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79)화 (79/240)

- 79화 -

“맞아.”

너무나 심플하면서도 가벼운 대답이었다. 반면 그 안에 담긴 말뜻은 너무도 묵직해서 압사당할 것 같다.

준성은 섣불리 말도 못 하고 입을 몇 번 달싹거리기만 했다. 이곳의 실험체들이 무슨 짓을 당해왔는지 알고 있던 준성으로서는 그 대상 중 하나가 눈앞의 도한서였다는 것에 현실 같지 않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비인도적인 임상시험.

오갈 데 없는 실험체라는 이유로 하찮은 동물처럼 취급당한 사람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신약 개발에 심취해, 지독한 바이러스를 발견했음에도 이를 곧바로 폐기하지 않고 연구재료로 삼은 연구원들.

모든 걸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으나, 이때만큼은 새로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멋대로 상상되어 펼쳐졌다.

그 안에는 정신병원의 어떤 독방처럼 밀폐된 새하얀 공간 속, 창백한 피부를 덮은 하얀 병원복 차림의 도한서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닮은 검은 옷에 둘러싸인 지금의 도한서와는 천지 차이의 모습이었다.

그저 상상했을 뿐임에도 이상하리만치 화가 치밀어올랐다.

준성의 표정에서 그의 상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한서의 얼굴에 떠 있던 자조 대신 평소의 그가 짓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다른 실험체들과 달랐거든.”

한서는 몸을 돌려 다시금 복도를 걸었다.

“필요한 건 실험당할 내 몸이 아니라 내 ‘피’였으니까.”

“피…?”

준성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이 눈을 크게 뜨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따라오는 준성의 기척을 느끼며 한서가 입을 열었다.

“혈액형 중에서 가장 희귀하고 특별한 혈액형이 뭐라고 생각해?”

“희귀하고 특별한 혈액형이라면… RH-라든지?”

혈액형 중에서 희귀하다고 알려진 RH- 혈액형은 준성도 어느 정도 아는 편이었다. 그 안에서도 A형이냐, B형이냐 등으로 나눠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치면 더더욱 희귀해지는 거라서 꽤 특별한 피라는 인식이 생겨버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게임에서 서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전체채팅창으로 RH-B형의 피를 구한다고 10분 넘도록 외치던 사람이 있었다.

형제가 사고를 당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맞는 피가 없어서 수술도 못 하고 있다기에, 당시 서로 얼굴도 모르는 게임 속 사람들이 앞다투어 함께 홍보해주던 게 기억났다. 많은 사람이 나서준 덕분에 금세 같은 혈액형 보유자를 만날 수 있게 되어 해결된 거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사고가 났다는 희귀 혈액형 보유자는 그대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한서가 어느 문 앞에 섰다.

“RH- 혈액형도 희귀하긴 하지. 하지만 일반적인 혈액형에 비해 수가 적을 뿐, 전 세계적으로 따져보면 그렇게 극히 적은 숫자는 아니야.”

한서의 말을 듣던 준성은 그가 왜 갑자기 혈액형 이야기를 꺼낸 것인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말았다.

한서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외면하고 멀어지던 좀비들.

한서의 피가 자신의 체내에 조금 들어온 것만으로도 차마 물지 못하고 기피하던 그들의 모습.

도한서의 피가 그들을 막는 백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 그의 ‘피’가 백신인 걸까.

준성은 문을 여는 한서의 등을 바라보며 인한병원에서 그와 단둘이 있을 때 나눴던 대화의 일부를 떠올렸다.

그땐 한서가 갑자기 좀비로 가득한 병원 2층까지 내려가서 스스로 피를 채혈해온 것으로도 모자라, 그걸 준성의 몸에 주사기로 밀어 넣던 때였다. 당시 준성은 혈액형도 묻지 않고 대뜸 수혈하듯 피를 집어넣으려는 그에게 미심쩍은 얼굴을 했었다.

“내 혈액형이 뭔 줄 알고?”

“나야 모르지. 대신 난 아무한테나 수혈 가능해.”

“내가 RH-면 어떡하려고.”

“RH-야?”

“아니.”

“됐네, 그럼.”

한서가 했던 ‘아무한테나 수혈 가능’이라는 말.

그땐 그저 한서가 O형이라서 그랬겠거니, 하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생각에 빠진 준성의 눈에, 한서가 열어준 문 안쪽의 광경이 보였다.

