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회 -
“준성아! 한서야!”
“두, 둘 다 괜찮아?!”
“오빠들!”
창민과 경오, 지안이 각각 벽에 찰싹 붙어서는 벽면을 쿵쿵 두드려댔다.
그러면서도 창민은 방금 돌아갔던 벽의 면면을 꼼꼼히 눈으로 훑었다. 어딘가에 손잡이라도 있진 않을지 찾아보는 거였지만, 발견한 거라고는 그저 얇은 선으로 된 직사각형 홈밖에 없다. 그마저도 버튼이나 다른 인식 화면 같은 게 없어서 깊이 쳐다보지 않았다.
힘으로 벽면의 일부를 밀어보던 창민의 귀에 벽 너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흰 괜찮아요.”
목소리가 약간 울리는 것으로 보아, 벽 너머에 다소 넓은 공간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창민은 준성의 목소리를 따라서 그가 다가서 있을 부분에 밀착한 채 말했다.
“이쪽에선 문이 안 열려. 혹시 그쪽에서 여는 장치가 있는지 찾아봐봐.”
“딱히 보이는 게 없어요. 힘으로도 안 열리고요. 대신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이 보이는데, 이쪽으로 가볼게요.”
“괜찮겠어? 거긴 너도 꿈에서 못 본 곳 아니야?”
창민이 물을 때, 어렴풋이 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복도의 일행에게 뭔가 말을 전하려는 것보다도 준성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벽의 두께가 좀 있었기에 가까이 다가서 있었던 창민마저도 한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깐 한서의 말을 듣고 있던 준성이 창민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긴 한데, 길 쪽에 비상구 표시가 보이니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창민과 다른 이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상구 표시가 있다면 밖으로 나갈 길이 분명 있다는 거니, 혈액원 밖에서 만날 수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래도 다들 갑작스레 떨어지게 된 탓에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전기는 갖고 있지? 무슨 일 생기거나 길이 이상하면 무전 해. 거리상 우리가 밖에 나가도 연결될 거야.”
창민은 손전등처럼 일행에게 딱 두 개뿐인 무전기 중 하나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준성이 인한병원에서 가짜 박현제 간호사와 5층 조직원들 간에 사용하던 무전기 두 개를 일찍부터 챙겨왔던 덕분에 이럴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경오를 구할 때 이용했던 것처럼.
두 개의 무전기 중 하나는 만일을 대비해 창민이 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다행히도 한서가 메고 다니는 준성의 백팩 속에 있었다. 그러니 둘로 갈라진 일행이 서로 멀어져도 연락수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어요.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밖에서 만나요.”
“그래. 조심하고.”
내키지 않는 듯이 머뭇거리던 창민은 이내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복도를 앞서 걸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밖으로 나가서 혹시나 그들이 나올 비상구가 어디와 연결되어 있을지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근처에 좀비라도 있다면 안전을 위해 미리 제거해두는 것도 좋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준성의 목소리가 들렸던 벽 쪽을 뒤돌아보던 창민은 그와 마찬가지로 걱정 가득한 경오와 지안을 다독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의 창민 일행과의 대화가 끊기고 그들의 기척이 사라진 지 좀 지나고 나자, 준성이 그제야 자신을 안고 있던 한서를 올려다보았다.
“다들 간 것 같은데,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한서는 준성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싫은 냄새가 나서 네 체취로 정화 좀 하려고.”
“정화 같은 소리 하네.”
눈가를 찌푸리며 한서를 확 밀어낸 준성은 그래도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좀 독하긴 해.”
밖에서 흔히 맡던 피 냄새와는 달랐다.
지독한 소독약을 비롯한 다양한 약품 냄새.
병원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바로 그 냄새가 몇 배나 응축되어 들이닥친 것 같았다. 그만큼 코가 알싸했다.
한서에게서 떨어진 준성은 들고 있던 손전등으로 공간을 비추었다. 밖의 복도처럼 일직선으로 이어진 어두운 길 끝에 언뜻 비상구를 닮은 녹색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창민 일행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했던 ‘비상구’의 표시등이 아니라, 연구실에 진입할 때 보았던 안면인식 장치의 것과 흡사했다. 또한, 장치가 연결된 양문형 철문의 생김새 또한 흡사했다.
순간 준성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지하, 그것도 미로까지 만들어가며 깊은 곳에 숨어 갖은 연구를 진행했을 아까의 공간보다도 지금 이 복도가 훨씬 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밀폐된 철문까지 뚫고 튀어나올 정도의 냄새라니, 대체 그 너머엔 얼마나 많은 약품이 즐비해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전기장 반응 방식의 지문인식장치.”
한서는 그와 준성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게 해준 벽이자 문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철문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준성을 뒤로한 채 그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걸 뚫고 벽 역할을 하던 바리케이드를 지나면…….”
