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76)화 (76/240)

- 76회 -

순간 비틀거리는 준성의 몸을 한서가 뒤에서 붙잡아 지탱해주었다. 한서가 뒤에서 껴안듯이 끌어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을 것이다.

그새 숨소리가 거칠게 바뀌어버린 준성은 손전등에 의지한 어둑한 공간 안에서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었다.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초조하게 준성을 바라보는 가운데, 오로지 그만이 CCTV 속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려운 듯이, 원망스러운 듯이.

쉽사리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숨만 몰아쉬고 있던 준성은 남기혁이 렌즈 너머에서 입을 달싹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

-준성아, 사랑해.

음성 따윈 전혀 녹음되어 있지 않았지만, 남기혁의 입 모양만 보고도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흡-!”

남기혁의 목소리를 떠올려버린 준성은 갑자기 강한 힘에 목이 졸려버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호흡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헉헉거리며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던 준성의 다리가 맥없이 풀려버렸다.

“준성아!”

“오빠, 괜찮아요?!”

창민과 지안이 당황하며 준성에게로 손을 뻗었다. 한서는 그런 그들을 만지지 말라는 듯이 매서운 눈초리로 만류하며 준성을 한쪽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선 급히 준성의 부릅뜬 눈을 다른 손으로 가려주어 시야를 차단했다.

“당장 화면 돌려요. 빨리.”

“어, 으응!”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던 경오가 한서의 낮고 거친 목소리에 움찔하며 화면을 돌렸다. CCTV의 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금세 사라져, 텅 빈 어둑한 공간만을 비추었다.

한서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준성의 몸을 끌어안은 채,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었다. 깜빡이지도 못하고 부릅뜬 눈동자를 떨고만 있는 준성과 시선을 맞대었다.

“강준성. 날 봐.”

분명 시선을 맞대고 있음에도 준성의 눈동자가 눈앞에 없는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직감한 한서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똑바로 안 보면 물어뜯어 버릴 테니까 나 보라고.”

한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바들거리며 떨리던 준성의 눈동자가 차츰 초점을 되찾아갔다.

“아….”

작은 신음과 함께, 내쉴 줄 모르던 숨이 조금씩 색색거리며 흘러나왔다. 한서는 그런 준성이 좀 더 안정적으로 호흡할 수 있도록 함께 주저앉아, 그의 몸을 비스듬히 눕히듯 등을 받쳐 안았다. 고개를 조금 젖혀서 기도를 열어주니 숨도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준성의 발작은 짧게 끝이 났다. 한서가 빠르게 대처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남기혁의 얼굴을 본 게 면대면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찍힌 CCTV 영상에 불과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준성은 잠시 눈을 꾹 감은 채 한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남기혁의 등장으로 인해 머릿속에 들어찬 정보와 가설들을 다시금 다듬어볼 필요가 있었다. 손끝이 떨리고 숨소리가 거친 건 여전했지만, 머릿속은 점차 차갑고 냉정하게 바뀌어 갔다.

안정된 모습으로 눈을 뜨자, 그제야 한시름 놓은 창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는 놈인 거지?”

낯빛을 살피며 묻는 창민의 말에 준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식은땀이 배어난 싸늘한 이마를 짚은 채, 일행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남기혁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남기혁…이에요. 꿈속에서 만났던 연쇄 살인마……, 아니, 그냥 살인광이죠.”

자신이 겪었던 모든 걸 이 자리에서 설명해 줄 순 없지만 짧고 굵게 단 한 가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었다.

“제가 말했던 ‘변수 덩어리’가 바로 저놈이었네요.”

“너처럼 예지력을 가졌다는 그 장기매매 조직 보스?”

창민이 크게 놀란 눈으로 CCTV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느새 경오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텅 빈 CCTV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 다시 그놈 나오는 곳으로 돌려줘요.”

“괜찮겠어?”

경오보다도 한서가 먼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준성이 한서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직 떨림이 가시지 않는 건지, 한서에게 붙잡힌 손이 무의식중에 바들거리고 있다.

준성의 단호한 눈을 확인한 경오는 그제야 녹화영상을 다시 되돌리기 시작했다. 보안업체에서 근무하던 경오에게 있어 CCTV 조작과 영상확인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원장의 머리를 쥔 채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다시금 CCTV 화면에 잡혔다. 덕분에 모두가 그의 얼굴을 익히는 데엔 충분했지만, 준성은 또다시 트라우마가 툭툭 건드려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 언저리를 짚었다.

사랑 고백을 하는 남기혁의 입술을 피해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본 준성이 입을 열었다.

“바이러스 안정제와 관련 연구자료는 남기혁이 들고 갔어요.”

