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회 -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야릇하게 올려다보던 남기혁의 얼굴을 떠올린 준성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친 새끼.’
지금도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자가 하필이면 미래의 일부를 아는 자였을 줄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기혁이라면 절대 그 힘을 선량하게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 200%쯤 이용하면 모를까.
남기혁 때문에 점점 열이 오르는 듯한 이마를 쓸어 식은땀을 훔쳐내었다.
남기혁의 본성을 모르던 시절, 누구보다 의지했던 그에게 꿈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자신이 뭘 찾아 헤매는지 말했던 적이 있다.
남기혁이 꿈을 얼마나 기억하는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가 처음으로 본성을 드러냈던 회차이자 자신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겼던 그 꿈을 알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무한한 회차를 반복하면서까지 좀비 사태를 해결할 열쇠를 찾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다.
결국 해결책을 찾아낸 남기혁은 그걸 이쪽 일행보다 일찍 가로챔으로써 미끼로 삼았다. 그가 유일하게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다시금 불러들이기 위해.
원래대로라면 해결책을 빼앗긴 시점에 좋든 싫든 그를 찾아가야만 했을 테지만…….
‘그게 네 크나큰 오산이야, 남기혁.’
지금의 준성은 남기혁의 낚시질에 어울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준성은 고개를 돌려 한서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걸고 있던 여유로운 미소마저 잊은 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그의 깊은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결책에 집착하던 건 꿈속에서였을 뿐이다.
지금의 강준성에겐 그런 일시적인 바이러스 안정제와 연구자료보다도 더욱 강하고 확실한 백신이 함께 있었다.
도한서를 정부라든지 높으신 분들의 손에 연구 재료감으로 넘겨줄 생각인 건 아니었다. 다만, 더욱 완벽한 해결책이 제 곁에 있음에도 굳이 미완성 백신과 연구자료를 되찾고자 남기혁에게 목을 내어주러 가는 건 미친 짓이다.
또한, 남기혁이 해결책을 미리 손에 넣은 건 비단 유인을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마도 큰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겠지.’
갑작스러운 좀비 사태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정부와의 이기적인 거래.
혹은 미완성이긴 해도 좀비 바이러스를 억누를 수 있는 100개의 안정제를 이용한 고위 인사들에 대한 협박과 갈취가 진짜 목적일 것이다.
누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재난 상황을 이용한 장기매매 조직에 뛰어든 것만 봐도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앞날이 뻔했다.
준성은 그런 놀음에 발끝도 담그기 싫었다.
생각을 정리한 준성이 일행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메시지까지 남겨놓을 정도라면 이 건물 안엔 없을 거예요. 어쩌면 인한시 밖으로 나가 있는 걸 수도 있고요.”
말하면서도 스스로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와 거래를 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선 인한시처럼 좀비로 그득한 위험지역보다는 한층 안전한 곳에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딜(Deal)을 해야 한다. 위험지역이라면 거래 상대가 움직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남기혁도 내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걸 알고 찾으러 오라는 것처럼 영상을 남긴 거겠지.’
순간 열이 받아서 이를 꽉 물었다.
생각해보면 남기혁은 그가 직접 잡으러 오는 것도 좋아했지만, 자신에게 쫓기는 것 또한 좋아했다.
트라우마에 둘러싸여 스스로 바닥을 기어 좀비에게 죽임을 당했던 꿈의 다음 회차.
분명 새로운 꿈에서는 처음 만나는 것일 텐데도 자신이 반쯤 넋이 나가서 그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갔더니만 그런 말을 해댔다.
-날 잡으러 온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존나 짜릿한데?
-그런 돌아버린 눈으로 달려들면 죽어주고 싶어지잖아.
-더 도망쳐볼걸. 어디까지 쫓아오나 보게.
다음 회차도, 그다음 회차도.
남기혁은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말을 읊었다.
물론 남기혁으로서는 그때 처음으로 내뱉은 말들이었을 테지만, 준성에게는 그 말들이 마치 나긋나긋한 ‘저주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전 회차의 복수라든지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행위라는 생각보다도 그 말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기 위해 남기혁을 거듭 죽였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으슬으슬 떨리는 팔을 손으로 쓸며 뒷말을 이었다.
“그놈은 미친 살인마예요. 해결책이 중요하긴 하지만… 죽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그게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미친 살인마’라는 말에 딱딱히 얼굴을 굳히던 창민이 이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창민이 준성을 더욱 따랐던 건 그가 자신을 구해줬기 때문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발견했어야 할 해결책 탓도 있었다. 국가와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끔 교육받은 그로서는, 설령 좀비에게 물어뜯겨 죽더라도 이 사태를 끝낼 수단을 국가 기관에 전달하겠다는 목적이 컸다.
