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회 -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장치 앞에 선 경오는 가장 먼저 겉을 감싸고 있는 케이스를 능숙하게 떼어냈다. 준성이 손전등으로 밝게 비춰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보기도 전에 케이스의 나사가 어디쯤 있을지를 일찍이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기계 분해와 개조, 조립에 관심이 많던 황경오다웠다.
케이스를 벗겨내자 아직까지도 빛을 내고 있는 렌즈 아래로 무수히 많은 전선, 그리고 녹색 기판에 붙어 있는 부품들이 보였다. 준성이나 다른 사람들로서는 뭘 어떻게 손대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할 내용물이었는데, 역시나 경오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경오가 장치를 건드리는 동안, 창민은 복도뿐인 뒤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방 대신 미로 같은 복도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좀비든 사람이든, 예측 못 한 어딘가에서 불쑥 기습해올 것 같진 않았다.
굳이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일행의 뒤쪽으로 나 있는 일직선의 복도 끝 모퉁이 정도일까. 그 모퉁이도 거리가 좀 있어서 지금처럼 뒤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대응 가능할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상대에게 원거리 무기가 없을 때의 얘기지만…….’
복도 끝, 철문을 앞에 둔 일행은 어찌 보면 막다른 골목에 있는 셈이었다. 이럴 때 투척용 무기도 아니고 무려 총을 상대로 맞서야 한다면 이쪽이 굉장히 불리했다.
준성이 준비해준 재료로 만들어둔 ‘그것’이 열 개가 넘도록 있긴 했지만, 그리 폭이 넓지 않은 복도를 생각하면 그 물건 하나로 모두가 안전할 방법은 거의 없다.
한서도 같은 생각인지, 가장 뒤에서 손전등을 들고 있던 그가 복도 끝을 비추며 경계하고 있다.
문득 한서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있었는데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눈빛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 그건 마치 태연한 척도 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태가 안 좋은데.’
창민은 한서가 좀비들과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그가 상당히 몸을 잘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과 지안을 구할 때도 그렇고 황경오를 구출할 때도 구름다리에서 아예 좀비로 작은 산을 쌓아둔 것까지 보았다. 어제는 준성과 단둘이 백화점까지 뚫고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기까지 했다.
준성 말로는 백화점 안에 좀비가 많지 않았고 안전한 돌입 루트도 알고 있었으니 거의 싸울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건물 내부가 그렇다는 거고 오가는 길까지 평탄한 건 아닐 터였다. 마른 체구로 거침없이 잘도 싸우는 건 준성만큼이나 한서 역시 든든한 실력자인 건 확실했다.
그런 그의 컨디션이 저토록 안 좋다는 건 창민으로서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한서에게 다가간 창민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너?”
깊이 가라앉아 있던 한서의 눈이 창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처럼 금세 싸늘한 냉기를 두른 눈동자가 손전등의 불빛에 약하게 타오르듯 일렁거렸다.
“왜요?”
짧은 존댓말과 함께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대체 무슨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건지, 입가가 칼날 같은 일직선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아챈 듯했다.
평소처럼 변해버린 한서의 얼굴은 더 이상의 질문을 원치 않고 있었다. 만약 더 파고든다면 그의 눈빛을 닮은 서슬 퍼런 무언가가 목을 통째로 갈라버릴 것 같은 섬뜩한 느낌까지 들었다.
창민은 저도 모르게 목을 손으로 한차례 쓸어보았다. 한서의 눈동자에 아까의 이상한 기색이 남아 있었음에도 왠지 그걸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눈을 돌려 외면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는 사이, 경오가 거의 해부 중이던 안면인식 장치에서 짧은 기계음이 들렸다.
“됐……! 흠흠, 됐어.”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칠뻔한 경오가 얼른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줄였다. 그래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것에 신난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는지, 공구를 집어넣는 중에도 싱글벙글한다.
느릿하게 열리는 철문을 보며 준성의 바로 뒤에 선 창민이 그 너머를 주시하며 쇠파이프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쩌면 안에 총을 든 놈들이 있을지도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럴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준성의 예측대로 장기매매 조직 보스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바로 어제 동료들을 이끌고 여길 다녀갔다면, 언제 올지 모를 자신들을 기다린답시고 여기에 죽치고 있을 리가 없다. 굳이 기다려서 죽이려들 필요도 없고.
게다가 준성이 말하길, 안면인식 장치를 열기 위해 원장의 머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 정도라면 이미 이 안에 있어야 할 해결책도 그들 손에 들어갔을 거라고 한다.
높으신 분과 거래를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든, 변수 덩어리가 부디 그 해결책을 제대로 이 사태를 막는 데에 써주길 바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렇게 그들은 해결책을 손에 넣은 시점에 이미 볼일이 모두 끝났을 테고, 그런 곳에 아군을 기약 없이 놔둘 바보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창민 역시 준성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구태여 위험을 경고한 건, 왠지 모르게 퍼져 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한서의 이상한 상태에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네. 충분히 경계하면서 갈게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며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좌우로 열리는 철문 너머를 응시했다.
