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4회 -
머리채가 잡힌 느낌은 있어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귓가에 파고든 소름 돋는 음성이 칼날처럼 귓속을 후벼팠다.
준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
기이한 욕망에 물든 남자의 상냥한 얼굴이 보였다. 환한 전등 빛을 등진 채 자신을 눈에 담은 그의 미소가 어딘가 심하게 뒤틀려 보이기도 했다.
남자와 눈을 마주한 준성은 몸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한 공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는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두 팔과 어깨는 추운 겨울날에 알몸으로 버려진 마냥 덜덜 떨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정신 차려, 강준성.’
속으로 몇 번을 되뇌어도 망할 육체는 떠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작해야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뿐임에도 정신 한구석이 조금씩 바스러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자신이 언젠가 꿈속에서 가장 믿었던 사람이었다.
당시의 자신은 이 사람에게라면 자신의 모든 걸 밝혀도 괜찮을 거라고 확신했을 정도로 의지했었다. 피폐해져 가는 순간마다 남자가 곁에 있었고, 그는 언제나 상냥한 얼굴로 자신을 다독여주곤 했다.
꿈에 관한 모든 걸 밝혔음에도 그걸 순수히 믿어주고 안아주던 사람이었다. 다 말해 버린 후에도 자신을 토닥여주며 같이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던 다정한 사람이 그였다.
그런 남자를 당시의 자신은 너무 심하게 믿어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병신이었지.’
남자가 변해버렸던 날을 떠올리며 자책했다.
아니, 애초에 그게 본모습이었는데 그동안 일부러 가면을 쓴 채 좋은 사람인 것처럼 곁에 붙어 있었던 것뿐.
남자는 이 지옥 같은 세계를 바라마지 않던 사람이자, 좀비보다 더 악독한 살인마였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눈앞에 끌고 와서 보란 듯이 고문하다 죽였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한 그들의 비명이 이 폐공장 전체를 뒤흔들었고, 그 안에서 자신은 하루하루 피폐해져 갔다.
“네 비밀을 다른 놈들하고 공유하고 싶지는 않거든.”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살아있는 사람의 목에 칼을 꽂아 넣던 남자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단단히 뿌리박혀 있었다.
이때의 자신은 아득한 공포와 모든 게 무너진 허탈함 속에서 그저 맥없이 늘어져 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끔 남자가 자신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때 한없이 부서져 가던 정신을 아등바등 붙잡는 데에만 필사적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눈빛이 점점 죽어가며 망가져 가는 걸 재밌어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살인’보다 더.
‘미친놈…. 미친 살인마 새끼.’
그때를 떠올리자, 남자를 향한 두려움보다 더 큰 다른 감정이 앞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망, 그리고 증오.
준성은 남자를 노려보며 그의 멱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 이채를 띠었다.
“손 떼, 개 같은 새끼야.”
그때와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려움에 떨며 제발 이러지 말라고 울먹이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남자는 준성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우리 준성이가 웬일이지? 앙탈을 다 부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준성의 배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흡!”
고통은 없었지만 뭔가에 맞았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배를 때려 맞아 호흡이 턱 하고 막히는 건 고통과 별개였다.
몸을 숙이며 숨을 삼킨 준성은 뒤이어 목을 틀어 잡힌 채 바닥에 짓눌러졌다. 그의 몸 위에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남자는 준성을 눕혀놓고 그 위에 올라탄 채 웃었다.
“교육이 덜 됐나?”
남자의 두 손이 준성의 목을 향해 내뻗어졌다. 그걸 본 준성은 순간적으로 호흡이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숨은 자꾸만 멋대로 삼켜지는데, 목구멍에 뭔가 커다란 게 걸린 것처럼 제대로 내쉬어지질 않았다.
이윽고 남자의 두 손이 살포시 목을 감쌌다. 그즈음엔 이미 준성의 숨이 거의 넘어갈 것처럼 심각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몸에 밴 공포가 불러온 과호흡 증세는 이윽고 준성의 시야를 차츰 흐리게 만들었다.
꿈속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감각은 살아있다.
그걸 증명하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감각은 그대로 준성을 뒤흔들었다.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과 이러한 호흡곤란의 감각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준성에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남자는 이 차이를 그만큼이나 빨리 알아채 버렸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는 준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흐, 윽….”