이젠 피도 떨어지지 않는 원장의 머리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지만, 준성은 남기혁의 반대쪽 손에 주목했다.

남기혁의 한 손에는 두툼한 서류가 들어있을 서류봉투와 함께 검은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시작품으로 만들어진 미완성 백신, 바이러스 안정제가 100개 보관되어 있어야 할 보관함이 텅 비어있는 거로 보아, 그 쇼핑백 안에 모두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왜 가져갔을까?”

창민이 의문을 담아 말하며 CCTV 속 남기혁을 노려보았다.

“절대 좋은 방향으로 미완성 백신을 쓸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맞아요.”

준성 역시 창민과 같은 생각이었다.

남기혁은 원래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 같은 게 아니었다. 최소한 준성이 꿈속에서 그를 만나는 동안에는 그랬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강함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처럼 좀비 바이러스가 가득 찬 세상이라서였다. 좀비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더욱 강한 자에게 붙어서 무리를 짓는 게 생존확률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남기혁은 꿈속의 그와 달리 웬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 같은 게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그 꿈의 일이 현실이 될 거라는 걸 알았던 거지.’

남기혁이 꿈을 기억하고 그걸 예지몽이라 믿게 된 건 언제일까.

그건 남기혁만이 아는 사실이겠지만, 만약 예상대로 그가 일찍부터 꿈속의 일이 현실이 될 거라 알고 있었다면 미리 조직을 구성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이미 있던 장기매매 조직에 쳐들어가서 내부를 뒤엎고 자신이 보스가 된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남기혁은 오늘날의 좀비 사태를 예견했고 이를 이용해 손쉬운 장기매매 수단을 짜놓았다. 위기 속에서조차 비인간적인 형태로 돈을 수급하려는 그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그런 자가 백신을 만들기 위한 바이러스 안정제와 연구자료를 가져갔다. 그것을 이용해 비열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사용했지, 절대 좋은 일에 쓸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그는 CCTV를 통해 일부러 자신의 얼굴을 남기고 버젓이 물건들을 들고 있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준성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남기혁의 메시지였다.

이 좀비 사태를 종식시키고 싶다면 자신을 찾으러 오라는, 준성을 향한 메시지.

남기혁은 준성이 이곳에 올 것까지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해결책을 찾아 움직이던 루트에는 남기혁이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머릿속이 금세 엉망이 되듯 복잡해져 버렸지만 쉽사리 답이 나올만한 게 아니었다.

준성은 깊은 고민을 차치하고서 일행을 돌아보았다.

“남기혁이 바라는 건 우리가 그를 찾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거지? 정확히는… 네가 여기 올 거라는 걸.”

남기혁에 관한 설명이라고는 준성이 말했던 ‘현실의 변수 덩어리’와 ‘예지력을 가진 장기매매 조직 보스’라는 것뿐이었지만, CCTV에 나온 그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그 역시 남기혁의 입 모양을 보고 그가 누굴 향해 메시지를 남긴 건지 어렵잖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광기 서린 눈이 묘한 희열과 애정을 함께 담고 있다는 것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창민이 긴장한 얼굴로 보안실 문을 노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준성을 포함한 다른 이들 모두 매복은 없을 거라 장담했다. 언제 누가 찾아올지도 모르고 볼일도 끝났는데 굳이 인력을 놔둘 필요가 없다는 것에서였다. 그들이 같은 인간들을 굳이 적대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고.

사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됐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찾아왔던 건 준성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변수 덩어리’가 누구인지 파악해둬야죠.”

준성은 이 연구소의 CCTV가 비상전력을 통해 움직이는 것 중 하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원장의 머리를 잘라내어 연구소를 침입했을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에 집중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다는 준성의 말에 다른 일행 역시 동의하는 바였기에 모두가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그들의 잔당이 하루가 지난 이 시점에 남아 있을 리도 없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명백히 준성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가 보란 듯이 메시지를 남길 정도라면 어딘가에 매복이 있을 만도 했다. 자세한 연관 관계까진 아직 모르겠지만, 상대 역시 준성이 미래를 안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한 듯하니까.

창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준성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긴장을 풀어주었다.

“괜찮아요. 그 남자라면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을 거예요.”

준성은 어느새 CCTV 속 남기혁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중요한 건 모두 자기 손으로 하려고 하거든요.”

준성의 손이 그의 목을 쓸었다.

남기혁에게 잡혀 있을 때, 그 누구도 자신에게 손대지 못하던 나날을 떠올렸다.

그는 준성의 목을 조를 때도, 막힌 숨을 되돌려줄 때도.

심지어 준성이 남기혁의 목에 칼을 박아넣을 때조차 그에게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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