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한서는 제2연구실에 자신의 흔적을 지운 ‘핵심 없는 자료’만을 남겨두었다.
처음엔 모두 폐기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서는 이곳을 배회하는 죽은 연구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부러 테스트용의 바이러스와 안정제까지 남겨두었다. 이곳의 연구원들이 이때까지 뭘 만들려 했는지에 대한 증거까지 남겨두었으니, 훗날 누구든 그들을 지탄하는 기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제1연구실이었다.
연구자료 원본을 비롯한 자신과 실험체들의 혈액, 완성이 머지않은 미완성 백신까지 보관된 곳이었다.
제2연구실과 달리 제1연구실은 워낙 은밀하게 감춰진 데다가 자신을 비롯한 극소수의 연구원밖에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극소수의 연구원 중에는 물론 자신의 양부모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 한서야…!”
분주히 움직이던 모친이 소리 없이 다가온 한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 백신과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주사약병 여러 개가 들려 있었다.
한서를 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친이 언제나처럼 ‘상냥한 척하는’ 미소를 걸었다.
“제2연구실에서 오는 길이니? 지금쯤 다들 감염되었을 텐데, 역시 넌 멀쩡했구나. 그럴 줄 알았어.”
믿고 있었다는 듯이 웃은 모친이 일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진행할 땐 구속구를 쇠사슬로 바꾸든 해야겠어. 아니지, 연구원들의 정신 교육이 먼저이려나.”
실험체 중 한 명의 결박이 느슨했던 탓에 좀비가 된 그의 난동을 구속구가 버티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그 결박을 조절한 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모친은 애꿎은 연구원들의 안일함을 탓하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이것 좀 들어줘. 손이 늘었으니 네 혈액팩이라도 챙겨야겠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모두 한서에게 건넨 모친이 혈액 보관실로 향하려 했다.
“여길 버리시려고요?”
“그래야 하지 않겠니? 이렇게 난장판이 되었으니 이대로 아무도 왕래하지 못하게 폐쇄해야지. 어차피 청무시에 서브 연구실을 만들어두었으니, 우린 거기로 가면 돼.”
한서는 언젠가 그들을 따라 방문한 적 있었던 청무시의 한 연구소를 떠올렸다.
머릿속으로 그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던 한서가 물건들을 데스크에 대충 올린 채, 주사약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참 쉽게 버리시네요.”
“무슨 뜻이니?”
“오랫동안 꿈을 꾸게 해드렸던 귀한 연구소와 연구원들이 아니었던가요?”
모친이 눈을 치켜뜨며 한서를 노려보았다. 언제나 예의 바르게 굴라고 가르쳤는데 갑자기 비웃음 섞인 날 선 목소리로 말하니, 그녀로서는 기분이 확 나빠져 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순응하던 개가 건방지게도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필요 없어진 건 버려야지.”
모친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서를 향해 팔짱까지 낀 채 턱을 올렸다. 거만한 그녀의 얼굴에 자신만만하면서도 차가운 웃음기가 흐른다.
“연구소라면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어. 연구원들도 충분히 보충 가능해.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니야. 나나 네 아빠, 그리고 넌 없으면 안 돼.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야.”
모친이 상냥하게 손을 뻗어 한서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우리만 살아있으면 돼. 우리만 있으면 완성할 수 있어.”
한서를 바라보는 모친의 얼굴엔 부푼 꿈을 그대로 담아낸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허무맹랑한 이상을 꿈꾼 지 25년.
봉사활동을 나갔던 보육원에서 두 살 된 도한서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이상.
그 결실이 코앞이었다.
도한서의 혈액에서 발생한 바이러스는 감염 과정에서 숙주의 손상된 세포 및 썩은 부위를 갉아먹고 지나간다. 이는 완전히 감염되어 한 번 사망한 숙주가 시체 상태에서도 충분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도록 미리 세포를 보수하는 개념과 같았다.
이때 손상 부위의 보수를 확인하는 즉시 완벽한 백신을 투약하면 그야말로 건강한 육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병을 가졌든지.
심지어 암과 수많은 불치병까지도.
바이러스와 백신의 조합으로 양부모의 이상 그 자체인 ‘만병통치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도한서의 혈액이 필수불가결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도한서의 혈액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지만.
모친의 들뜬 생각을 읽은 한서가 천천히 그녀를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요. 엄마 말대로 ‘우리’가 살아있으면 앞으로도 아무 문제 없이 똑같은 연구를 할 수 있겠어요.”
