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제1연구실에서 밖으로 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밖으로 향하는 길과 연결된 제1연구실을 중심으로 그곳을 감싸는 듯한 미로를 만들고, 그 끝에 제2연구실을 증축했던 것이었다. 거리상 쓸데없는 복도를 지나치지 않아도 되는 원초적인 출구를 가졌으니 밖과 가까울 수밖에.
“걱정했잖아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안의 안도한 목소리가 들렸다. 초조한 얼굴로 혈액원의 외부 벽에 기대어 기다리던 세 사람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둘 다 괜찮아?”
창민이 눈으로 준성과 한서를 살피며 물었다. 외견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 만큼, 준성이 고개를 끄덕여주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송해요. 꿈속에서도 못 봤던 데라서 좀 헤맸네요.”
“무사히 나왔으면 됐어. 별다른 건 없었지?”
창민의 물음에 준성은 속이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들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만 해도 제1연구실의 존재라든지, 그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던 한서의 과거 같은 건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짧은 시간 동안 알게 된 저 안에서의 일을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저 안에서의 일은… 역시 입 다물고 있는 게 좋겠어.’
한서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연구자료를 제 손으로 삭제할 때 이미 마음먹은 일이었다.
도한서의 과거는 그와 자신만이 품고 있을 생각이다. 그래서 한서의 마지막 남은 혈액팩을 백팩에 넣어서 챙겨올 때도 일부러 네임택까지 제거해두었다.
누구도 알게 하지 않겠다.
‘나 하나면 돼.’
도한서의 과거를 아는 타인은 자신 하나로 충분하다.
그 생각은 아주 확고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단호한 생각을 품은 준성은 창민에게 ‘그냥 창고 같은 곳이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보다…….”
화제를 바꾸려는 것처럼 준성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혈액원에 들어갈 때보다 한층 빽빽해진 먹구름은 시간 감각을 무디게 할 정도로 사방을 어둡게 채우고 있었다.
“드론도 와있겠네요. 비 맞으면 안 되니까 우리도 얼른 돌아가죠.”
지금쯤이라면 멀리 날려 보냈던 드론이 아지트 앞에 얌전히 내려앉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 안에 담겨 있을 영상이 무엇일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긴장이 되었다.
* * *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아지트에서 혈액원으로 향할 때 최대한 안전한 루트를 골랐으며, 이동 중에 조우한 좀비들도 확실히 처리한 뒤에야 나아갔다. 그러니 돌아가는 길은 순탄할 수밖에 없었다.
간발의 차로 비가 오기 직전에 아지트에 다다른 준성 일행은 예상대로 이미 도착해있던 드론을 챙겨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곧 천장이 울릴 정도로 상당한 양의 비가 퍼부어졌다.
노곤한 몸을 쉬게 할 새도 없이 드론의 영상을 재생했다. 그만큼 모두가 밖의 상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시작은 준성이 꿈에서 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한시를 가득 채운 좀비 무리, 일행 이외에 생존자가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잔학무도한 핏빛 현장, 그리고 드물게 보이는 주인 없는 SOS 표시.
충분히 안전한 곳에 있음에도 괜히 문과 창문 쪽을 힐끔거리게 될 만큼 불안감을 높이는 영상이었다.
아비규환의 현장을 일직선으로 비추기 시작한 지 꽤 지났을 무렵이었다.
임시로 마련한 티가 나는 그물 형태의 철책이 인한시를 빙 두르듯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철책 자체의 높이는 2m쯤, 그 위쪽엔 둥그런 철조망 대신 X 모양으로 교차한 뾰족한 쇠꼬챙이가 촘촘히 세워져 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좀비들을 완벽히 막을 수 없어서인지, 여러 대의 경찰버스가 철책을 둘러싸며 딱 붙은 상태였다.
어찌 보면 엉성해 보이는 임시방편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사건이 터진 걸 알자마자 단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최적의 바리케이드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상태로 잠깐의 시간을 번 후,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제대로 2차 바리케이드를 만든다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물 철책에 붙은 좀비들을 사격해서 수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인한시를 봉쇄하던 철책 밖에는 2차 바리케이드를 만들려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멀쩡히 설치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살아있던 시절에 경찰과 군인이었을 게 분명한 좀비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화면 속, 홀로 떨어져나와 있는 경찰버스 한 대와 활짝 열린 것처럼 보이는 망가진 철책이 보였다. 얼핏 좀비들이 너무 몰려서 뚫린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나온 경찰버스가 꽤 멀쩡한 걸 보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차량을 움직인 것 같았다.
준성은 이를 눈치챘음에도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미 일행의 분위기는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두운 바깥만큼이나 엉망이 되어 있었다.
‘최악이야.’
