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맞아. 사실 지금 진짜 미치기 직전이거든.”
한서의 급변한 분위기에 오싹함을 느낀 준성이 그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서의 입술이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으, 읍-!”
멱살을 잡힌 채 강제로 입술을 맞대버린 준성은 입을 다물 새도 없이 순식간에 파고든 살덩이를 통째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닿는 곳마다 움찔할 정도로 차갑더니 지금은 입술이든 혀든, 전부 깜짝 놀랄 정도로 뜨겁다.
침범한 한서의 혀는 얼떨떨하게 놀라 있는 준성의 입 안을 다급히 훑어나갔다. 건드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문지르고 치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은 혀를 도저히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흐읍, 응…, 읏!”
준성은 제 혀를 감아 조이다가 사정없이 비벼대는 뱀 같은 살덩이에 혼을 쏙 빼앗길 지경이었다.
입 안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또렷하게 느끼기도 전에 몸이 멋대로 흠칫거리며 반응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신음마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모든 걸 삼켜버리는 타인의 열기에 금세 취해버릴 것 같았다.
“읍, 그만……!”
준성은 들고 있던 손전등마저 떨어뜨린 채 한서를 밀어냈다. 잠시 밀려나면서 잡았던 멱살을 놓아주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허리에 감겨 있던 한서의 팔이 도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다리가 휘청일 정도로 배려 없이 끌려간 준성의 입술이 또다시 먹혀버렸다.
타액을 품은 살덩이끼리 비벼지는 질척한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둘 외엔 아무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람들의 혈액팩과 그걸 보관하는 선반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목소리가 울리는 감이 있었는데 이런 야한 소리와 신음까지 울려버리니, 준성으로서는 두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꽉 끌어안긴 품에서 나름 강하게 반항해보았는데, 눈이 돌아버린 도한서에겐 그저 귀여운 앙탈 수준의 바르작거림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입 안에 들어온 혀를 콱 물어버리기엔, 일전의 일이 떠올라서 차마 그러질 못했다. 물어버리면 그걸 또 자극으로 받아들이며 흥분할 게 뻔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키스를 당해야 했던 준성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즈음이었다. 그때에서야 준성의 입 안에서 빠져나간 한서가 타액 묻은 제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내려다보았다.
술은 입도 대지 않은 걸 알고 있음에도 취했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손전등을 들어서 얼굴을 제대로 밝혀본다면, 아마 열탕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잔뜩 붉어진 혈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아…, 왜 갑자기… 난리야….”
준성이 거친 숨을 고르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몸을 감싼 한서의 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어?”
“…내가 뭘?”
준성이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도한서의 눈동자는 손전등의 불빛만큼이나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준성은 정말 모르는 걸까.
그가 한 행동, 그가 내뱉은 말, 그가 보여준 감정, 그 모든 게 제 속을 들쑤셔놨다는 것을.
연구소에서 자라는 동안, 수도 없이 들은 ‘명령’이 있다.
희생.
자신이 희생하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모두가 자신 덕분에 병들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고, 있던 병도 모두 떨쳐낼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딴 거, 바란 적도 없는데…….
고개를 저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스스로 움직일 자유조차 얻지 못한 채, 모든 걸 빼앗기기만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는 멍청한 인간처럼, 희생이라는 이름의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순순히 따랐다.
“네가 희생하느니… 이딴 세상, 다 뒤져버리라고 해.”
어쩌면 미래에서도 강요당하게 될 ‘희생’을, 강준성은 너무도 쉽게 깨부숴버렸다. 양부모의 같잖은 이상을 함께 산산이 조각내준다.
“아직 네가 바이러스를 퍼뜨렸다고 확신하긴 일러.”
이미 체념하듯이 그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을 앞서서 부정해주기도 했다.
“아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뒤바꿀 거야.”
부정할 수 없다면 이기심을 부려서라도 바꾸려 한다.
“네가 복수해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모든 원인을 덮어씌워 버릴 거거든.”
도한서를 대신해, 모든 걸 복수해주려는 것처럼.
단순히 말뿐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 계획도 없이 내뱉은 순간의 감정에 치우친 말뿐이었다면 지금처럼 열이 오르긴커녕, 차가운 얼음물 속에 빠져버린 것처럼 냉담한 조소나 흘리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강준성은 무책임하지 않았다.
내뱉는 말은 언제나 가볍지 않았고, 행동 또한 합당한 이유를 품고 움직인다.
누구도 미처 짐작하지 못할 계획이 있고, 좋은 머리로 추리해 낸 쓸만한 정보가 있으며, 머릿속 깊은 곳엔 궁극적인 해결법이 숨어있다.
