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8회 -
으어….
손전등의 빛이 닿은 곳에 있는 건 단순한 좀비들뿐이었다. 그 너머로는 다양한 스포츠용품들이 진열된 매장이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기분 탓…?’
보통 이럴 때 느끼는 건 기분 탓이 아니던데.
‘어차피 저긴 이따가 들러야 하니까 그때 다시 살펴보자.’
테니스라켓이라든지 스포츠화, 운동복 등엔 관심 없지만 상당히 유용한 물건이 있어서 이참에 들르긴 해야 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때 물건을 챙겨버리면 괜히 무거운 걸 들고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니 8층에서부터 차근차근 내려오려는 생각이었다.
다시금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8층에 다다른 준성과 한서는 가장 먼저 눈앞에 보이는 키즈매장을 지나, 각종 드론이 진열된 전자기기매장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준성은 이동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빛이라고는 고작 두 개의 손전등 불빛이 전부임에도 한서는 준성의 낯빛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래?”
한서가 묻자, 준성이 씁쓸한 얼굴로 손전등을 꽉 쥐었다.
준성이 비춘 손전등의 부채꼴 불빛 속에는 네 명의 키 작은 아이들이 있었다.
어디를 물어뜯겼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범벅이 된 어린아이들은 저마다 붉은 눈으로 준성 쪽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한서와 꼭 붙어 있기에 차마 다가오진 못하지만,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더없이 흉포한 모습이 되어 가느다란 괴성을 마구 질러대고 있었을 것이다.
준성은 저 어린아이들이 꿈속에서 얼마나 무섭게 변했었는지를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들이 각자의 부모와 함께 행복한 얼굴로 이 키즈매장을 둘러봤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일일이 애도하고 안타까워해 줄 순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뭘 한다 해도 이미 좀비가 되어버린 저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준성은 소태를 씹는 것처럼 씁쓸해진 입 안의 떨림을 삼키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함께 걷는 한서는 그의 반응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별다른 추궁 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좀비가 되어 서성이는 어린아이들 사이를 지나 전자기기매장에 다다른 준성은 여기저기 뒤져볼 것도 없이 단번에 배터리팩을 찾아내었다.
여분까지 생각해서 세 개를 챙겨 백팩에 집어넣은 준성은 바로 매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비틀거리며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계산을 담당하던 직원인 모양이었다.
준성은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뒀던 돈을 꺼내어 안쪽의 금고 옆에 내려놓았다.
“저번부터 생각했던 건데, 왜 돈 내는 거야?”
한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차피 상황이 이런데 누가 돈 내라고 하겠어? 주인과 직원들도 다 죽은 마당에.”
매정하지만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재난 상황에서 준성처럼 일일이 값을 치르고 물건을 가져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돈을 준비해뒀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쓸데없는 것까지 착해 빠지진 않아도 돼.”
“착해서 그런 거 아니야.”
방금 배터리팩 세 개 분량의 값을 정확히 올려놓은 사람의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준성은 그의 말마따나 본인이 전혀 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죄책감이 싫어서 그래. 상황이 어떻든 내가 도둑질했다고 생각하긴 싫거든.”
“아무도 비난할 사람이 없는데?”
“내가 나 스스로를 비난할까 봐 그러는 거야.”
준성이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남이 비난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비난하는 거거든.”
“흐음, 난 모르겠는데.”
한서는 준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준성이 착해빠진 거로 보였다.
“내가 너무 잘나서 날 비난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 너 잘났다.”
한서의 말에 픽 웃으며 대꾸하던 준성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한 층 아래인 7층은 남성복 매장으로만 이루어진 곳이었다.
휴대폰을 꺼내어 서창민과 황경오의 사이즈를 확인한 준성은 편해 보이는 셔츠와 와이셔츠 몇 장, 그리고 두 사람이 갈아입을 바지들을 챙겨 넣었다.
“우리 둘은 갈아입고 나가자.”
어차피 빨래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원래 입던 옷을 깨끗하게 다시 쓸 수는 없었다. 짐도 줄일 겸 이참에 아예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생각이었다.
준성이 자신의 사이즈를 금세 찾아서 손에 든 것과 달리, 한서는 그가 입고 있던 검은 목티만 하나 챙겼을 뿐이었다.
“바지는?”
“이런 데에선 못 사. 따로 주문해야 해.”
“까다롭게 굴지 말고 그냥 대충 입어.”
“길이가 안 맞는걸.”