얼핏 보면 혈액원의 혈액 보관창고인 줄 알 것 같다. 그만큼 그곳에는 ‘피’가 가득했다.

냉장고를 닮은 은색 트레이가 좌우 벽에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선반엔 혈액 팩이 가득 쌓여 있다. 몇 칸 단위로 RBC A(+)라든지 F-RBC (B+)와 같은 알 수 없는 표기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떤 선반에는 누런색으로 된 혈장 팩도 다량 놓여 있다.

한서는 그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준성은 좀 더 깊이 들어가자, 안에 표기된 내용이 점차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A-1 실험체(RH+B)

H-3 실험체(RH+O)

K-11 실험체 (RH-A)

사람의 이름 대신 기호와 숫자를 넣은 데다가 ‘실험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 뒤에 붙은 건 누가 보더라도 혈액형이다. 아마도 저 트레이에 담긴 소량의 혈액팩 주인의.

짙은 약품 냄새 사이로 괜히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혈액팩에 담긴 채 밀봉되어 있으니 피 냄새가 날 리 없음에도.

“여기 있네.”

한서의 조소 담긴 목소리가 준성의 시선을 끌었다.

한서가 시선을 둔 채 손전등으로 비춘 그곳을 본 순간, 준성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Base-도한서(RH NULL)

기호와 번호로 둘러싸인 갖은 실험체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의 이름을 가진 네임택.

하지만 그 뒤에 붙어 있는 건 일반적인 혈액형이 아니었다.

RH NULL(RH 널).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혈액형이었다. 저런 혈액형이 이 세상에 있긴 했나?

한서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트레이에 담긴 딱 하나 남은 혈액팩을 꺼내 들며 말했다.

“1억 8천만분의 1. 전 세계에서 고작해야 백여 명에 불과한 혈액형.”

담담하게 내뱉은 한서가 눈가를 휘며 준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준성은 반대로 그 너머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항원이 없는 특이 혈액형이라서 누구에게든 수혈할 수 있는 돌연변이야. 네가 말한 RH-에게도 물론 가능하고.”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RH+든 RH-든, 모두에게 수혈 가능한 피가 있다고.

그 피는 해외에서 ‘골든 블러드’라고 불릴 만큼 굉장히 희귀하며 가치 있는 혈액이라고 한다. 반대로 그들은 본인들과 같은 피가 아니면 누구에게서도 수혈을 받지 못해, 언제나 사고가 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다.

준성은 그 희귀한 피의 이름 역시 저 트레이에 적혀 있는 도한서의 것처럼 RH NULL이라는 걸 떠올렸다.

‘정말 그렇다면 도한서는 왜…….’

왜 위험한 짓을 해온 거지.

준성은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조심? 도한서에게 조심이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위험’이라는 단어와 비정상적으로 밀접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가 여태껏 보여준 서슴없는 행동도 그렇고,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뛰어든 것도 그렇다.

마치 뭔가에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위험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이상한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다.

한서는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 준성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자신의 혈액팩을 건네주었다. 잘 보관되어 있던 혈액팩은 아이스팩처럼 차가웠지만, 준성에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갓 추출한 것처럼.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개발하던 신약은 좀 유치하고 우스워.”

미소 띤 한서의 얼굴엔 그의 말마따나 누군가를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사람을 낫게 하는 만병통치약을 만들고 싶어 했거든.”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만, 말이 되게끔 만들려고 미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한서는 혈액팩을 쥔 준성의 손을 끌고 다시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볼일은 어디까지나 이곳에 남아 있을 자신의 피를 되찾기 위해서인 것처럼.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그딴 생각을 하게 만든 게 나야.”

문을 나서던 한서가 자신을 가리키며 눈길을 흘렸다.

“부모라는 작자들이 하필 영웅 놀이에 푹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나 같은 게 태어나버렸거든.”

한서의 입매가 길게 찢겨 올라간다.

도한서가 자신이 특별한 혈액형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다섯 살 생일을 맞은 날 밤이었다.

그날은 어린 자신을 방치하며 어느 연구에만 매진하던 부모님이 약품 냄새 가득한 연구소로 자신을 끌고 간 날이기도 했다.

“네가 사람들을 구하는 거야.”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좋지, 한서야?”

글쎄, 좋았던가? 뭐 때문에?

이젠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날 웃었던 이유가 그들이 드디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따뜻하게 안겨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계치까지 피를 뽑힐 때마다 그들이 웃어줬기 때문인지.

적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막연한 선의가 좋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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