“그래, 그러니까……! 컥!”
말하던 중에 한서의 우악스러운 손에 목을 틀어 잡힌 모친이 눈을 부릅뜨며 숨을 삼켰다. 입을 크게 벌린 채 뻐끔거리는 그녀의 입 안으로, 어느새 뚜껑을 열어젖힌 주사약병의 약물이 쏟아져 들어간다. 그 약병의 내용물이 뭔지 단박에 알아본 모친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크윽, 너……! 헉!”
삼키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친은 결국 약물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한서가 꽉 조였던 목을 아주 잠깐 일부러 풀어줬던 탓에, 그제야 파고든 숨과 함께 약물이 목구멍을 쑥 미끄러져 넘어간 것이다.
약물을 삼킨 걸 확인한 한서가 그제야 모친을 완전히 풀어주었다.
“켁, 켁! 콜록! 우욱!”
모친이 목구멍으로 다급히 손가락을 집어넣어 헛구역질을 했다. 방금 삼켰던 약물과 위액 일부가 토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모든 연구자료가 담긴 USB와 두툼한 연구자료 파일들을 들고 나타난 부친이 경악한 얼굴로 한서와 모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보! 바, 바이러스 원액을……! 약병에 있던 걸……!”
모친의 얼굴에서 기어코 절망스러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제가 먹여드렸어요.”
“뭐…?”
한서가 웃는 얼굴로 빈 주사약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 약병의 표면에는 ‘Z-Virus’라는 네임택이 붙어 있었다.
“도한서!”
부친이 경악한 얼굴로 한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바닥에 떨어져 버린 빈 주사약병이 청량한 파열음을 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우리’만 있으면 신약을 완성할 수 있다고.”
“그거랑 이딴 짓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부친의 화내는 얼굴을 마주하며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한서가 돌연 그의 뒷머리를 확 잡아당겼다. 강한 힘 때문에 억, 소리와 함께 머리를 젖힌 부친의 입 안에 모친이 삼킨 것과 똑같은 바이러스 원액이 흘러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삼키지 않으려던 부친이었지만, 한서의 강한 손아귀가 목젖을 사정없이 눌렀다 떼는 바람에 전부 삼켜버리고 말았다.
놔주자마자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목구멍을 눌러서 원액을 토하기 바쁘다. 보기 흉할 정도로 필사적이다.
“쓸데없는 짓을 참 열심히 하시네요.”
이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시점에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한 방울이라도 체내에 들어가서 내벽과 접촉해버렸다면 이미 감염된 거다. 그만큼 자신의 피가 만들어낸 바이러스는 절대 약하지 않았다.
이는 조금이라도 바이러스를 뱉어내려고 헛구역질을 해대던 양부모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모친과 똑같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비틀거리던 부친은 한서의 옆에 있는 데스크를 보며 그쪽으로 얼른 손을 뻗었다. 그는 데스크에 있는 약병 사이에 미완성 백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미완성이라고는 해도 바이러스의 진행속도 정도는 충분히 늦춰줄 수 있었기에, 시간을 벌려면 저거라도 마시든, 주사하든 해야 했다.
쨍강-
부친의 손이 닿기 직전, 한서가 그 약병들을 한 번에 집어서 벽에 내던져버렸다. 산산이 조각난 약병들에서 쏟아진 붉은 빛의 약물이 마치 피와도 같다.
“아, 안돼…!”
모친이 고개를 내저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부친은 한서의 행동에 화낼 힘도 잃어버린 것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왜…….”
부친의 떨리는 입술을 타고 의문이 흘러나왔다.
“왜 이러는 거냐…? 어떻게 네가 우리한테 이런……!”
“제 ‘연구성과’를 보고 싶어서요.”
당신들이 도한서를 연구해왔듯, 자신 역시 그들을 쭉 연구하며 지켜봐 왔기에.
“도와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들을 두고 잠시 자리를 떠났던 한서는 금세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Base_도한서(RH NULL)’이라는 네임택이 붙은 400ml 혈액팩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한서는 그 혈액팩을 주저앉은 부친의 무릎에 툭 던져주었다.
“혈액 보관실에 딱 하나 남아 있던 제 혈액팩이에요. 그 정도 양이라면 청무시 연구소까지 가는 동안 ‘한 명’쯤은 죽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혈액팩을 쥔 부친의 눈빛이 흔들렸다.
확실히 혈액보관실에 남아 있던 도한서의 혈액팩은 딱 하나였다. ‘도파민 과잉 상태’에서 채취한, 바이러스를 잡아먹는 혈액.
