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회 -
건물을 바라보고 있던 한서의 눈동자가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처럼 준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 찰나 동안 어느새 감쪽같이 변해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능글맞은 평소의 눈빛으로.
그렇다고 해서 방금 봤던 이상한 눈빛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여기에 네가 말한 그게 있다는 거지?”
입을 다물어버린 준성을 향해 창민이 물었다. 그제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둘뿐만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요. 혈액원 뒤로 보이는 저 연구소 안에 ‘있어야 할’ 거예요.”
준성의 뒷말이 꽤 씁쓸했다.
변수 덩어리인 장기매매 조직의 보스가 굳이 원장의 머리를 가져간 건 분명 그 해결책을 얻기 위해서일 거다. 그렇다는 건, 이미 준성이 꿈속에서 만났던 해결책 자체가 이 안에 없을 가능성이 컸다.
준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지안이 물었다.
“그 사람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잖아요. 그럼 굳이 여길 와볼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니에요?”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100%는 아니잖아. 해결책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것도 확인해야 했거든.”
그렇게 말한 준성이 경오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도구는 다 챙겨오셨죠?”
“으응, 일단 그렇긴 한데…….”
경오가 긴장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내가 하, 할 수 있을까? 내가 수리했었던 건 3년 전이고… 엇비슷한 장치였을 뿐인데.”
경오는 좀비들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보니, 아무래도 어깨가 무거운 듯했다.
“괜찮아요. 만약 장치를 해제할 수 없다고 해도 다른 부분에서 도와주시면 되니까요.”
“그, 그래. 안면인식 장치는 몰라도 다른 쪽은 걱정할 거 없어. 그쪽이야말로 내 전문분야니까.”
자신감을 보인 경오가 배시시 웃었다.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인지, 그가 앞서 걸으며 재촉했다.
“빨리 가자. 이따가 비도 온다며.”
경오가 혈액원 뒤쪽의 건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빠른 보폭으로 두어 걸음 내딛는데, 준성이 말로 그를 막았다.
“아저씨, 그쪽이 아니에요.”
“응? 해결책이 있는 건 저 건물이라며?”
“그건 맞지만 겉으로 보이는 입구는 전부 페이크(Fake)거든요.”
준성이 검지 끝으로 눈앞의 혈액원을 가리켰다.
“여길 통해서 가야만 제대로 된 길이 나와요.”
해결책이 있는 비밀공간까지의 길은 혈액원 원장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한참 헤매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저히 찾지 못했을 거다. 마지막 회차였긴 해도 꿈속에서 원장을 따라 올바른 길을 찾아서 기억해둔 게 천만다행이랄까.
“길은 제가 기억해두고 있어요. 초입에 좀비의 수가 꽤 많았으니까 다들 긴장해두세요.”
마지막 꿈속에서 혈액원 내부를 걸어가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많은 수의 좀비로 인해 두 명의 동료를 잃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처럼 되지 않도록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돌입 시간까지 맞춘 준성이 딱딱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열의 가장 앞엔 준성이 섰다. 그 뒤로 창민, 경오, 지안이 섰고 마지막으로는 한서가 뒤따랐다. 혈액원 안의 그리 넓지 않은 복도라든지 계단 등을 고려하면 소수 인원 기준으로 일직선 대열이 가장 알맞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런 대열을 고집한 건 한서 때문이 컸다.
좀비들은 한서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니, 공격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가장 뒷자리가 아니면 한서를 향한 좀비의 이상 행동을 누군가가 알아챌 위험이 있었다. 한서는 준성의 바로 뒷자리가 아니란 것에 상당히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래도 대열을 이렇게 꾸린 것의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굳이 입을 열어 볼멘소리를 내뱉진 않았다.
대열을 만들고 각자 손에 든 무기를 고쳐 쥔 일행은 곧 혈액원 안으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혈액원의 유리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봤던 것처럼 어두컴컴한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이곳 역시 전기가 끊어졌지만 군데군데 불이 들어오는 기계나 활발한 비상등으로 보아, 아마도 비상전력이 돌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 비상전력이 주변을 밝히는 전등 쪽으로는 전혀 쓰이지 않는 것 같지만.
준성은 두 개뿐인 손전등 중 하나를 들고서 정면을 비췄다. 그를 따라 가장 후미에 있던 한서 역시 손전등을 켰다.
로비가 쥐죽은 듯 고요하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곳곳에 시체가 가득했다.
‘좀비였던’ 시체를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확인한 준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널브러진 좀비들이 자신들을 공격해올 첫 번째 좀비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손상당한 채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 꿈틀대는 자가 없다. 시계를 통해 시간을 비교하며 확인해봐도 꿈속과 확실히 어긋난다.
‘역시…….’
예상한 대로 변수 덩어리 쪽 무리가 이곳을 지나간 게 분명했다.
“준성아, 이것 좀 봐.”
