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5회 -
1시간 뒤.
준성과 한서는 짐을 챙겨 들고서 7층 비상계단에 나와 있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사실 준성의 백팩과 마체테가 다였다. 한서의 잭나이프는 그가 언제나 재킷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하고 워낙 가볍기에 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백팩에는 추가로, 비품실에 있던 비상식량과 담요 하나를 챙겨 넣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부터 6일 차까지는 어떻게 지낼지 모르니, 배고픔을 이겨낼 식량, 추위를 덜어줄 담요와 불을 지필 라이터 같은 건 확실하게 챙겨두는 게 좋다. 다 마신 생수병에 새 물을 채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성은 이젠 아주 당연하게 자신의 백팩을 가져가서 메는 한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네 능력을 활용하긴 할 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 눈을 피해서 할 거야. 다른 사람들한텐 네가 백신이라는 걸 절대 들키면 안 돼.”
“알아.”
아무리 믿을 만한 괜찮은 사람들을 구하러 간다는 거지만, 도한서 자체가 백신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게다가 껴안는 수준으로 밀착한다면 좀비가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게 되니, 가히 절대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한서의 능력은 최대한 숨겨야 했다.
“그런데 난 감추라고 하고 넌 밝히려고 하네.”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피식 웃은 한서가 준성과 함께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꿈에 관한 건 일부러 숨기려던 거 아니었어?”
한서는 준성이 꿈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능력을 공개한 후에 벌어졌던 일들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원래는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던 꿈에 관한 정보를 도리어 합류하게 될 사람들에게 밝히겠다기에 의아한 참이었다.
“나도 별로 밝히고 싶은 건 아니야.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 구하러 가는 사람한텐 말해야 해.”
여태까지의 꿈에서는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구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구하게 된다면 그에겐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안 그러면 그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조력을 반도 못 받게 될 테니까.
생각에 빠진 준성의 머리 위에 한서의 손이 다정하게 얹어졌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 이것저것 생각한다고 애쓰네.”
“너랑 별반 차이 없는 사이즈야.”
“그런가.”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7층에서부터 내려가기 시작한 그들은 어느덧 5층을 지나, 4층에 다다랐다.
준성은 한서가 들고 있는 손전등에 비친 4층 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랑 비슷한 능력을 가진 그 사람 말이야.”
“장기매매 보스?”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꿈에서 만난 적 있는 사람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 병원만 해도 준성이 아는 대피자들의 정보를 그 역시 가지고 있었다. 대피한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병원에 왔던 사람일까?’
병원의 대피자 명단만 봐도 그가 대피한 순서까지 다 꿰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꿈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병원의 대피자 인원이 최대 21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는데, 혹시 그 늘어난 인원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순간, 준성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 있는 준성을 바라본 한서는 그가 파리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강준성?”
뻣뻣하게 언 채로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엄청난 불안감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한서가 계단을 한 칸 내려가서 준성과 눈을 마주했다.
“준성아, 나 봐봐.”
준성의 앞에 있는 건 분명 한서였는데, 정작 초점은 다른 데를 향해 있었다. 아니, 아예 초점을 어디 둘 줄도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준성의 상태에 미간을 찌푸린 한서가 그의 어깨를 잡고서 거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빨리. 확 덮쳐 버리기 전에.”
한서가 격하게 흔들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덮친다는 경고 때문인지 몰라도 준성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한서의 손이 준성의 볼을 감쌌다. 잠깐 넋 좀 놨다고 그새 차가워진 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길래 혼이 빠져?”
“그냥 좀…….”
준성은 털어놓기가 어려운지 말끝을 흐렸다.
한 손으로 약간의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짚고서 눈가를 떨던 준성은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되었다.
“이제 괜찮아. 가자.”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앞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준성의 뒤를 따라 내려가던 한서는 조금 전의 불안감 가득했던 그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때와 닮았다.
“우리 준성이….”
“사람, 죽여봤니?”
그 질문 직후에 점차 불안에 휩싸인 얼굴이 되더니, 공황장애와 함께 과호흡이 왔었다. 방금도 준성이 조금만 정신을 늦게 차렸으면 그때처럼 괴로워할 상황이 됐을지도 모른다.