핏기가 사라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준성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비록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바는 아니었지만, 꿈에서 얻은 정보 속에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던 건 인한시 봉쇄에 관한 건이었다. 정보수집에 집중하던 회차에서도 드러난 사실이었고, 그때가 아닌 꿈속에서도 몇 번이나 동료들에게 전달받았던 사항이다. 그러니 꿈과 똑같이 흘러가던 현실에서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좀비 바이러스는 인한시를 벗어나, 까마득한 저 멀리까지 번져 있었다. 드론에 담긴 영상을 쉴 새 없이 채운 좀비의 수는 차마 헤아릴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꿈과 달리 좀비가 인한시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정을 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어쩌면…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꿈에서 똑같이 이어지던 루트를 뒤바꿀 수 있을 만한 영향력을 가진 건 ‘변수’밖에 없다. 가령, 자신의 사소한 패턴 변화를 통해 만났던 도한서처럼.
‘누구 짓인지는 안 봐도 뻔해.’
좀비들에게 길을 터주듯이 고의로 움직여둔 경찰버스와 함께 도한서 이외의 변수가 떠올랐다.
변수 중의 변수, 남기혁.
무자비한 그 남자라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뭐든 이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생각을 뒷받침해주듯, 남기혁은 꿈속의 기억을 기반으로 장기매매에까지 손을 대었다. 그걸 위한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도, 드론이 담아낸 인한시 밖의 풍경은 그가 벌인 짓일 확률이 높았다.
한숨을 삼키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도한서는 예상대로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무표정이었기에 곧바로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가를 떠는 창민을 필두로 사색이 된 경오와 지안이 보였다. 특히나 지안은 잘못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가가 새빨개져 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인한시에 국한된 일이었다면 그래도 시 외부에 있는 가족들은 무사할 거라 여기며 자신만 다독이면 됐지만, 이미 밖까지 바이러스가 퍼진 최악의 상황이 되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준성 또한 피해갈 수 없는 걱정거리였다.
‘이대로는 채이를 안전히 내보낼 수가 없어.’
7일 차인 내일.
거의 매 회차의 꿈에서 준성이 도움을 받았던 든든한 남자와 그 일행들이 지하철 대피소에 들르는 날이다.
꿈에서와 달리 지하철 선로가 좀비로 가득하긴 해도, 생존자 구출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들이라면 거의 마지막 대피소나 다름없는 그곳을 반드시 확인해줄 거다. 그렇게 그들은 동생 채이를 포함한 대피소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서 인한병원에 다다르게 되겠지.
문제는 그다음이다.
원래대로라면 인한병원에서 동생을 포함한 생존자들과 합류 후, 인한시 외곽의 피난소로 직행할 셈이었다. 해결책을 찾았던 마지막 회차에서도 좀비에게 물려 죽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곧장 동생과 합류해서 피난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혈액원에서 확보한 해결책을 피난소의 검사원에게 전달하고 나면 자신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수없이 반복했던 꿈속의 나날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고작 일주일 만에 완성한 해피엔딩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인한시에만 퍼져 있었다면, 말이다.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드론이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180도로 방향을 바꾼 드론이 이때껏 비추던 풍경을 다시 비추며 나아갔다.
아지트를 향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건, 나아갈 수 있는 한계 지점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드론이 보여준 영상엔 살아있는 사람 대신 좀비만 가득했다.
원래 이 드론의 시속은 약 70km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최대한 멀리, 그리고 오래 자동비행할 수 있도록 개조하면서 묵직한 배터리를 사용하게 되었기에 상당히 느려진 상태였다. 속도와 왕복을 감안하면 대략 50km 정도의 정보가 이 드론 속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최소 50km 범위 안에는 이미 좀비 바이러스로 가득하다. 설령 50km 밖으로 이동한다 해도, 어디가 안전한지 알 수 없는 지금 상태에서는 동생을 외부로 섣불리 탈출시킬 수도 없다.
‘그나마 그 아저씨에겐 밖의 정보가 꽤 있을 테니까 결국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나.’
햇빛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나던 대머리 중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드론의 영상을 모두 확인한 준성은 여전히 무표정한 한서를 포함한 파리한 얼굴의 일행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인한시 밖까지 바이러스가 퍼졌어요. 아마도 그놈 짓이겠죠.”
준성은 입에 담기도 싫은 남기혁의 이름 대신 그놈이라는 단어를 썼다.
“속셈이 뭔진 모르겠지만, 정해진 루트를 바꾸는 건 ‘변수’에게나 가능하니까요.”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지. 미친 살인마 새끼였다며.”
주먹을 꽉 쥐는 창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그 역시 CCTV에서 봤던 남기혁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알았다고 해서 오늘 당장 저희가 뭘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내일 오후라고 했던가? 네가 말했던 그 아저씨와 동생이 오는 게.”
“네.”
창민에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준성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강하게 내리던 빗발이 약해져 있다.
“곧 비가 그칠 거예요. 비는 1시간 뒤쯤에 다시 내리니까, 그 안에 인한병원으로 이동하는 게 좋아요.”
7일 차인 내일도 끝없이 비가 오다 보니, 우산 없이 마음 편히 이동하기 위해선 지금을 노려야 했다.
“다들 마음이 무거운 건 알지만, 일단 움직이죠.”
준성을 따라 일행이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걱정과 달리, 지금 당장 자신들이 뭘 해야 하고 뭘 할 수 있는지 외면하지 않았다.
짐을 챙기는 일행을 바라보던 준성은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얇은 빗줄기 사이로 저 멀리 인한병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