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58)화 (58/240)

- 058회 -

준성은 창민과 얘기한 대로 자신 쪽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 엎드려있기로 했다. 각진 계단 위에 엎드려 고개만 든 준성이 2층 계단을 완전히 올라선 창민의 등을 보았다.

어깨가 한 번 들썩이며 깊이 심호흡하는 듯한 뒷모습이 보였다.

직후, 갑자기 창민은 쇠파이프로 2층 초입의 벽면을 때렸다.

깡! 까앙-!

파이프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꽤 큰 소리가 났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층 복도의 좀비들이 전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다는 걸.

캬아아악-!

크, 카학-!

듣기 싫은 기이한 괴성이 빠르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좀비들을 소리로 유인한 창민은 재빨리 몸을 돌려 3층 계단으로 올랐다. 준성은 그 모습을 밑에서 지켜보며 2층의 좀비들이 모두 창민을 따라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

깡, 깡, 3층에서도 벽에 쇠파이프를 패기롭게 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좀비들이 내지르는 괴성과의 거리는 분명히 멀어졌지만 소리의 굵기는 더 커졌다. 그 많은 좀비와 맞닥뜨리고 있을 창민을 생각하니, 준성은 슬슬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쇠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가 끊기자, 그제야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복도가 휑한 2층을 지나 3층으로 계단을 한 번에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3층에 다다르자, 열린 걸 알고 있었던 그 집에 우르르 들어가는 좀비 떼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문 옆에는 창민이 버려둔 것으로 보이는 쇠파이프도 있었다.

준성이 열려 있는 문에 다다라 멈췄을 땐, 좀비들에게 쫓기고 있던 창민이 마침 베란다 문을 열고 있을 때였다. 준성이 이 집의 베란다가 열려 있다는 걸 미리 알려준 덕이었다.

베란다 문을 연 창민이 두 손으로 난간을 짚어, 밖으로 뛰어내리듯이 몸을 날렸다. 그걸 본 준성은 창민이 정말 밖으로 떨어진 게 아닌가 하여 가슴이 철렁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3층에서 떨어졌을 때 큰 부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창민이 베란다 밖으로 사라지던 그때.

캬아아악!

가악, 칵!

크어어어-!

앞에 있는 게 휑하니 뚫려 있는 베란다라는 것도 모르는지, 좀비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앞다투어 뛰어내렸다. 정확히는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날린 창민을 잡기 위해 자신들도 서슴없이 자리를 박찬 거였다.

그렇게 뛰어든 좀비들은 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여서 베란다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베란다 밖의 1층에는 좀비들의 육체가 비처럼 후두둑 쌓이고 있었다.

집 안 거실을 꽉 채울 정도로 가득하던 좀비들은 이제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좀비 일행의 가장 뒤에 서서 시야 대신 소리에만 의존하고 있던 두 명의 좀비가 베란다 난간에 부딪힌 채 그대로 멍하니 배회했다.

준성은 왼손에는 마체테를 들고 오른손에는 창민이 쓰던 쇠파이프를 들고 뛰어들어갔다. 그의 발소리를 들은 두 좀비가 난간을 등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쿠아-!

카아악!

두 좀비의 괴성을 무시한 준성의 마체테가 먼저 왼쪽의 좀비를 내리쳤다.

그러고선 오른쪽에 있는 좀비를 쇠파이프로 후려치려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멀쩡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낯익은 그 손은 준성을 향해 달려들려던 오른쪽 좀비의 머리채를 붙잡아, 그대로 당겨버렸다. 좀비는 그의 허리 언저리까지 오는 난간에 미끄러지듯 맥없이 뒤로 넘어가며 그만 1층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보며 안도한 준성은 곧 베란다 난간을 가볍게 잡아 올라오며 안으로 훌쩍 점프해 들어오는 창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준성 대신 마체테를 뽑아주며 살풋 웃었다.

“거봐, 잘 됐지?”

준성은 그에게 마체테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좀비들을 몰아넣고서 그들에게 죽을 듯 살 듯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에 4층에서 황경오를 데리고 내려와 3층 계단을 지나는 순간에 무게가 쏠린 문이 뚫리고, 갇혀 있다가 풀려난 좀비들에게 뒤이어 쫓기게 된다.

그러나 거리가 좀 있어서, 아파트 입구로 나와 옆으로 꺾어 숨으면, 좀비들이 모두 직진만 하며 달려가다가 그들을 놓친다는 게 준성이 알던 꿈속 체험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좀비들 대다수를 건물 밖으로 깔끔히 떨궈버리면 체험판 속의 ‘좀비들에게 쫓기다가 숨는다’라는 항목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준성은 과감하게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날리고서 그대로 난간 제일 아랫부분 기둥을 붙잡고 버텨준 창민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덕분에 사람처럼 시야가 다양하지 않고 제한적인 좀비들은 눈앞에 허공인 줄도 모르고 그저 창민을 따라 그들 역시 몸을 날렸다.

‘역시 몸을 잘 써.’

