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47)화 (47/240)

- 047회 -

다른 쪽에 정신이 팔린 좀비의 뒤통수에 마체테를 내리찍었다. 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약간의 소음과 함께 좀비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그의 등허리를 발로 차서 마체테를 힘있게 뽑아낸 후, 바로 옆 좀비의 관자놀이를 벨 것처럼 횡으로 찍었다. 이번엔 얕게 들어갔어도 확실히 손상을 주었는지, 발로 차서 뽑아내지 않아도 좀비가 쓰러지면서 알아서 빠졌다.

캬학!

준성을 발견한 좀비가 목을 조를 것처럼 두 손을 뻗으며 입을 쩍 벌렸다. 피가 끈적하게 묻어나는 치아가 준성의 팔을 확 물어버리려 할 때였다.

물기 직전.

좀비의 몸이 움찔했다. 입을 벌린 채로 차마 물지를 못하고 입을 덜덜 떨었다.

진짜 물릴까 봐 잠시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서 좀비의 얼굴을 팔꿈치로 찍어서 밀어내고는 마체테를 휘둘러 머리를 베었다.

좀비의 몸이 힘없이 넘어졌다.

준성은 숨을 헐떡이며 쓰러진 좀비를 내려다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전신이 찌르르 울렸다.

‘도한서, 너는 진짜…….’

이 자리에 없는 한서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까이 있는 다른 좀비의 머리를 마체테로 거세게 후려쳤다.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엔 한서의 여유로운 얼굴만이 둥둥 떠다녔다.

도한서는 그냥 존재 자체가 미친 게 분명하다.

서창민을 구하러 가기 1시간 전.

“준성아, 잠깐 이리 와봐.”

짐을 챙기던 준성을 한서가 간호사실로 불렀다. 부르는 대로 가봤더니, 간호사실 중앙의 유리 테이블에 파란 바구니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쓸만한 비품이라도 찾은 건가, 해서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

선명한 붉은 피가 들어있는 보라색 뚜껑의 채혈통 다섯 개, 일회용 주사기가 몇 개인지 세기 어려울 정도로 한 움큼, 팔을 묶을 때 쓰는 노란 고무줄, 병원에서 주로 쓰는 은색 통 안의 알코올 솜과 핀셋까지.

진짜 간호사가 왔다 갔나 싶을 정도로 그럴듯한 것들이었다.

“이게 뭐야?”

“내 피.”

“뭐?”

채혈통에 들어있는 게 피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의학 쪽을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준성에게 있어 ‘채혈’이라는 것부터가 참 전문적이라, 간호사도 없는데 저걸 어떻게 뽑아냈는지 의문일 뿐이었다.

“네 피 맞아? 누가 채혈해줬는데?”

“내가 했어. 혼자 채혈하는 법 알거든.”

더더욱 머릿속에 의문만 늘어났다.

의학과 쪽이라면 모를까, 전혀 상관도 없는 검도학과라는 녀석이 어떻게 혼자 피를 뽑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걸 뽑아서 그냥 주사기로 둔 게 아니라 꽤 전문적이게도 채혈통에 담아놨다. 준성으로서는 사실 채혈통에 담으나, 주사기로 뽑아서 그대로 두나, 둘 다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여기 앉아봐.”

옆자리의 의자를 빼준 한서가 일회용 주사기와 노란 고무줄을 집어 들었다. 준성의 왼쪽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는 그 아래에 능숙한 손길로 고무줄을 감았다.

‘어째 묶는 방법까지 낯익은데…….’

매듭을 그냥 막 묶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피를 뽑을 때 간호사가 묶어주는 것과 거의 똑같이 하고 있다.

신기한 나머지 눈을 빛내며 보고 있던 준성은 한서가 일회용 주사기 바늘을 채혈통 뚜껑에 찔러넣는 걸 보았다. 주사기 안에 채워져 가는 피를 보고 있던 준성은 그제야 깜짝 놀랐다.

“나한테 넣으려고?”

“응. 조금 따끔할 거야.”

“따끔이고 뭐고 간에…….”

한서는 준성의 드러난 팔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해서는 핀셋으로 솜 하나를 집었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나는 솜을 진짜 간호사라도 되는 것처럼 팔꿈치 안쪽에 문질러주었다.

차갑고 간지러운 느낌에 정신을 차린 준성이 팔을 홱 빼버렸다.

“잠깐, 기다려 봐. 일단 설명을 해줘야지.”

“음, 설명 잘 못 하는데.”

한서가 뭐부터 설명해줘야 하나 고민하기에 준성이 먼저 조목조목 물었다.

“이런 건 다 어디서 가져왔어? 5층?”

“채혈실은 2층에 있어. 여기 어릴 때부터 자주 와봐서 알거든. 직접 가서 챙겨왔지.”

한서가 인한병원에 자주 와봤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게다가 병원을 자주 오고 갔다는 사실은 언뜻 어딘가가 안 좋아서일 확률이 높다 보니 걱정부터 들었다.

“어디… 아파?”

