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한서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원하는 준성에게,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래.”
짧은 대답을 내뱉고 나니, 움직이지 않던 입꼬리가 다시금 휘어져 올라간다.
“네가 하는 거라면 뭐든 믿어줄 수 있어.”
“좋아.”
준성 역시 한서를 따라 하듯 웃으며 멱살을 풀어주었다.
-준성아.
무전기를 통해 창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원장 말고 다른 사람도 보안실에 왔었던 것 같아.
창민의 말에 준성이 움찔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보안실을 찾은 다른 한 사람.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도한서는 CCTV에 찍힌 자신을 지우기 위해 보안실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보안실을 비추는 카메라에 그가 찍혔을 게 분명했다.
-원장이 갑자기 보안실 구석에 숨고 나서 문이 열렸는데, 이후로는 영상이 없네.
창민이 아쉽다는 듯이 말하고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엔 경오가 끼어들어 말했다.
-어어…, 누가 보안실용 CCTV 전선을 강제로 자른 것 같아. 영상은 끊기기 직전까지만 있어.
경오의 말을 들으며 한서를 바라보자, 그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잭나이프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용의주도하기는.’
보안실에 관해서는 미리 조사해둔 게 틀림없다. 그랬으니 보안실용 CCTV만 골라서 선을 자를 수 있었고, 연구소를 비추는 CCTV들은 모두 가동시킨 채로 도한서 자신의 영상만을 삭제하는 것도 가능했다.
제2연구실의 연구자료 속에서 자신과 관련된 내용만 골라서 지웠다던 말처럼, 그는 CCTV까지 그렇게 손봐버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한서는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만들자’라는 슬로건 아래, 양부모가 이때껏 얼마나 더럽고 잔인한 짓을 해왔는지 지우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양부모가 자신들의 연구로 인해 죽어버린 이후에도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명예 대신 불명예한 취급을 받길 바라며.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도한서의 저 웃는 얼굴이 조금 무서워졌다.
하지만 도한서가 그렇게 CCTV 영상을 남겨준 덕분에 더욱 확실해진 게 있다.
사건 당일, 원장은 분명 이곳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서가 보안실의 CCTV를 끊고 그가 찍힌 영상을 지우는 걸 숨어서 보고 있기까지 했다. 이후, 당연히 한서가 보안실을 먼저 나갔을 테고, 원장은 상황을 보다가 그보다 늦게 밖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장이 감염된 양모의 시체를 가져갔다’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정확히는, 그것 외에는 추측할 바가 없다. 연구소를 마지막으로 살아나간 사람은 도한서가 아니라, 원장이니까.
준성은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며 무전기를 켰다.
“수고하셨어요. 필요한 건 확인했으니, 이제 다시 밖으로 나가셔도 돼요.”
-너희는? 출구는 제대로 찾았어?
창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근데 길이 좀 복잡하고 길어서 나가는 데에 시간 좀 걸릴 것 같아요.”
-알았어. 기다릴 테니까 무사히 나오기만 해.
무전을 끝낼 때까지도 창민은 걱정을 놓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연구소를 나와 혈액원 밖으로 향하는 중에도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준성은 무전기를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자신이 추측한 바를 한서에게 전했다.
“방금 들은 거로 추측해보자면, 원장은 너보다 뒤늦게 연구소를 빠져나갔어. 그때 죽은 양어……,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갔겠지.”
생각하다 보니, ‘양어머니’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짜증스러웠다. 그녀가 양부와 함께 저지른 짓을 다 들었기에 그런 호칭조차 붙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니 아직 네가 바이러스를 퍼뜨렸다고 확신하긴 일러.”
준성은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 혹은 윤리적인 인물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관계가 좁은 만큼, 자신의 테두리 안에 넣어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냉정하고 이기적일 수 있었다.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이 비록 도한서의 짓이라고는 하지만, 준성이 보기에 그건 연구원들의 자업자득이다. 그들이 저질렀던 짓에 대한 업보를 되돌려받은 것뿐인데, 그것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실험체로서 고통받은 도한서가 비난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 그를 두려워하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렇게 놔두진 않겠어.’
그걸 위해서는,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린 범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 남자도 감염된 채로 여길 나갔어.”
준성의 결연한 얼굴을 바라보던 한서가 잊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만약 그 남자가 완전히 감염되어서 사람을 물었고, 그렇게 바이러스가 퍼진 게 맞다면 내가 원흉인 게 맞잖아.”
“아니.”
준성이 한서의 가슴을 검지로 쿡, 찌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뒤바꿀 거야.”
너야말로 잊지 말라는 것처럼.
“네가 복수해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모든 원인을 덮어씌워 버릴 거거든.”
준성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었다.
알지만, 그럼에도 내뱉어버릴 만큼 화가 났다.
이 썩어빠진 연구소가, 이곳의 쓰레기 같은 연구원들이, 빌어 처먹을 허무한 이상이, 도한서의 시간과 감정을 모조리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도한서는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동안에도 마치 어딘가에서 읽은 소설의 줄거리를 말해주는 것처럼 평온했다.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라고는 ‘살인’에 대해 말할 때 보여준 약간의 흥분감이 전부다.
그런 도한서가 안쓰러워서 괜히 안아주고 싶은지라, 지금도 두 팔이 근질거릴 지경이다.
