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69)화 (69/240)

- 069회 -

‘설마 했는데 역시…….’

갑작스러운 괴성이긴 했지만 상황 자체가 그리 놀랍진 않았다.

준성은 아까의 시선이 좀비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 생존자가 있다면 그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 그대로 숨죽여 숨어있든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준성과 한서를 뒤쫓아오든가.

상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천만한 길을 택했다.

준성은 괴성 사이에 섞인 한 남자의 비명을 들으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런 준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한서가 붙잡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구하러 갈 거지?”

한서가 먼저 물었다. 그는 점점 늘어나는 괴성을 들으며 준성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준성은 밖의 소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새 바지에 다리를 넣고 있었다.

“왜?”

“왜냐니, 생존자니까 당연히 구할 거 아니야?”

한서의 의문 속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아는 강준성이라면 위험에 빠진 생존자를 모른 척하지 않을 텐데.

이에 준성도 그를 따라 하듯 의아함을 담아 말했다.

“왜 내가 구하러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태평하게 바지 버클을 채우는 준성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내가 구하는 생존자는 엄연히 ‘내가 아는 사람들’일 뿐이야.”

꿈속에서는 5일 뒤인 10일 차에 이 백화점을 찾아왔었다. 이번이 그때보다 일찍 찾아온 건 맞지만, 그전부터 준성의 지시에 따라 백화점을 주시하던 사람들 말로는 건물 밖으로 탈출한 사람은 전무하다고 했다.

즉, 저 생존자는 어차피 이곳에서 죽을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줄 여력 같은 건 없어. 구해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우리에게 득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사람 목숨을 이해득실로 따진다는 것 자체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황에서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지금과 같이 본인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에 누군지도 모를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아군이 열댓 명쯤 함께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전력 손실의 위험이 있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지만.’

준성은 꿈속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꿈속에 이제 막 적응해가던 초창기 때만 해도 생존자가 있다면 누구든 구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과 동료를 늘려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갔던 적이 많았다. 그로 인해 좋은 동료도 많이 만들 수 있었지만, 반대로 배신과 탐욕,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도 질릴 만큼 만나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준성은 자신이 만났던 이들을 마음속에서 명백히 구분 짓고 있었다.

착하지만 사리 분별이 정확한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이 사태를 어떻게든 끝내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 그 외에도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들.

반드시 구한다는 전제가 깔린 동생 강채이만은 예외였지만, 그 외의 타인은 모두 이용가치로 구분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고, 나아가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일도 배제할 수 있다.

그랬기에 준성은 꿈속의 일이 지금처럼 현실이 되어버린 순간에도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성의 차디찬 말에 한서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라면 나까지 내팽개친 채 구하러 갈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준성이 한서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툭 때렸다. 그의 맑은 눈동자가 한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판 모르는 타인과 너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너야.”

한서가 한층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성은 으슬으슬한 어깨를 쓸며 벽면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아까 우리를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을 구하게 된다면 네가 ‘백신’이라는 게 완벽히 드러날 수밖에 없어. 그건 곧 널 위험에 빠뜨리는 셈이야.”

피 묻은 코트를 걸친 준성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무심했다.

“내겐 다른 사람 목숨보다 네가 훨씬 더 중요해.”

준성의 말을 들은 한서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인도 알고 있는지, 한서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서창민이나 이지안, 황경오가 위험하다면?”

“그 사람들 얘기가 왜 나와?”

“대답해 봐. 그놈들이 죽게 생겼는데 구하려 들면 내가 위험해. 그럴 땐 어떻게 할 거야?”

한서는 감정을 숨긴 목소리로 물으며 준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의외로 준성의 대답은 빨리 튀어나왔다. 마치 생각해볼 게 더 있냐는 듯이.

“말했잖아. 다른 사람 목숨보다 네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그건 내가 ‘백신’이라서겠지? 내가 평범했어도 과연 네가 그렇게 생각할까?”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걸.”

준성이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바꿔서 생각해보려고 해도 백신이라는 요소가 도한서를 구성하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그렇다면 내가 세운 우선순위도 절대 변하지 않겠지.”

도한서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가정하에 그려보던 쓸데없는 시뮬레이션을 단박에 치워버린 준성이 태연하게 코트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물론 애초에 네가 위험해질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해야겠지만……. 도한서?”

준성은 한서가 어깨를 들썩거리는 걸 보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이 도한서의 머리에 닿으려는 찰나, 그대로 손목을 틀어 잡혀서 끌려가 버렸다.

한서에게 와락 끌어안긴 준성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준성의 귓가에 한서의 작은 욕설이 들려왔다.

“씨발.”

그걸 들으니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도한서는 좋아서 흥분했을 때만 욕을 하곤 하니까.

맞닿은 가슴과 한서의 거칠어진 숨소리 때문에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심장이 얼마나 가파르게 뛰고 있는지.

준성의 예상대로 한서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한서의 머리가 웅웅 울릴 정도로 요란하게 굴고 있다.

‘아, 어지러워.’

한서는 이때껏 종종 느껴왔던 빈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준성의 어깨에 기대었다. 심장박동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끼는 건 또 처음이라, 생소하면서도 헛웃음이 났다.

강준성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착해빠진 강준성은 어디까지나 한정적인 테두리 안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 외의 범위에선 더없이 냉정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수없이 겪었던 꿈속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이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모순된 이타심이 그를 더욱 신비롭게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준성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구하러 가는 시늉이라도 해야 정상일 텐데, 어째서 그토록 냉정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도한서는 그런 이타심을 티끌만큼도 이해할 수 없는 자였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자들은 이해가 안 되는 걸 넘어 혐오스럽기까지 했고, 살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며 울부짖는 자들은 길가의 개미들 짓밟듯 밟아주고픈 생각까지 들었다.

강준성은 그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도 모자라 계산이 깔린 적절한 이타심과 이기심까지 갖고 있었다.

‘차라리 그것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미치지도 않았을 텐데.’

작디작은 강준성의 테두리 안.

그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자신이었다.

“내겐 다른 사람 목숨보다 네가 훨씬 더 중요해.”

강준성의 흔들림 없는 그 말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심장을 따라 머릿속이 아프게 흔들렸다. 자꾸만 여러 갈래로 구성된 이성의 끈을 하나씩 하나씩 툭툭 끊어내는 느낌이다.

생존자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외면할 수 있는 강준성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지키는 게 이 엉망이 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사실 또한 기분 좋은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이대로 강준성의 목을 물어뜯어, 그 자리에 자신의 잇자국을 새겨버리고 싶을 만큼.

‘이걸 어떻게 참지.’

이 탈의실처럼 비좁은 공간에 가둬두고서 영영 자신만 볼 수 있도록 묶어두고 싶었다. 그렇게도 자신이 중요하다면 다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거칠게 망가뜨리고 싶기도 했다.

폭력적인 애정이 한서의 머릿속을 지배해갔다. 그를 따라 펄떡이는 고동이 맞닿은 가슴을 따라 준성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준성아.”

“응.”

거친 숨소리를 담은 한서의 부름에 준성이 짧게 대꾸했다. 그는 어느새 한서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밖에서 들리던 괴성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것은 멀어졌다기보다 한 명 한 명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챈 준성이 잠시나마 어두운 눈을 했다.

한서의 팔이 준성을 더욱 꽉 붙잡았다.

“나는…….”

부드러운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한서의 목소리가 준성의 귓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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