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6회 -
지안은 황당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이 인간, 지금 자신을 ‘개’라고 말한 거지?’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가는 저 웃는 얼굴에 물어뜯길 것 같아서 차마 말을 못 하겠다.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자신이 키웠던 귀여운 포메라니안이 뭘 했을 때 특히 예뻤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음, 가만히 있어도 귀엽지만 전 특히 똑똑하게 굴 때가 너무 예뻤어요. ‘손’ 이랬는데 제 손에 앞발을 착- 올려준다든지, 간식 앞에 두고 ‘기다려’라고 했는데 진짜 기다려준다든지.”
상상만으로도 좋았던 지안이 배시시 웃었다.
“의사소통은 어려워도 제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주는 거잖아요. 어떻게 안 예쁘겠어요.”
‘진짜 개’를 생각하며 즐겁게 말을 내뱉는 지안을 바라보던 한서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흐음, 시키는 걸 잘 하면 된다는 거네?”
못마땅한 듯이 찌푸리고 있던 눈가가 누그러지고, 차갑던 눈매는 약간의 곡선을 그렸다.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게.”
한서의 냉기가 옅어졌다. 그렇다고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조금 전까지의 살벌하고 뾰족뾰족한 느낌은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안심하긴커녕 오히려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인간이 예쁨 못 받으면… 난 죽었다….’
지안은 한서의 주인님이 빨리 돌아와서 토닥여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려면 우선, 지금 이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야 했다.
두 사람의 시야 끝에 드디어 기다리던 드론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면 하얀 기러기가 연상되던 저 드론은 시킨 대로 배가 불룩해져 있었다.
드론은 곧 한서와 지안에게 다가와 그들 앞에 천천히 착륙했다. 지안이 나서서 드론의 몸통을 둘둘 감은 붕대를 벗겨내자, 그 안에서 검은색 쌍안경이 나왔다.
지안에게 쌍안경을 건네준 드론은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돌아가 봤자 챙길 짐만 하나 늘어나는 것뿐이니, 이대로 한서와 지안 곁에 남겨두고서 탈출한 뒤에 가져가면 될 것이다.
물론 탈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겠지만.
그걸 위해 쌍안경을 든 지안이 방향을 맞췄다.
그들이 있는 곳은 경오의 베란다 반대쪽이자, 옛날 아파트 특유의 오픈된 복도가 보이는 방향이었다.
쌍안경에 405호가 정확히 잡혔다. 그 외에도 오픈된 복도에 층마다 그득한 좀비들과 건물 입구의 화단 뒤쪽에 몸을 숨긴 두 사람까지도 훤히 보였다.
지안은 성능 좋은 쌍안경에 감탄하며 무전기를 들었다.
“아저씨, 이제 신호하면 바로 문 열고 뛰어나오는 거예요.”
-문 열고 그냥 달리면 돼? 1층까지? 내가 하, 할 수 있을까?
무전기를 타고 들려오는 경오의 목소리에는 극심한 불안이 있었다. 지안은 그런 경오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아저씨. 다른 오빠들이 길을 만들어주는 동안 제가 안전하게 1층까지 유도할게요.”
지안이 한창 경오를 다독이고 있을 때.
구름다리 근처를 배회하던 두 좀비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아직 시야 범위에 닿지 않아서 달려오고 있진 않지만, 앞으로 걷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그들은 얼마 못 가 지안을 포착할 거다.
한서는 쌍안경으로 아파트 건물을 주시하는 지안을 둔 채 천천히 좀비들에게 다가갔다.
조금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것 같다.
* * *
아파트 입구, 다소 높은 길이의 화단 뒤쪽에 몸을 숙인 채 숨어있던 준성과 창민은 저 멀리 보이는 구름다리의 두 사람이 드디어 드론을 만나는 걸 목격했다. 지안이 건네받은 쌍안경에 문제가 없다면 곧 OK 사인이 나올 것이다.
준성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확실히 맞출 수 있어.’
좀비들이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어떻게 달려든 지까진 기억하지 못하지만, 출발 시각만 맞추면 이후에 무슨 타이밍에 어떤 좀비가 튀어나왔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시간적 오차 범위 체크는 4층까지 올라가서 황경오와 마주친 시점을 기점으로 하면 된다.
시간을 체크하던 준성은 빠르게 뛰어나갈 수 있도록 몸을 적당히 긴장시키며 손에 든 마체테를 꽉 쥐었다. 그러다가 창민을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무기 안 바꿔도 되겠어요?”