철문 앞에 멈춰 선 한서의 뒤를 재빨리 따라온 준성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녹색 빛의 인식장치를 응시했다. 그것은 밖의 연구실 앞에서 봤던 것과 똑같아 보였다.
한서는 인식장치에 달린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홍채인식을 통해서 ‘진짜 연구실’의 문을 열 수 있어.”
인식장치에서 흘러나오던 녹색 빛이 순간적으로 푸르게 변했다.
직후, 단단히 닫혀 있던 철문이 좌우로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려갔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준성은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지독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감이 있는 엄청난 양의 약품 냄새가 들이닥쳤다. 잠깐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것 같은 그 냄새가 준성을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한서가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빛을 담아 준성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준성을 냉랭하게 바라본다기보다, 그의 얼마 되지 않는 감정 모두가 폭설이라도 맞은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가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딱히 밖의 연구실이 ‘가짜’라는 건 아니지만, ‘진짜’인 것도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준성은 의아한 얼굴로 물음을 던지며 밖의 연구실을 떠올렸다.
연구실의 안면인식 장치는 극히 일부의 연구원들로만 뚫을 수 있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퍼지던 그때 당시 살아남은 사람 중에 그게 가능한 자는 준성이 알기로 혈액원의 원장뿐.
아마 남기혁도 그걸 알기에 원장의 머리를 들고 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들어간 연구실에는 버젓이 바이러스 안정제 샘플과 연구자료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연구실이 ‘진짜’가 아니라고?
한서는 독한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실험 자체는 모두 밖의 연구실에서 진행된 게 맞으니까 거기가 ‘가짜’라고 볼 순 없잖아. 하지만 ‘진짜’ 자료가 보관된 건 이쪽이야.”
준성이 깜짝 놀라며 그가 가리키는 어두운 공간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긴 복도와 그곳의 좌우에 연결된 여러 개의 연구실 문이 한눈에 보였다. 그 구조는 안면인식장치를 뚫고 들어간 ‘밖의 연구실’과 완벽히 똑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웠지만, 더 중요한 건 다른 데에 있었다.
한서는 이곳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직접 그 스스로가 두 개의 인식장치를 순탄히 돌파해 보이기까지 했다. ‘관련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텐데.
한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준성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가 있는 만큼, 여긴 ‘죽은 자’가 지나갈 수 없어야 했거든.”
준성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간 그의 손이 준성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원장의 잘린 머리가 떠올라, 준성이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죽은 자…라고?’
안면인식 장치는 죽은 사람의 얼굴이라 하더라도 부패되거나 손상이 많지 않은 상태라면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문을 열어준다.
하지만 흔히 스마트폰에 내재된 것과 같은 전기장 반응 방식의 지문인식장치는 죽은 자의 지문을 인식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가락에 흐르는 미세한 전기장 반응으로 지문을 인식하기 때문에 ‘생체’가 아니면 효과가 없는 것이다.
또한, 홍채인식 장치는 적외선을 비춰서 동공을 수축시키고 이에 반사된 홍채를 인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죽은 자는 당연히 동공을 수축시킬 수 없고, 만일 산 사람에게서 적출해서 사용한다 해도 신경이 끊어진 안구로는 인식장치를 뚫을 수 없다.
두 장치 모두, ‘산 사람’만이 열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진짜 연구실이 있음에도 이를 눈속임할 다른 연구실을 만들어두고 이런 비밀통로에 까다로운 인식장치까지 둘이나 설치해 둔 이유가 무엇일까?
원장이나 연구원들을 죽인 누군가가 그들을 이용해서 인식장치를 돌파할 수 없게끔 하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비밀리에 불법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치안 좋은 한국에서 대뜸 연구원들이 죽어서 이용당할 것까지 고려하며 이런 복잡한 세팅을 해둘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좀비가 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대비하기 위해서였겠지.’
좀비가 되어버린, 즉, 죽어버린 사람들조차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안전한 연구실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백신이 될지도 모를 신약과 연구자료를 완벽히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한서는 생각을 정리하는 준성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서 손전등을 가져갔다. 맥없이 손전등을 빼앗긴 준성은 어느새 그의 손에 붙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말없이 걷는 한서에게, 준성이 그제야 물어야만 할 걸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 다 알아?”
한서는 여전히 대답 없이 걸었다. 준성은 그게 너무 답답해서 한서의 손을 뿌리치며 멈춰 섰다. 당연한 것처럼 한서 역시 멈춰 서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준성을 돌아보는 한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무감정해 보였다.
하지만 한서를 쭉 지켜봐 온 준성은 그 무감정해 보이는 무표정이야말로 그가 가장 ‘많은 감정’을 느낄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도한서.”
이름을 불린 한서의 눈이 손전등의 불빛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아른거렸다.
“혹시 너도… 이곳의 실험체였어?”
준성의 떨리는 물음에 한서의 한쪽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언젠가를 떠올리며 자조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