한서는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준성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야.”
한서의 입에서 피할 수 없는 사실이 흘러나왔다.
“이제 연구자료는 아무것도 없어. 이 상태에서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선 내가 협조해서 대량의 피를 끊이지 않고 공급해주는 방법뿐이야.”
그게 아니라면, 남기혁이 가져간 핵심 빠진 연구자료라도 정부에 바쳐야 할 판이다. 막상 정부는 핵심이 없는 내용뿐이라 그걸 단순히 쓸모없는 쓰레기 취급을 하겠지만.
한서가 우려하는 내용은 준성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좀비 때문에 망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닐 거 아냐.”
한서는 ‘아직’ 준성이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있다. 동료인 창민과 경오, 지안이 있다.
만약 그들 모두가 사라지고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그런 선택을 했다면 곧바로 납득했을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이미 꿈속에서 수없이 많은 회차의 좀비 세상을 경험한 준성에겐 그저 꿈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그의 테두리 안에 도한서 혼자만이 남아 있다면, 그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백신의 존재를 지워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강준성에겐 백신이 필요하다. 이 세상의 좀비들을 없애야만 자신의 테두리 속 사람들이 안전할 수 있기에, 섣불리 그걸 없애버리는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강준성이 도한서를 잘 알고 있듯, 도한서 역시 강준성을 적잖이 파악하고 있었다.
한서의 예리한 눈동자가 준성을 재촉했다.
“연구자료가 아니더라도 다른 해결 방법이 있는 거지?”
준성은 한서를 말없이 마주 보다가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향한 곳은 아까 들렀던 혈액 보관실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준성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도한서의 혈액이 보관되어 있던 선반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한서의 혈액팩은 이때까지 준성이 제 품에 안고 있었으니, 당연히 선반은 텅 비어있었다.
“네 말대로라면 매일 가능한 만큼……, 최대한 많은 피를 뽑아왔던 거잖아.”
“그랬지.”
“그럼 왜 혈액팩이 한 팩만 남아 있을까? 연구하는 데에 매일 몇백 ml나 되는 혈액이 필요했던 건 아닐 텐데.”
한서의 눈꼬리가 움찔하며 치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채혈할 때마다 혈액량이 상당했는데도 여분이 단 한 팩이라는 게 이상했다. 사건 당일에 유일하게 살아나간 양부가 혈액 보관실에 들른 흔적은 없었으니 그가 가져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무엇보다 직접 혈액 보관실에서 재고를 확인한 게 도한서였다.
그렇다면 이때껏 채혈했던 혈액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준성은 의문을 품은 도한서에게 자신의 마지막 꿈 일부를 말해주었다.
“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 집 창고에 작은 냉장고를 닮은 보관 케이스가 있는 걸 봤어. 안에는 아무 딱지도 안 붙은 혈액팩이 한 칸을 꽉 채우고 있더라.”
이는 한서조차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땐 그냥 ‘특수 혈액을 잠시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보면 아무리 혈액원 원장이라도 그건 불법 아냐? ‘정상적으로 헌혈 받은 혈액’을 자택에 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준성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얹어, 쐐기를 박았다.
“나는 그 혈액이 전부 네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연구에 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자가, 고작해야 일반인의 혈액을 설비까지 갖춰가면서 집에 몰래 모아두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그 혈액이 아주 귀한 것이기 때문에.
준성이 자신이 들고 있던 한서의 혈액팩을 그 주인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이것과 비슷한 사이즈로 최소 열 팩 이상.”
한서는 손전등 불빛에 비친 자신의 선명한 혈액을 바라보며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정도 양이라면 너와 연구자료가 없어도 충분히 알아서들 백신 만들고 보급할 정도는 되겠지. 그렇게나 떠먹여 줘도 못 처먹으면 이 나라가 멍청한 거고.”
원재료만 공급해준다면 백신을 만들 수 있다.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변이를 일으켰는지, 무슨 과정 끝에 백신의 주재료가 발견되었는지, 임상시험 결과가 어떤지는 모를 테지만, 당장 급한 백신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도한서의 존재가 가려지고 그의 과거가 담긴 연구자료가 없어도 말이다.
“물론 재료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넉넉하게는 못 만들지 몰라도 그렇게 하면…….”
준성의 말을 들으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입가가 너무 찢어져서 무서워 보일까 봐 걱정될 정도다.
한서가 갑자기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떨자, 준성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뭐야? 왜 그래?”
“강준성, 넌 진짜…….”
한서의 말이 너무 작았던 데다가 입을 가리고 있는 상태라서 제대로 듣지 못한 준성이 그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한서가 못 참겠다는 듯이 손을 뻗어 준성의 멱살을 틀어쥐어 당겼다. 자신을 믿냐며 끌어당기던 아까의 준성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재료, 모자라면 안 될 것 같지 않아? 한국에 인구가 몇인데. 응?”
그새 가빠진 도한서의 숨이 준성의 얼굴에 닿았다.
준성은 자신을 뚫어버릴 것처럼 맹렬히 바라보는 도한서에게 긴장한 목소리를 내버렸다.
“야, 너 눈이… 미친놈 같아.”
준성의 목소리에, 한서의 입꼬리가 호응하듯이 양옆으로 길게 찢어져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