미완성 백신만큼 효과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 원료이니만큼 충분히 효과는 있다. 미완성 백신도 없는 지금, 당장 바이러스의 진행을 더디게 만들 방법은 이제 그뿐이다.
데스크에 기댄 채 그의 모친이 그랬던 것처럼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린 채, 두 사람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두 분이 사이좋게 나눠 드시면 인한시를 벗어나기도 전에 혈액이 모자라서 다들 죽게 되겠죠. 죽은 뒤에는 제2연구실 사람들처럼 흉측한 좀비가 될 거고요.”
한서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사람들을 살리자’고 말씀하셨던 두 분이 그런 모습으로 날뛰는 건 좀 웃길 거 같네요.”
한서는 두 사람의 말로를 대놓고 비웃어 주었다.
“차라리 두 분 다 여기서 죽는 게 어때요?”
양부모의 황망한 눈동자들이 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셨던 분들이니까,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려요. 그럼 아무도 피해받지 않을 수 있어요. 선량한 시민들이 위험에 처할 일도 없고, 위험한 바이러스가 외부로 노출될 일도 없죠.”
두 사람에게 한서가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전 이 연구소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미소 사이로, 벌레의 다리를 하나하나 뜯어내며 웃는 천진한 어린아이가 보였다.
“두 분이 어떤 연구를 했고 얼마만큼 성과를 내고 있었는지, 그 누구도 모를 거예요.”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고 가혹하던 양부모의 모습이, 그날따라 다리도 없이 바닥을 기는 하얀 애벌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연구실의 연구자료가 집약된 곳에 다다른 한서는 그곳에서도 자신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폐기하려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것마저 지우면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통째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사라져버리면 뭐 어때서.’
흔한 추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독한 삶을 살아왔으면서 자신의 흔적을 전부 지우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빛바랜 사진을 보며 떠올렸을 과거를 자신은 이런 문서 쪼가리를 보며 곱씹어야 한다니.
연구자료를 그대로 남겨둔 채 제2연구실에서 가져온 실험체 자료까지 대충 던져놓은 한서는 다시 양부모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남아 있는 건 목이 졸려 숨진 모친과 자신을 위한 메모 한 장.
[먼저 연구소로 가 있을 테니까 얼른 오렴.]
친절하게 정확한 주소까지 적어주고 갔다.
끔찍하고 무서워도 ‘도한서의 혈액’은 끝없이 필요하기에, 부인은 버릴지언정 양아들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부친은 도한서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어차피 ‘연구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세뇌시켜 왔고, 이때까지 도한서의 집은 연구소의 한 격리실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분명 따라올 거라 생각하는 거다.
도한서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일부러 세뇌된 척하며 의도적으로 순응해왔던 것도 모른 채.
‘멍청하긴.’
이런 자에게 순응해온 자신이 어이없을 지경이다.
이 자리에 없는 부친을 향해 내뱉기 시작한 비웃음이 어느새 큰 웃음소리가 되어 터져나갔다. 어깨까지 떨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던 그는 밖으로 향하던 도중, 혈액 보관실이라는 명패가 걸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는 아까 전, 자신의 혈액팩에 붙어 있던 것과 똑같은 네임택을 붙이면서 버려둔 구겨진 스티커가 있었다. 표면에는 ‘G-7 실험체(RH+O)’라고 적혀 있다.
생각해보니 G-7 네임택을 달고 있던 실험체는 가장 최근에 죽였던 인간 중 하나였다.
점차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싫어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양부모의 신약 개발을 막기로 결정한 순간, 자신이 해온 살인(구원)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누군가를 죽이는 걸 즐기며 황홀해 하던 끔찍한 살인마에 불과할 뿐.
살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으며 흥분하지도 않는, 비정상적인 인간이었다.
실험체들을 구원하던 자에서 일개 살인마가 되어버린 도한서는 자신의 어둡고 음침한 속과 달리 쾌청하기 이를 데 없는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보았다.
숨 쉬듯 꿔온 탓에 이젠 나름 즐길 지경이었던 악몽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느긋한 오후 강의가 있는 날이니, 일찍 가서 편안한 낮잠이나 자야겠다.
말끔하게 자고 일어나면 많은 게 변해 있겠지.
아니, 꼭 변해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지옥이 과연 어떤 건지 그 한가운데에서 즐겨보고 싶으니까.
하지만 설마, 자신까지 변해버릴 줄은 몰랐다.
단 한 사람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