아마도 그 해결법이 파훼되고 쓸모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강준성이라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테두리 안의 인간’을 지키려는 사람이니까.
이전까지는 강준성이 쳐둔 테두리 안에 들어간 인간으로서의 자각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타인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인간, 혹은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일정 이상의 신뢰도를 가진 사람.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질투가 나기에, 언젠가 테두리 안쪽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예를 들면, 좀비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될 무렵에 서창민과 황경오, 이지안을 모두 죽여 없애자는 생각을 해버릴 정도로.
하지만 이제 보니, 테두리 안에 들어가 버린 인간은 좋은 대우라든지, 신뢰도 같은 거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준성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어떤 이기적인 일이든, 어떤 비열한 일이든, 어떤 악독한 일이든.
깨달을수록 몸 곳곳이 저릿해졌다.
강준성은 도한서를 위해 ‘악인’이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테두리 안에 속한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뿐만 아니라 도대체 몇 가지나 되는 ‘정당성’을 주는지 모르겠다.
도한서가 저지른 짓을 비난하기는커녕, 도리어 ‘복수’라는 이름을 부여해 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강제로 해왔던 희생은 더 이상 필요 없다며, 도한서조차 폐기하지 못했던 과거를 그의 손으로 지워주었다.
잃어버린 살인(구원)의 의미에 ‘강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기분 좋은 이유를 담게 해주었다.
세기도 힘든 수많은 정당성이, 강준성 단 한 명에 의해 강렬히 각인되어 간다.
도한서는 새삼 생각했다.
강준성이 없으면 안 돼.
강준성 없이는 그가 모처럼 다듬어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전부 다 원래대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어떡하냐, 준성아.”
도한서가 두 팔로 준성을 꽉 끌어안은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독한 약품 냄새를 잊어버릴 정도로 기분 좋은 체취가 도한서의 신경을 마비시켜갔다.
“놔 달라고 울어도 이젠 못 놔주겠어.”
숨 가쁜 준성과 맞닿은 한서의 가슴 속 심장은 그보다 훨씬 더 거세게 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도한서의 흥분 상태에 적응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끌려간 준성은 웬 격리실 침대에 던져져 버렸다.
“윽!”
침대라고는 하지만 질 좋은 호텔의 것도 아니었고 고작해야 철로 된 프레임을 가진 싸구려에 딱딱한 매트였다. 쿠션감이 별로인 침대에 거칠게 던져졌으니 몸에 충격이 갈 만도 했다.
“이게 사람을 물건 던지듯이……!”
던져서 눕혀지자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킨 준성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다른 연구실 방이나 혈액 보관실 같은 곳도 그랬지만, 여긴 특히나 서늘했다.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데다가 있는 거라고는 이 침대 하나와 그 옆의 웬 수술실에서나 쓸 법한 선반 트레이 뿐이라서 그런 걸까.
준성은 자신이 던져지면서 깔아버린 얄팍한 이불을 들어보았다. 매트를 감싼 시트와 똑같이 새하얗기만 한 얇은 이불에서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독한 약품 냄새가 났다.
“여기가 어디인 것 같아?”
준성의 손에서 얇은 이불을 가져가 내던져버린 도한서가 손전등을 트레이 위에 올려놓았다. 흰 벽을 비추는 손전등 빛이 이리저리 반사되어, 꽤 괜찮은 무드등을 켜놓은 것처럼 빛났다.
한서는 긴장한 얼굴로 입을 다문 준성을 바라보며 백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어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은 서늘한 이 공간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22년.”
짧게 내뱉은 한서가 셔츠까지 스스럼없이 내던지고서 준성에게 다가갔다. 한서에게서 느껴지는 무서운 압박감에, 준성은 무의식중에 침대 구석으로 뒷걸음질 치듯 물러나 버렸다.
다가온 한서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내가 이 방에서 자란 기간이야.”
그 말인즉슨, 이곳은 단순한 격리실 중 하나가 아니라, 도한서의 방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뼈가 시릴 만큼 춥고, 독한 약품 냄새로 가득한 공간이.
준성의 식어버린 볼을 손으로 쓸어본 한서가 속삭였다.
“기왕이면 여기도 지워줘.”
너라면 연구자료를 남김없이 지워버린 것처럼 다 지워줄 수 있지 않을까.
이 공간에서 수십 년간 받아야 했던 추위든, 코가 썩을 것 같은 지독한 냄새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바둥거렸던 기억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