준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한서를 노려보다가 그의 다리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길긴 기네. 짜증 나게.’
괜한 열등감과 함께 약간의 짜증이 몰려왔다.
매장 안에 있는 탈의실로 들어가던 준성은 자신을 뒤따라 들어오려는 한서를 손으로 막아섰다.
“너는 왜 들어와? 옆 칸 써.”
“나랑 떨어지면 좀비들이 달려들 텐데?”
“칸막이 때문에 어차피 안 보이거든? 어차피 넌 티셔츠 한 장만 갈아입으면 되니까 먼저 나와서 문 앞에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도 좁은데 뭐하러 둘씩이나 들어가냐며 먼저 문을 닫아버린 준성은 곧바로 코트를 벗었다. 벽면의 고리에 코트를 걸고서 옆 고리에 손전등 손잡이의 줄을 걸어 거꾸로 매달아두니, 그래도 그럭저럭 거울을 보며 옷을 탈의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뒤이어 셔츠와 바지를 벗은 준성은 드로워즈 한 장뿐인 알몸이 되었다.
‘으, 추워.’
백화점 안이라고는 해도 겨울 날씨인 데다가 히터도 돌지 않는 상태였다. 알몸이 되니 추운 건 당연했다.
미리 챙겨온 새 드로워즈로 갈아입고서 흰 와이셔츠를 집어 든 준성은 옷을 입는 내내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옆 칸에 한서가 있긴 하지만 그와 완전히 떨어져 있는 상태이니, 자연스레 좀비들의 행동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한서와 붙어 있다가 떨어졌을 때마다 찾아오는 불안감까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망할 도한서 후유증.’
온 신경이 좀비보다도 도한서를 더 찾는 기분이었다.
금단 현상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알 것 같던 준성은 갑자기 옆 칸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열 수도 있었을 텐데 뭔가 급한 사람처럼 벌컥 여는 바람에 준성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뒤이어 똑같이 급한 내색으로 문이 열렸다. 움찔하며 뒤를 돌아본 준성은 문을 활짝 열고서 자신에게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도한서를 볼 수 있었다.
“뭐해?”
“…….”
준성의 물음에 한서는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한서의 등 뒤로 그를 피해 배회하는 좀비들이 보였다.
바지도 없이 셔츠만 걸치고 있던 준성은 다급히 손을 뻗어 한서를 붙잡아 당겼다. 순순히 끌려온 도한서가 문을 닫았다.
“할 얘기라도 있어?”
소음을 낸 데에 핀잔을 주기보다는 한서의 급해 보이는 행동에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준성이 그와 밀착하여 소리 낮춰 물었다. 두 명이 움직이기엔 충분히 작은 공간이라, 두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가까이 설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한서가 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벽에 걸었다.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준성의 다 채워지지 않은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한서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옷 벗는 소리가 너무 잘 들리더라고.”
“그게 왜?”
준성이 묻자, 한서의 왼팔이 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그것도 셔츠 안쪽으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지듯 안고 있다.
추운 공기보다 더 차가운 한서의 손에 몸을 떨듯이 움찔하던 준성은 그의 목에 닿는 따뜻한 숨이 닿는 걸 느꼈다. 아직 채우지 않은 두 번째 단추 사이로 파고든 한서의 입술이 도드라진 쇄골에 닿았다.
말랑하고 따뜻한 입술이 쇄골의 얇은 피부를 쭉 빨아당겼다.
“윽, 야…!”
아릿할 정도로 빨려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입 안에서 살짝 씹힌 느낌이 들었다. 준성은 한서를 홱 밀쳐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왜 또 발정 났냐고.”
“네가 야한 소리 내니까 그렇잖아.”
“옷 벗는 소리가 왜 야해?”
“네가 내면 야해. 몰랐어?”
한서가 애꿎은 준성을 탓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벽면에 걸어둔 손전등의 빛 사이로 한서의 야릇한 얼굴이 보였다.
눈가를 꿈틀한 준성이 자신을 먹잇감 보듯이 다가오는 한서에게 눈을 부라렸다.
“개소리하지 말고……!”
캬아악-!
준성의 말을 막듯이 어디선가 좀비의 괴성이 들렸다. 소리는 지척이 아니라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한 듯했다.
첫 번째 괴성을 따라 그 근처의 모든 좀비가 반응하듯 괴성을 질러댔다.
준성이 눈을 번쩍 떴다. 이 울려 퍼지는 괴성이 뜻하는 바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좀비뿐이던 백화점에 두 사람 외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