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사방에 튄 붉은 핏방울의 열기가 어느덧 열 사람 것을 넘어갈 즈음부터 수를 세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면역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막 한 사람의 숨을 거둬준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채혈당하고 있던 도한서는 유독 또렷한 정신을 파고들던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일시적 도파민 과잉 상태의 혈액을 소량 투입한 것만으로도 바이러스 단백질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방어적이기만 하던 혈액이 드디어……!”
연구원은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도한서의 일반적인 혈액은 바이러스의 증식을 둔화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사람으로 따지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바짓단을 붙잡아 엉겨 붙는다든지, 두 팔을 벌려 가는 길을 잠깐씩 방해하다가 튕겨 나가는 대신 진행속도를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도파민 과잉 상태가 된 혈액의 힘은 남달랐다.
외피를 이룬 단백질을 하나하나 찢어발기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속살에 이를 박아넣은 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바이러스가 원하던 살아있는 시체처럼.
도한서의 부친과 모친, 나아가 연구원들 모두가 바라던 백신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이 점점 이상해져 갔다.
“살려줘…!”
언제나 냉정하던 머릿속이 수시로 뜨거워져 가는 느낌은 분명 기분 좋았지만, 감정 자체가 예민해지는 느낌이었다.
“나, 난 나갈래! 계약은 어, 없던 거로 해달라고!”
감염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실험체들을 죽이기 위해(구하기 위해) 칼을 손에 쥘 때마다 기이한 희열과 함께 화가 났다. 타오를 줄도 모르는 것처럼 차갑게.
“살려줘! 제발!”
하나같이 살려달라는 말뿐.
다 똑같아.
스스로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아무것도 안 하려고 들지.
‘내가 도와줄게.’
그들은 자신에게 언제나 타인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이제부터라도 나처럼 자유롭게…….’
-웃기지 마.
머릿속에 들려온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
듣자마자 실소가 흘렀다.
극도의 흥분이 가져온 도파민 과잉 상태는 조현병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망상 증세나 환각은 아직이지만, 자신이 들은 목소리는 도저히 흘려넘길 수 없는 환청이었다.
-자유로워? 네가?
처음 듣는 환청에 당황하며 패닉을 일으키진 않았다. 오히려 올 게 왔다는 듯이 편안한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칼에 묻어난 피를 태연히 손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딘데?
‘제2연구실의 H-4 실험체 격리실.’
방금 이 격리실의 주인이자 감염된 실험체를 죽였으니 몇 시간 뒤에 곧바로 네임택이 바뀌고 새 실험체가 자리를 잡을 테지만.
속으로 읊은 차분한 대답을 향해 냉랭한 자신의 목소리가 조소한다.
-거봐. 또 ‘연구소’에 있잖아.
날카로운 말에, 피를 닦던 손길이 멈췄다.
-네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것만은 부정하고 싶었다.
자유롭게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다. 학교도 매일 빠지지 않고 나갈 수 있었고, 건강을 빌미로 몸을 단련할 때부터 유일하게 관심 있던 검도 쪽 진학도 부모에게 흔쾌히 허락받았다. 최근엔 연구에 제법 의견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사표현까지 가능했다.
무엇보다, 연구원들은 더 이상 자신을 ‘실험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유로워진 게 아닌가. 온몸을 묶인 채 바이러스를 주입 당하고, 죽어서 좀비가 되거나 자신에게 죽는 결말밖에 볼 수 없는 나약한 다른 실험체들과는 전혀 다른……!
-그것뿐이잖아.
말문이 막혔다.
-넌 한 발자국도 자유로워지지 못했어.
피를 모두 닦아냈음에도 붉은빛을 잃지 않는 칼날에, 도한서의 창백한 눈동자가 비쳤다. 그의 눈동자는 천천히, 저 깊은 곳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처음으로 원망이라는 걸 해보았다.
자신을 혼자 둔 진짜 부모를 향해.
자신의 ‘피’가 목적이었기에 주워왔을 뿐인 가짜 부모들을 향해.
말도 안 되는 이상과 업적을 바라며 연구에 동참한 연구원들을 향해.
본인의 의지로 지옥 소굴에 걸어들어와 놓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는 어리석은 노숙자들을 향해.
하지만 가장 원망해야 했던 건 자신이었다.