인한혈액원 내부의 지하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혈액연구소.
그곳은 사실 한 제약회사와 남몰래 손을 잡고서 다양한 약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혈액원을 통해 실험용 혈액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었던 연구소 지하에선 이를 이용한 다양한 항체 개발 및 실험이 이루어졌다.
단지 그뿐이라면 연구소든 제약회사든, 그토록 비밀리에 은밀히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인간 실험.
동물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결과를 도출하고 집착적인 연구를 이어나갔다.
실험에 쓰인 인간의 대부분은 노숙자들이었다. 합법적인 임상시험인 척,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꼬임으로 그들을 데려간 연구원들은 분명 처음엔 안전하고 상냥한 실험을 진행했으나, 점점 비인도적으로 변해갔다. 몸 어딘가가 이상해진 것 같다고 호소해도 그들은 차가운 눈으로 오직 실험에 집중할 뿐이었다.
실험체들을 위한 방이 꽉 들어찼다가 몇 개가 비고, 이어서 다시 꽉 찼다가 비길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신약 개발 중에 나타난 괴이한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가 침투되면 체내의 혈액이 급속도로 응고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응고되던 피는 역류하듯 머리로 집중되는데, 이때 극심한 안압으로 인해 눈과 입에서 다량의 피를 쏟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가 눈동자를 뒤덮은 채 그대로 응고되어, 얇은 핏빛 막이 생긴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굳어가며 이동한 혈액은 머리를 가득 채우고 그대로 뇌를 감싸 ‘정지’시킨다.
즉,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침투율에 따라 늦어도 15분, 빠르면 고작 1분 내외로 사망하게 된다.
단순히 사망하게 되는 것뿐이라면 그리 무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무서운 점은 응고된 혈액에 퍼져 있는 바이러스가 숙주의 뇌를 한 번 죽인 후, 그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조종한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본능에 의해 그들이 ‘번식’하기 위해서.
침투한 숙주와 같은 동족, 인간을 감염시키려는 본능이 죽은 자의 뇌를 조종해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바이러스를 침투시키기 위해서는 피부를 뚫고 그 안에 체액을 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바이러스에 걸린 자들은 체액을 강제로 밀어 넣기 위해 인간의 살점을 물어뜯는 방법을 취했다.
그것은 흡사 ‘좀비’와도 같았다.
신약 연구 중에 발생한 좀비 바이러스의 출현.
애석하게도 그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본능의 바이러스가 눈을 뜰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랬기에 실험체의 구속을 위한 가죽띠 정도로도 충분히 대처가 될 줄 알았다.
애초에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바이러스의 출현에 당황한 것도 잠시.
연구원들은 급히 바이러스 및 백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 바이러스와 백신을 이용해 떼돈을 벌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푹 빠져버린 제약회사의 압박 때문이었다.
첫 바이러스 감염자가 생긴 지 일주일째 되던 날.
한 연구원이 구속하던 가죽 띠만 믿고서 잠시 방심한 틈에 그만 실험체에게 물려버리고 말았다. 얼마 가지 않아 연구원에게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다 곧 실험체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날뛰다 못해 동료였던 다른 연구원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구소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체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 안에서 물린 채 도망쳤던 연구원 한 명을 시작으로 인한시의 평화롭던 나날이 단번에 뒤바뀌고 말았다.
준성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마지막 회차.
바이러스의 출현과 함께 그걸 억누르는 안정제에 관한 정보를 얻은 준성은 이윽고 그 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곳 혈액연구소 지하에서.
하지만 역시나 연구소 안은 좀비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휑했고, 개발 중이던 백신이나 다름없던 바이러스 안정제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역시나 원장의 머리를 베어갔던 그들이 가져간 게 분명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럼에도 준성이 굳이 이 연구소에 온 건 이유가 있었다.
“…….”
연구소 지하의 보안실.
비상전력을 이용해 가동하고 있던 CCTV를 확인하던 준성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의 숨소리가 바뀐 기색에, 이전까지 녹화된 영상 중 일부를 돌려서 보여주던 경오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 됐다.
“왜, 왜 그래?”
경오의 물음에도 준성은 눈을 크게 부릅뜬 채 그저 입술만 떨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숨소리 대신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준성이 바라보고 있는 CCTV 화면 속.
그곳에는 일부러 CCTV에 얼굴이 잘 나올 수 있도록 의자 위에 선 채 렌즈를 향해 씩 웃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손에 원장의 머리만 없었더라면 그저 해맑은 남자네, 하고 넘겼을지도 모를 해사한 얼굴이었다.
준성의 입술이 덜덜 떨리며 달싹거렸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한서는 언제 쓰러질지 모를 듯한 위태로운 모습의 준성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기혁….”
준성의 힘겨운 숨소리를 담은 누군가의 이름이 한서의 귀에 강하게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