“빈혈 가끔.”

피부색만 좀 하얗다뿐이지, 그 외에는 완벽히 건강한 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빈혈이라니. 정말 안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걱정 반, 호기심 반인 얼굴의 준성에게 한서가 주사기를 들어 보였다.

“이거 일단 빨리 놓고 싶은데, 놓으면서 대답하면 안 될까?”

“내 혈액형이 뭔 줄 알고?”

“나야 모르지. 대신 난 아무한테나 수혈 가능해.”

“내가 RH-면 어떡하려고.”

“RH-야?”

“아니.”

“됐네, 그럼.”

보통 혈액형이 다르면 수혈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한서가 O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O형은 RH- 같은 특이한 혈액형 외에는 A형이든, B형이든, AB형이든, 누구에게나 수혈해줄 수 있으니까.

그제야 좀 안심은 되긴 하는데, 정식 수혈도 아니고 무슨 안정제나 감기 주사 놓듯이 해봐야 의미가 있나?

그리고 솔직히 좀… 무섭다.

주삿바늘이 무섭다기보다, 도한서가 주사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꺼림칙하다.

‘그래도 잭나이프보다는 낫지.’

준성은 한서가 쓰던 잭나이프를 떠올리며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준성은 자신의 팔을 불안한 시험대에 올려놓고 말았다.

한서가 든 주사 끝이 준성의 하얀 피부밑에 숨은 가느다란 혈관으로 파고들었다.

채혈할 때 쓰는 굵은 바늘이 아니어서인지 정말 한 번 따끔하는 정도였다.

준성은 자신의 혈관 속으로 들어오는 한서의 피를 보며 긴장했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준성이 긴장했다는 걸 알았는지, 한서는 급하지 않게 피를 넣어주면서 말을 걸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혈관이 잘 보이네. 다행이다. 다른 사람 주사 놔주는 건 처음이라서 긴장 좀 했거든.”

“뭐? 처음?”

그런 것 치고는 본 게 많아서 그런지 굉장히 잘 놓고 있다. 간호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피를 전부 다 밀어 넣은 주사기 바늘 위로 알콜 솜이 내리눌러지고 이내 쑥 빠져나갔다. 따끔하면서도 찌릿한 쓰라림이 좀 있긴 해도 크게 신경 쓰일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준성은 자신의 팔을 묶은 고무줄을 풀어주는 한서를 보며 물었다.

“우리 이거… 의료법 뭐 걸리는 거 아냐?”

“걸릴 리가 있겠어? 세상이 이따윈데.”

피식 웃은 한서가 주사기와 알콜 솜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실험하러 가자.”

“무슨 실험?”

준성은 한서에게 붙잡혀,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4층.

누군가 문에 적어둔 [좀비 있음]이라는 빨간 글씨가 덜컥 겁을 줬다.

“나랑 가까이 붙어 있어.”

말하지 않아도 그래야 할 걸 알기에 한서의 뒤에 바짝 붙었다.

이윽고 비상계단에 연결된 4층 문이 스륵 열렸다.

한서는 들고 간 손전등으로 4층 전체를 비추었다.

키힉!

칵!

손전등의 빛 덕분에 밝아진 4층에는 준성이 뒷걸음질 칠 뻔할 정도로 너무 많은 좀비가 있었다. 수를 세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바글바글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좀비들의 시야가 빛을 쫓아 한서와 준성을 향했다.

크학! 카악!

캬, 캬갹!

좀비들이 들썩들썩하더니 점점 빠른 걸음으로 준성과 한서를 향해 다가왔다. 보통 인간을 발견했을 때의 흉포함과 압도적인 빠르기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지만, 준성이 생각하기에 그건 어디까지나 백신인 한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준성은 여차하면 한서를 뒤에서 꽉 끌어안을 생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그 말을 남기고는 뒤로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라기도 잠시.

준성은 자신을 둘러싸고 일제히 달려드는 좀비들을 보며 숨을 멈췄다.

캬아악-!

크아-!

먹잇감을 발견하고서 흉포하게 울부짖는 좀비들의 괴성이 들렸다.

이대로는, 물리고 만다.

하지만 준성의 예상과 달리, 그는 어디 한 곳 물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왜…….’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있던 준성은 갑자기 제 얼굴을 향하는 손전등 빛에 눈가를 찌푸려야 했다.

“우리 준성이는 깡도 좋아. 눈도 안 감네.”

한서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근처에 좀비들이 그득함에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개 조형물이라 여기는 것처럼 아주 여유로웠다.

준성은 뒤늦게 멈췄던 숨을 토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머리가 돌지 않았다.

준성은 자신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이를 세운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굉장한 근거리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악취와 굳은 피비린내가 준성을 휘감았다. 팔과 옷을 붙잡은 그들의 조악한 손길도 여실히 느껴졌다.

약 열 명가량의 좀비들에게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던 준성은 그들이 자신을 향해 아쉬운 듯이 이를 딱딱 부딪치다가 슬쩍 물러나는 걸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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