준성의 숨소리 사이로 신음이 섞였다. 안 그래도 제대로 호흡할 수 없는 상태인데 외부적인 압박까지 더해져 버려서 준성의 감각적 고통은 더욱더 강해져 갔다.
밑에 깔린 준성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제대로 힘도 쓸 수 없는 상태였던 데다가 남자의 몸이 팔까지 완전히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의 반항은 한낱 꿈틀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준성의 시야가 점점 탁해지고 그의 눈동자가 점점 돌아갈 것처럼 위를 향해 갔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품은 눈가에 차츰 생리적 눈물이 고였다.
“하…, 미치겠다, 정말.”
희열을 품은 목소리가 준성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어느새 준성의 귀 바로 옆에 있었다.
“너 지금 존나 꼴리는 거 알아?”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증명하듯, 준성의 배에 닿은 그의 아래쪽이 돌처럼 단단했다.
‘변태 새끼.’
이 와중에도 준성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그때의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게 한낱 지나간 꿈을 다시 꾸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다.
“준성아.”
남자가 예전 그 어떤 날처럼 상냥하고 따스하게 이름을 불렀다.
“살려주세요, 해봐.”
말해보라는 것처럼 목에 가해지던 두 손의 압박이 헐거워졌다. 아주 조금, 숨이 트이는 느낌이 났다. 과호흡으로 인해 거듭 헐떡이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형 무서워, 제발 살려줘, 이렇게 빌어봐.”
흐릿한 시야 속이었지만 준성은 남자의 얼굴이 어떨지 알만했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걸 즐겼다. 한없이 나약해져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구걸하는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 반항하려 하면 여지없이 누군가를 끌고 와서 고문하거나, 방금처럼 몇 시간 동안이나 제 목을 졸라 기어코 그 말을 하게 만들었다.
말해주면 편했다.
원하는 대로 말해주면 세상에서 더없이 상냥한 사람이 되어 자신을 토닥여주고 돌봐주며 쓰다듬어 주곤 했다. 그러다 눈빛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또 같은 짓을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강준성이라는 자가 가진 정보의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나면 한낱 인형이 되길 원했던 것 같다. 남자는 워낙 본인을 무서워하며 벌벌 떠는 놈들을 보기 좋아했으니, 옆에 두고 매일 떨기만 하는 자신이 꽤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괴롭히기 좋고 말 잘 듣는 인형……. 웃기지도 않아.’
하지만 지금의 준성은 그때의 자신과 달랐다.
공장을 지키는 사람이 극히 적은 상태에서 우연히 공장 근처를 배회하는 좀비를 끌어들여 죽음을 맞은 다음 날.
준성은 그때부터 남자를 찾아 죽이고, 또 죽였다. 몇 번이나 죽였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죽인 후에야 남자를 외면할 수 있었다. 일부러 남자와 맞닥뜨릴 수 있을 만한 곳은 전부 피했고, 그와는 어떠한 접점도 만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게 지금이다.
이 폐공장에 끌려왔던 과거와는 명백히 달랐다.
지금의 준성은 살려달라며 굴복했던 그때와 절대 똑같이 굴어줄 생각이 없었다.
준성은 아까 보여준 남자의 미소를 따라 하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냥 죽여….”
어차피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았으니, 남자의 손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시작하거나 꿈에서 깨게 될 뿐이었다. 목이 졸려서 죽는 건 역시나 상당히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문 채 눈을 부릅떴다. 숨은 여전히 막막해도 흐릿하던 시야는 조금이나마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준성의 두 눈이 남자의 다소 놀란 얼굴을 집어삼킬 듯 담아버렸다.
“죽이라고, 개새끼야!”
남자의 두 눈이 놀란 듯 커졌다. 그러더니 차츰 눈빛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커다란 손아귀가 준성의 머리채를 다시금 휘어잡았다.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남자의 다른 손이 준성의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쾅-!
폐공장 밖에서 웬 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쇠파이프로 배관 같은 것을 크게 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야?!”
몰려있던 다른 사람들과 남자의 시선이 소리가 난 폐공장 바깥쪽을 향했다.
당황한 건 남자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소리는 그때… 없었는데?’
준성 역시 그 소리에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