창민이 근처에 쓰러져 있는 시체의 뒷머리를 가리켰다. 작은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머리 일부가 터져 있고, 끔찍하게도 뇌 조각이 근처 머리통에 점점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창민이 부른 건 준성이었지만, 궁금함을 못 이기고 시선을 돌렸던 지안과 경오가 그 끔찍한 장면에 급히 숨을 삼켰다.
머리가 박살 난 시체를 보는 게 처음일 리 없던 준성은 냉정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때맞춰 창민이 말했다.
“총에 맞은 흔적이야.”
정확히는 이마에 총을 맞았고, 그 충격이 뒤통수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의 머리는 총에 맞으면 맞은 자리엔 꿰뚫린 흔적 정도밖에 남지 않지만, 총알이 튀어나가는 반대편은 두개골이 깨지면서 마치 폭발한 듯한 충격이 남게 된다. 그렇게 뻥 뚫려버린 자리 주변엔 두개골 안에 안전히 보관되어 있었을 뇌의 일부라든지 두개골 파편 등이 산재한다. 뚫린 곳을 통해선 피에 절은 사람의 머릿속 일부가 보이기도 한다.
꿈속에서 흔하지 않긴 해도 몇 번 보긴 했던 모습이라, 준성은 약간 파리한 안색으로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건 총에 맞은 시체의 끔찍한 몰골 때문이 아니라 그게 말해주는 바가 워낙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그 변수들…, 총을 갖고 있네요. 그것도 한둘이 아니겠어요.”
준성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다.
칼, 쇠파이프, 각목, 삽이나 공구 등, 손으로 직접 휘두르는 무기를 든 상대라면 차라리 낫다. 어차피 육탄전인 건 똑같으니까 만에 하나 그들이 같은 인간인 자신들을 공격하더라도 대응해볼 만했다.
하지만 이처럼 ‘총’을 든 상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원거리 살상 무기인 총 앞에서 근접전용 둔기나 칼 같은 건 굉장히 불리했다. 공격하려는 순간 총에 맞아 곧바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그들과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 소수 인원인 데다가 근접형무기뿐인 이쪽은 그들의 총에 대응할 방법이 거의 없다.
상대는 같은 인간인 생존자들을 고작 ‘신선한 장기를 보관 중인 고깃덩이’로밖에 보지 않는 자들이다. 하물며 잔인하게 사람 머리를 잘라 들고 가고, 그도 모자라 그의 가족들을 죽여서 무슨 장식품 만들 듯 다듬고 가기까지 했다. 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면 이쪽 또한 그들과 같은 꼴이 될 가능성이 컸다.
‘최악의 상황이야.’
좀비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에 오한이 들고 몸서리가 쳐졌다.
로비의 시체들은 얼핏 보아, 대부분 머리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칼에 머리를 손상당한 이들도 있었는데, 어쩌면 원장의 머리를 베어 간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로비를 지나, 으슥한 복도에 들어섰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지나,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준성의 뒤를 따르던 일행은 주변의 고요한 참상을 보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가는 길목에 있는 거라고는 전부 시체뿐, 마구 움직이며 달려드는 좀비들이 아니었다. 좋든 싫든 이곳을 먼저 다녀간 자들 덕분에 목숨의 위협이 덜해진 꼴이라, 입 안이 쓸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 준성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확신이 들었다. 원장의 머리를 든 이들은 분명 이 길을 걸어갔고, 그들의 목적지는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해결책이 보관된 그곳이라는 걸.
준성의 뒤를 따르던 일행은 구불구불한 지하의 모습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혈액원에 지하가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1층과 달리 지하는 미로처럼 굉장히 많은 복도가 있었다. 그 하얀 복도는 오로지 ‘길을 혼란시키기 위해’ 만든 것처럼 일직선과 직각으로 구성된 갈림길투성이였고, 좀처럼 방과 연결된 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길을 준성은 마치 손바닥 위에 두고 내려다보는 것처럼 척척 걸어나갔다. 갈림길 앞에서 간간이 시계를 확인하는 거로 보아, 직각의 길 어딘가에서 좀비가 튀어나올 타이밍까지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나 좀비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갈림길 어딘가에 머리를 관통당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미로와 같은 길을 지나 준성이 멈춰 선 곳은 견고한 은색 철문 앞이었다. 그 옆에는 은은한 녹색 빛이 흘러나오는 사각의 카메라 렌즈 같은 것이 있었다. 연결된 바로 옆자리에는 숫자를 입력하는 자판도 있었다.
준성은 그걸 손전등으로 비춘 채 뒤를 돌아 경오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설 때예요.”
“응!”
고개를 크게 끄덕인 경오가 그가 멘 백팩을 내려놓았다. 경오는 그 안에서 웬 공구 몇 가지를 꺼내 들었다.
황경오는 꽤 비장한 얼굴로 양손에 공구들을 쥔 채 안면인식 장치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