준성의 뒤에 서 있던 창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창민이 친근하게 대답했다.
아침에 눈을 뜬 후.
준성은 창민에게 말을 놓으라며 편히 대해달라고 말했다. 그 딴에는 꿈속에서 서창민과 함께 직접 움직여본 적이 없다 보니, 최대한 빨리 친해져서 그의 성격이나 스타일에 관해 좀 더 빨리 파악하고자 함이 컸다.
더불어 황경오와 합류하기 위해서 함께 좀비들 한복판으로 쳐들어가야 했기에, 자신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도록 그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놔야만 했다. 안 그러면 서창민이라는 카드를 제대로 써먹기도 전에 그가 좀비에게 당해버릴 수도 있다.
준성과의 나이 차라고 해봐야 두 살밖에 안 되기에, 창민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말을 놓고 형 동생 부르다 보니, 창민은 벌써 준성을 오래도록 알고 지낸 좋은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창민이 준성의 손에 잘 쥐어져 있는 마체테를 보며 웃었다.
“손에 익은 무기를 쓰는 게 여러모로 대처하기 좋잖아. 난 이 쇠파이프 하나면 돼.”
컨테이너 사무실 옆 공사장에서 가져온 긴 쇠파이프가 제법 든든해 보였다. 어쩌면 서창민이 들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도한서가 들고 있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무서웠겠지.’
긴 쇠파이프를 든 도한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살벌하기 짝이 없다.
아니, 그냥 도한서는 뭘 들고 있어도 무섭지 않을까.
준성은 문득 구름다리를 올려다보았다. 도한서도 마침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정확히 눈빛을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와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준성아.”
준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창민의 얼굴은 어느새 석연찮은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하나씩 물어봐도 될까?”
준성은 창민이 저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었던 경오.
그가 갖고 있는 물건들을 보지도 않고 전부 파악해버리는 준성.
그리고 되돌아가, 자신을 구할 때 보였던 대처들.
당시에는 그저 신기해하고 말았다. 상황판단과 대처 능력이 뛰어난 것도 그저 대단하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가스폭발.
그날 이른 오전에 어떻게든 물을 구해보려고 상가 구석구석을 다 뒤져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폭발이 일어났다던 식당은 문이 잠겨 있었다는 걸.
그렇다면 어떻게 타이밍까지 재서 폭발을 대비할 수 있었을까?
창민은 지금도 그때처럼 시계를 보고 있는 준성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준성은 창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기에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이 아저씨를 구하고 난 후에 말할게요. 그래야 이해되실 거라서요.”
꿈에서 서창민을 구하는 걸 번번이 실패할 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그가 생각보다 더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신이 그를 구해줬다고 한들, 쉽사리 믿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만 키울 게 뻔했다. 그를 구하는데 있어서는 미래를 아는 능력이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기에 허무맹랑한 사람이라고 낙인 찍을 수도 있다.
그러느니 아예 그런 능력에 대해 입을 다문 채 서로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편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 그러다가 이번처럼 서창민의 상식과 생각만으로는 도저히 짜 맞춰 볼 수 없는 현상을 직접 겪게 해, 스스로 비현실적인 것을 추측하게 만든다.
사람은 본디 말보다 행동으로 체감해야 이해가 빠른 법.
자신의 꿈에 관한 것처럼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일을 백날 말로 설명해봐야, 신중하고 의심 많은 사람에겐 불신만 안겨주는 꼴이다.
“일단은 절 믿고 움직여주세요.”
“…알았어.”
준성의 말에 창민은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성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든 간에 지금은 인명구조가 급선무였다. 정의감이 상당한 창민으로서는 일단 준성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에 집중하며 그를 믿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쌍안경을 눈에 댄 지안이 준성과 창민 쪽을 향해 손을 파닥거리며 흔들었다. 그걸 확인한 뒤에 다시금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던 준성이 이내 웅크렸던 몸을 세웠다.
“곧 출발할게요.”
꿈속에서 황경오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고, 결국 성공까지 했던 그 날의 출발시간과 점점 똑같아지고 있었다.
남은 건 고작 몇 초.
적당히 온도를 높이는 긴장감을 느끼며, 준성이 당부했다.
“이제 가죠. 미리 말해준 것처럼만 해주면 돼요.”
창민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쇠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시간을 가늠하며 타이밍을 재던 준성은 곧 자리를 박차 뛰어나갔다. 그의 뒤를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의 창민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