자신만 없었다면 이딴 반인륜적인 연구도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왜 내가 없어야 했는데?’
문제가 되는 건 이딴 썩어빠진 짓거리를 벌이는 자들이 아닌가.
“으아악-! 살려줘!”
실험체들에게서나 들려오던 비명이 이제 막 목을 물어뜯긴 연구원에게서 터져 나왔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연구자료가 담긴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한서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등에는 상반신뿐인 좀비를 업고서 그에게 뜯어먹히고 있는 주제에, 추하게 바닥을 기며 다가왔다.
“하, 한서야, 크윽! 살려줘…!”
그와 똑같은 말을 하던 자들을 안다.
그들 중 누구도 멀쩡히 살아있는 자가 없었다. 제정신일 때 도한서의 손에 죽었거나,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끝없이 실험당했다.
그걸 알면서도 연구원은 두 눈에서 피눈물을 머금은 채 한서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네, 네 피를 줘…! 아, 아직 늦지 않았어!”
“아뇨, 충분히 늦었는데요.”
한서가 예쁘게 미소 지으며 남자의 손을 구둣발로 콰직, 짓밟았다. 남자가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서를 올려다보았다.
“여러분이 너무 열심히 변이시켜서 그래요. 지금처럼 7세대 실험체에게 계속 바이러스를 주입 당하는 상태라면 5분도 안 걸려서 죽겠네요.”
“히익…!”
연구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어느덧 붉은 피막을 덧씌우기 시작했다.
“거봐요. 벌써 바이러스가 머리까지 와버렸잖아. 이렇게 되면 제 피를 퍼부어드려도 죽는 건 똑같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한서가 서류뭉치를 든 채 남자의 옆을 지나쳐 걸었다. 남자를 힐끔 돌아보는 한서의 두 눈에는 이때까지 그가 실험체들을 향해 보냈던 경멸과 혐오의 빛이 가득했다.
“목숨 구걸이라니, 실험체들이나 당신네 연구원들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네요.”
한서는 좀비에게 한 번 더 물어뜯긴 남자의 목에서 피와 비명이 터지는 걸 뒤로한 채, 복도로 나왔다. 하얗던 벽 곳곳에 붉은 피가 난무하고 하얀 가운 혹은 구속복을 입은 비척이는 좀비들이 눈에 보였다.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끔찍한 좀비들이 선 복도를 걸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는 좀비 무리를 지나는 도한서의 손에는 이 아비규환 속에서 꺼낸 일련의 모든 연구자료를 담은 서류뭉치가 들려 있었다.
비명 담은 붉은 피가 점점이 뿌리박힌 제2연구실을 걸으며, 도한서는 약품 냄새조차 덮어버린 피 냄새에 기분 좋은 미소를 걸었다.
언젠가, 부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은 첫 실험체를 죽였던 흥분을 떨리는 눈으로 곱씹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 그게 네 본성이니까.”
부친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한서의 시야를 뒤덮었다. 한서의 눈에 비친 부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자상하고, 흉악했다.
“넌 친엄마를 잡아먹고 나온 애가 아니니.”
연구소에 끌려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알았다. 부친이 어린아이의 감정 따윈 전혀 알 바 없다는 듯이 내뱉은 가혹한 진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친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약한 몸으로 화장실에서 홀로 아이를 낳다가 죽은 어린 친모.
부친은 그녀를 죽인 게 자신이라며, 그런 아이를 거둬준 걸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창 그와 연구원들에게 정신적인 세뇌를 당할 때라서인지, 무리 없이 납득해버렸다.
사람을 죽이며 터져 나온 도파민 수치를 보며, 부친은 그 일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거로 흥분한다는 게 정상인 건 아니잖아. 넌 ‘태어난 순간부터’ 정상이 아니었던 거야, 네가 가진 피처럼.”
“이 아빠가 비정상적인 널 대신해 수많은 사람을 구해줄게. 그러니까 넌 이 아빠를 위해서 네 본성마저 바쳤으면 좋겠구나.”
자신은 처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모든 게 비정상.
육체든, 피든, 정신 상태든, 모든 게 비정상이었다.
하지만 비정상이라고 해서 자유를 갈망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도한서는 백신이 완성될 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로 백신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서 죽을 때까지 피를 뽑히고 실험당해야 할 이 연구소에서 벗어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