PVP를 일삼는 MMORPG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질’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옅게 자조하던 찰나.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굵직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사투는 있었지만, 계획대로 응급의료센터 내부의 1층 비상계단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입구 근처의 좀비들이 다른 방향으로 몰려가며 수가 좀 줄었다고는 해도 내부에 남은 인원이 워낙 많아서인지 모두들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지시에 따라주었다.

그 결과, 비상계단으로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맞서야 했던 일곱 명의 좀비들을 때려눕힌 것 외에는 위험하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비상계단 문을 닫기 직전에 일행을 발견한 좀비 무리가 무섭게 달려오는 걸 보긴 했지만, 잠금까지 채워둔 튼튼한 문을 그들이 열어젖히는 건 불가능했다.

한시름 놓은 얼굴로 어두운 비상계단에 들어선 일행은 손전등으로 앞길을 비추며 7층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체력이 가장 좋지 않은 지안과 경오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지만, 어차피 비상계단과 5층 이후부터는 안전지대나 다름없어서 급하지 않게 대열을 유지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7층에 다다라 문을 열려던 준성은 일순 멈칫했다.

“왜 그래?”

바로 뒤를 따라가던 창민은 준성의 분위기가 바뀐 걸 예리하게 눈치챘다. 그는 준성의 손전등 불빛과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담배꽁초?”

7층 문 앞에 웬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다. 누군가가 느긋하게 필터 직전까지 연기를 빨고 버려서인지 상당히 짧은 길이였다.

“누군가가 여길 왔었어요.”

준성의 목소리에 긴장이 담겼다.

처음 보는 담배꽁초였다. 꿈속에서 여길 다시 찾았을 때도 보지 못했던 흔적이다 보니, 그게 뭘 말해주는지 단박에 이해해버렸다.

남기혁, 혹은 그의 수하들이 왔었다.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제 도한서와 백화점을 나올 때, 남기혁이 타고 있었을 구조헬기가 이동하는 걸 보았다. 원장의 집이 있던 방향으로 이동하던 걸 거꾸로 가늠해 보니, 얼추 출발지 방향이 이 병원 쪽이다.

‘원장을 잡으러 가기 전에 여길 먼저 들렸었나? 왜?’

의문과 동시에 그럴듯한 답이 나왔다.

꿈속에서 5일 차 무렵에 가장 많이 머물렀던 장소가 바로 인한병원이었다. 남기혁의 본성을 아직 모른 채 그에게 깊이 의존하던 회차에서도 5일 차쯤엔 이 병원에 머물렀다.

그래서 들렀던 걸까.

‘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칫 남기혁과 이곳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엇도 감싸지 않은 목에 스산한 바람이 스쳐 가는 착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준성을 창민이 뒤에서 받쳐주었다.

“준성아, 괜……!”

“비켜요.”

어느새 대열의 가장 후미에 있던 한서가 창민의 뒤에서 눈을 치뜨고 있다. 그는 흠칫하는 창민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며 자신이 대신 준성의 어깨와 등을 감싸 받쳤다.

“내가 보고 올까?”

한서가 준성의 차가워진 볼에 손등을 대보며 물었다. 한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준성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창민에게 부탁했다.

“형, 옥상에 혹시 헬기가 있나 확인해주세요.”

“알았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창민이 빠르게 두 칸씩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눈 깜짝할 새에 옥상 문 앞에 다다른 창민은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얼머 가지 않아, 창민이 고개를 저으며 7층 비상계단으로 내려왔다.

“헬기는커녕 아무도 없어.”

기척 죽일 줄도 알고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창민이 저렇게 말한다면,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 사람을 매복시켜놨을 수도 있지만, 남기혁의 성격이라든지 혈액원에 아무도 남기지 않았던 걸 생각해보면 그럴 확률은 0%라고 할 수 있었다.

깊게 숨을 내쉬며 조금 안도한 얼굴을 한 준성이 7층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 열게요.”

머릿속은 아무도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긴장이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일단은 남기혁이 들렀다는 것부터가 불길하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안에는 누구의 인기척도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뒤지다 간 게 티가 날 정도로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병실마다 문도 활짝 열려 있고.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걷던 준성은 바짝 뒤따라오던 한서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갈 때와 비교했을 때 뭔가 달라진 게 있으면 알려줘.”

“응.”

이곳의 원래 상태를 아는 건 자신과 한서뿐이었다. 남기혁이 여기에 와서 뭔가 수작을 부려두기라도 했다면 그걸 알 수 있는 건 둘밖에 없으니, 되도록 신중히 살펴봐 달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건넨 지 1분도 되지 않아, 한서가 준성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저쪽.”

한서가 바라보는 쪽을 따라 눈을 돌리니,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간호사실 앞의 카운터에 저런 리본 달린 작은 선물상자 따위, 꿈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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