‘뭐 때문이지? 이번엔 누굴 죽이는 것과 상관도 없었는데.’
한서는 계단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는 준성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거네.’
꿈에 관한 얘기는 다 털어놓은 줄 알았더니, 숨긴 것도 있나 보다. 아마도 그 숨긴 무언가가 준성의 트라우마와 깊은 관련이 있을 거다.
한서는 준성을 덜컥 잡아두는 그 트라우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그건가?’
자신이 어제, 준성에게 꿈속에서 사람을 죽여봤냐고 물어봤던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까 물어봤지? 그 꿈에서… 사람 죽여봤냐고.”
“죽여봤어. 그것도 회차가 시작하자마자 달려가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한서는 준성의 트라우마가 아마도 그 ‘죽여버린 놈’과 관련 있을 거라고 여겼다.
제아무리 꿈이라 해도 강준성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집요하게 쫓아가서 마구 죽이는 짓을 했다는 건, 상대가 그의 정신을 완전히 뒤흔들만한 트라우마를 억지로 쑤셔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웃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죽였어.”
‘트라우마’라는 걸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한서로서는 준성의 상처가 참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 * *
“젠장맞을!”
이제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젊은 청년이 욕을 내뱉으며 애꿎은 빈 생수병을 콱콱 밟아댔다.
“대체 구조는 언제 오는 거야?!”
마지막 남은 물이었다. 이제 더는 물도 없고, 식량은 아예 처음부터 있었던 적이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중년 여인이 그런 청년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몸에 화가 많은 학생이네.”
“어떻게 하루도 안 빼놓고 저 난리일까요?”
교복을 입고 있는 포니테일의 여학생이 그녀 옆에 쭈그려 앉아, 청년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엄마가 대학생 되면 이제 어른이 되는 거라고 했는데……. 저 오빠 보니까 엄마 말도 다 맞는 게 아니네.’
머리를 내저은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구석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뚱뚱한 30대 남자를 향해 걸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화가 많은 젊은 청년과 심드렁한 중년 여인, 포니테일의 여자 고등학생과 하루 내내 잠만 자는 30대 남자.
이 다양한 구성의 네 명은 본의 아니게 한 세탁소에 모여 있었다. 값비싼 오피스텔의 1층 상가 중 하나였던 이곳은 그나마 다른 상가들에 비해 면적이 넓은 편이어서, 네 명이 나란히 누워 있어도 옆으로 편하게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충분했다.
세탁소는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많은 옷이 걸려 있어서 초겨울 날씨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고, 새벽에 너무 춥다 싶으면 건조기에 옷을 몰아넣고 돌려서 뜨끈뜨끈한 상태로 입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식량과 물이었다.
첫날에는 충분하게 나오는가 싶던 물이 어느 순간 뚝 끊기더니, 3일째인 지금까지도 물 한 방울 안 나오고 있었다.
‘그 오빠가 첫날에 미리 받아두라고 해줘서 다행이었지.’
여학생은 제 손에 있는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꽤 길게 내쉬었더니 배가 더 고픈 것 같다.
웅크린 30대 남자 옆에 멈춰 선 여학생이 그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아저씨, 일어나 봐요.”
“우응, 왜, 지안아….”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돌린 남자가 얼굴을 찡그린 채 이지안을 올려다보았다.
“창민이 오빠 어디 갔어요? 새벽에 나갔다면서요.”
“으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린 다 밤부터 자고 아저씨는 낮부터 자잖아요, 맨날. 한창 활발하실 새벽이니까 봤을 거 아니냐고요.”
“몰라. 물 다 떨어진 거 아니까 구하러 갔나 보지, 뭐. 지금까지 안 돌아오는 거 봐선 혼자 도망친 걸 수도 있고.”
“에이, 설마…….”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
삑삑삑삑-
달칵-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기계음과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새벽에 나갔다던 창민이 돌아온 줄 알고 반갑게 맞으려던 지안은 예상치 못한 낯선 사람의 등장에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