몸이 날렵한 것뿐만 아니라 좀비가 다 떨어질 때까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베란다에 매달려 있었다. 그만한 근력도 대단하고, 상황에 따른 대처도 좋고, 좀비들에게 그토록 둘러싸이면서도 과감한 선택까지 가능한 그가 진심으로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나처럼 꿈으로 여러 번 겪어온 것도 아닐 텐데.’

새삼 서창민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창민 덕분에 2층과 3층의 좀비들이 말끔히 정리된 걸 본 준성은 그에게 쇠파이프를 되돌려주며 4층으로 향했다.

4층에 올라오자마자 복도 초입부터 황경오의 집 앞까지 드문드문 서 있는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말이 드문드문이지, 거의 일정 간격으로 빼곡한지라 한 놈 한 놈 전부 처리하려 한다면 상당한 시간을 소요함과 동시에 위험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꿈에서도 4층이 제일 고비이긴 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경오를 구하지 못했을 때의 경험이다.

황경오를 구했던 그때의 기억을 갖고 있는 준성으로서는 이 상황을 빠르고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준성은 창민과 함께 계단 앞 벽에 등을 붙인 채 좀비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 앞에 세 마리 정도만 처리해줄 수 있어요?”

“그 이상도 가능해.”

조금 전에 베란다를 이용해 수많은 좀비를 처리한 자신감 때문인지, 창민은 든든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혹시나 위험하면 바로 뒤로 빠져요. 알겠죠?”

“알았어.”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창민이 자신 혼자 위험하다고 내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준성 역시 알고 있었다.

‘위험해지지 않도록 내가 똑바로 굴어야 해.’

꿈에서 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 어떻게 ‘작동’시키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마체테를 등허리의 검집에 넣어둔 준성은 자신이 황경오를 구해냈던 그 날과 거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하며 창민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에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민이 4층 복도를 향해 뛰쳐나갔다. 그는 초입에서 배회하고 있던 좀비의 머리를 단번에 내리찍어 부수며, 뒤이어 자신을 돌아보는 두 번째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준성은 창민의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며 그 역시 복도로 뛰어들었다.

‘빨라.’

생각보다 창민이 너무 빨라서 준성 역시 동작이 빨라졌다.

준성은 첫 번째 좀비의 시체를 지나, 이제 막 두 번째 좀비의 머리를 후려치는 창민 근처로 뛰어갔다.

준성이 노리는 건 복도 벽면에 있는 ‘소화전’이었다.

이 건물은 현재 단수 상태일 테지만, 소화전은 아파트의 물탱크와 무관하게 비상급수설비로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알만한 사람들은 단수가 되었을 때 이 소화전을 이용해 비상급수를 받아서 쓰기도 한다.

창민이 세 번째 좀비에게로 돌진하는 타이밍에 소화전의 문을 연 준성은 안에 접혀있는 흰색 소방호스를 전부 밖으로 꺼내버렸다. 길고 긴 호스의 끝에는 관창이라 불리는 머리 부위가 있었는데, 준성은 한 손으로 이 부위를 잡은 채 소화전 안의 빨간 밸브를 빠르게 열었다.

보통은 잘 연결되어 있나 점검부터 하고 물을 틀어야 할 테지만, 꿈속에서와 똑같이 잘만 연결되어 있을 게 뻔해서 굳이 체크하지 않았다.

역시나 물이 호스 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준성은 호스에 물이 빵빵하게 차는 것을 보며 그 머리 부분, 관창을 좀비들이 달려오는 복도 쪽으로 겨눴다.

“형, 뒤로 빠져요!”

때마침 세 번째 좀비의 머리를 내리치고서 복도 밖으로 던져버린 창민이 얼른 뒤로 빠졌다. 그는 준성이 뭘 하려는 건지 단박에 이해한 듯, 쇠파이프를 옆구리에 끼고서 호스를 함께 잡아주었다.

키아악-!

캬학!

괴성을 지르는 좀비들이 점차 가까워졌다.

준성은 자신이 잡고 있는 호스 끝부분까지 물이 차는 걸 느끼며 그제야 관창을 돌려서 입구를 개방했다.

쏴아아아-!

샤워기라든지 워터파크 같은 데서 쏟아져나오는 수압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강한 물줄기가 쏟아져나왔다. 일직선으로 강하게 쏘아진 물줄기는 가장 앞에 있던 좀비를 거의 날아갈 정도로 밀쳐내었고, 그 뒤에 있던 좀비들마저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뿐만 아니라 강한 물줄기는 좀비들의 시야를 가리는 데에도 한몫했다. 차곡차곡 쌓여가던 좀비 무리는 가려진 시야와 주변을 맴도는 큰 물소리 때문에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게다가 물줄기의 힘이 워낙 세서 앞으로 나아가긴커녕 강제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준성과 창민은 물줄기를 최대한 강하게 쏘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에 맞춰 좀비들 역시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403호.

404호.

드디어 405호를 지났을 무렵.

끼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405호의 문이 열리며 황경오가 빠끔히 머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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