“필요하긴 해도 꼭 저희가 들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준성은 남기혁이 들고 있던 연구자료를 떠올리며 말했다.
“바이러스 안정제와 연구자료…. 그게 가장 절실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해요?”
“한국이겠지.”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투로 말하니,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걸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거래하려 들만한 곳은요?”
“그것도 당연히 한국……. 아…!”
창민이 뒤늦게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창민이 말한 것처럼 바이러스 안정제와 연구자료가 가장 필요한 곳은 당장 이 재난을 멈춰야 할 한국이다. 나라가 통째로 좀비 소굴이 되어 멸망하는 것보다는 대가를 얼마나 치르더라도 해결책을 손에 넣어 국민을 구제해야만 했다.
그토록 절실하기에 한국은 어떻게든 남기혁과 빠른 거래를 하게 될 것이다. 타국이 구제 명목으로 선 넘는 간섭을 해오기 전에.
이러나저러나 준성이 바라던 대로 해결책은 정부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목숨 걸고 남기혁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자신들은 독실한 애국자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니까.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예요.”
그렇게 말하며 CCTV 속 남기혁을 다시금 노려보았다.
꿈속에서처럼 그의 손에 놀아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다짐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보안실을 나온 일행의 대열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가장 앞에는 창민이, 뒤로는 경오와 지안이 섰고 다음으로는 준성과 한서가 걸었다. 즉, 선두에 섰던 준성의 위치가 뒤쪽으로 변경된 것이다.
“진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상냥한 미소를 건 창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도 혈색 안 좋은데 언제 픽 쓰러질까 몰라서 괜히 신경 쓰이거든. 길이라면 오면서 표시해둔 대로 잘 찾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민하던 준성은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선두에 선 자가 가장 긴장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뿐이고, 어디선가 좀비나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긴장을 풀어둘 순 없다. 일단은 ‘변수’가 지나갔던 길이기에.
그런 긴장 상태를 아지트에 돌아갈 때까지 쭉 이어가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바로 직전에 쓰러져버렸던 사람에게 선두로서의 압박감을 주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준성은 만에 하나 변수로 인해 일행이 흩어지거나 따로 움직이게 되더라도 나갈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도록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 증거로 그들이 선 일직선의 복도에는 드문드문 주황색 껍데기 같은 게 떨어져 있었다. 위급할 때 쓸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재료로 삼았던 주황색의 탁구공 조각이었다. 그걸 따라가다 보면 준성처럼 이 안의 길을 외우고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혈액원 로비로 향하는 계단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선두의 창민에게 손전등을 준 채 반강제로 대열의 후미에 선 준성은 재차 자신의 몸 상태를 신경 써주는 지안과 제법 든든하게 무기를 고쳐 쥐는 경오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들의 배려심 덕분에 불필요한 긴장이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준성아.”
뒤에서 들려오는 한서의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서는 그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 똑같아 보이는 하얀 벽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새끼가 가져간 해결책……, 그 연구자료 안에 핵심이 빠져 있다면 거래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뭐?”
준성이 눈가를 찌푸리며 멈춰 섰다. 그러다 앞에서 걸어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한서가 고개를 숙여, 준성의 귓가에 무심하게 속삭였다.
“연구자료에 기재된 내용은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것들뿐이야.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테스트 몇 번 해보면 속이 비었다는 걸 금방 알게 될걸.”
멈춰 선 준성은 아예 한서를 향해 몸을 돌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을 비추는 손전등의 어렴풋한 불빛 사이로 한서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알고 싶어?”
“그래.”
작은 미소를 건 한서가 준성에게 손전등을 내밀었다.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물음표를 띄운 채 그의 손전등을 받아들자, 갑자기 한서의 팔이 준성의 허리에 휙 감겼다.
갑작스레 끌려가서 한서의 품에 안겨버린 꼴이 된 준성은 그가 새하얀 복도 벽을 짚는 걸 보았다. 짚은 곳에는 얼핏 보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직사각형의 홈이 새겨져 있었다.
성인 남자의 손바닥보다 아주 약간 큰 사이즈의 직사각형 안에 한서의 오른손이 완전히 짚어진 순간, 그 안에서 희미한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삑-
짧은 기계음과 함께 벽이 홱 돌아갔다. 복도로만 구성되어 있는 줄 알았던 벽이 회전문처럼 180도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너머에 웬 검은 공간까지 있다.
한서는 준성이 놀란 소리를 내뱉기도 전에 그를 끌고서 벽 너머로 들어가 버렸다.
벽이 문의 역할을 하며 180도 돌아가는 걸 뒤늦게 알아챈 창민과 경오, 지안이 준성과 한서를 향해 뛰어가며 손을 뻗었지만, 두 사람은 벽 너머로 완전히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준성과 한서를 삼킨 벽은 복도의 세 사람을 무시하듯, 일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