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4회 -
-3일째
3일 차 정오.
오래도록 푹 자버렸던 준성은 시원하게 샤워를 마친 지금, 칼로리 바 하나를 입에 문 채 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쪽에서 출발한 그 사람이 이쯤에서 고립될 테니까 그럼 다음 건물에서 이걸…….’
‘아니야, 이쪽은 그때 생각보다 좀비의 수가 너무 많았어. 여길 뚫고 지나갈 수만 있다면 최적의 아지트를 얻는 셈이지만 역시 거기보단…….’
‘이쪽은 어떨까? 음…, 아무래도 그 사람을 버리긴 아까워.’
애꿎은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려보다가 결국 X 표시를 하고는 그 밑에 또 다른 동그라미를 그렸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직선을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듯이 이리 꺾고 저리 꺾고 하면서 구불구불하게 그리다가 또 동그라미를 그린다.
한서는 준성이 말없이 백지에 그림을 척척 그리기에 취미가 그림인가 했는데 일단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종이에 있는 거라고는 온통 동그라미와 직선뿐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한서가 물었다.
“뭘 표현하고 있는 거야?”
저 난감한 그림이 대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내 머릿속.”
가볍게 대답한 준성이 종이의 얼마 남지도 않은 빈 곳에 또 다른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자연스레 다음 수순은 직선이 튀어나올 거라 예상했고, 역시였다. 튀어나온 직선은 다른 직선과 동그라미 위를 이리저리 지나다가 끝에서 또 새로운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한서는 혹시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복잡해진 그의 머릿속을 표현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긴, 남자 쪽으로는 생각도 안 해본 눈치였지.’
키스할 때도 그렇게 느끼긴 했지만, 어젯밤에 그리도 얼어있는 걸 보니 조금 보수적인 성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대뜸 물어보았다.
“혹시 어제 일 때문이야?”
“뭐가?”
준성이 여전히 그림에 몰두한 채 대꾸했다.
“어제 네 손에 비비다가 싸서 그런 거냐고.”
열심히 동그라미를 그리던 준성의 손이 우뚝 멈췄다. 너무 노골적인 말이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준성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서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준성의 눈은 별다른 감정변화 없이 차분했다.
“어젯밤 일은 나 나름대로 정리해서 받아들였어.”
“정리? 뭘 받아들여?”
준성이 한서의 잠잠한 바지 앞섶 쪽을 눈짓했다.
“성별을 떠나, 순수하게 네 욕구 처리를 도와주겠다는 소리야. 그래야 다른 충동으로 갈 흥분이 네 거기로 모이겠지.”
준성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원하게 샤워를 하면서 어젯밤 일을 되짚어보았다.
살인 충동과 성욕은 한 장 차이.
한서가 빗대었던 그 말은 살인 충동 자체가 성욕을 푸는 것으로 해소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쌓여버린 성욕을 살인으로 푸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준성과 한서는 서로 약속을 했다.
상대방이 위험한 경우가 아니면 살인을 하지 않기로.
준성은 한서가 그걸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게 자신이 ‘억제제’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자건 여자건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한서가 없었으면 난 이미 죽었어.’
한서가 바라는 것 같지 않기에 더 이상 티를 내진 않았지만, 준성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자신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죽을 고비가 생겼고, 그걸 구해주기 위해 한서가 그의 손에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묻혀야 했다.
자신이 한서의 살인을 유도한 셈이다. 그리고 그는 타인을 죽여서라도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를 도와주는데 까짓거 손하고 입술 좀 빌려주는 게 뭐가 대수일까.
“그래서 앞으로는 되도록 피하지 않고 도와줘 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는 안 돼.”
마지막에 단호히 말하자, 한서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할게.”
준성은 제 무덤을 그 스스로가 파고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한서가 그의 손에 들린 그림을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그래서, 그 그림은 정확히 뭐야?”
준성은 그 그림을 한서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들어서 보여줬다. 그래 봐야 한서에게는 똑같이 동그라미들과 직선들뿐이지만.
“이후에 우리가 가야 할 루트 후보들.”
“루트 후보?”
준성이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원들은 특정 건물. 이 선은 그곳에서부터 다른 건물로 이동할 때의 노선이야.”
자세한 풀이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노선’이라고 했는데, 한서 눈에는 그저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의 직선을 내키는 대로 그린 것에 불과했다.
준성은 휴대폰을 꺼내어 인한병원을 중심으로 그 인근의 지도를 확대해 보았다. 휴대폰을 통해 지도를 수시로 외웠던 준성은 이곳 인한병원에서부터 어디로 가야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지도를 띄워두고 눈앞의 백지엔 그 지도상의 대피용 건물을 동그라미로 만들어보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지도와 동그라미가 일체화되었고, 그 뒤는 이동 경로를 상상하기도 쉬웠다. 휴대폰의 지도를 확대한 종이에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갈 길을 표시한 듯한 느낌이었다.
준성은 아까 한서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 그의 ‘머릿속’을 그림으로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준성의 말을 들어보던 한서는 타당한 의문을 던졌다.
“꼭 가야 해?”
한서가 보기에 인한병원은 밖에서는 들어오기 힘들어도 한번 들어오면 굉장히 쾌적하고 편한 곳이었다.
입구 봉쇄도 잘 되어 있고 7층 위로는 구조를 기대해볼 수 있는 헬기장까지 있다. 딱딱한 바닥에 웅크려 자지 않아도 되도록 침대도 많다. 아직까지는 수도도 잘 나오고 있으니 제한적인 식량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준성 역시 한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꿈속에서도 그러한 점 때문에 인한병원을 아지트로 삼은 적이 꽤 있었다.
하지만 준성은 식량 문제도 식량 문제이지만, 굳이 나가서 이동할 길을 모색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마지막 꿈에서 ‘해결책’을 찾고 죽었다고 했지?”
“그래.”
그건 한서 또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난 그걸 찾아서 인한시 밖으로 가지고 나갈 생각이야.”
한서가 흐음, 하고 생각하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준성의 마지막 꿈을 예로 들었다.
“해결책 얻는 데에 성공했던 마지막 꿈대로 하려는 거야?”
“아니. 그런 거였으면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지.”
준성의 시선이 다시금 그가 그린 해괴한 그림으로 향했다.
“마지막에 꿨던 꿈에서 해결책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고는 해도 아쉬운 게 없었던 건 아니야. ‘이때 이 사람이 있었으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었겠구나’ 라든지 ‘이 사람이라면 이후에 이걸 갖고 밖으로 나갈 때 유용했을 텐데’ 라든지 말이야.”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영웅 캐릭터를 얻기 위해 어디를 가서 뭘 한 뒤에 무슨 퀘스트를 하면 그 캐릭터가 아군으로 합류해준다던 동료 얻기 퀘스트를 하는 느낌이랄까.
준성은 자신이 꿔온 꿈속에서 3일 차 이후로 살아남아 있는 사람 중에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 있으면 유용한 사람으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우선순위를 짜고 있었다.
“어차피 이 병원은 잠시 나가 있겠다고 해도 무조건 7일 차에 돌아올 거야. 동생도 그렇고 그 일행에 있을 대머리 아저씨가 많이 중요하거든.”
그 사람과 합류하는 건, 해결책을 얻었던 마지막 꿈이자 성공 루트의 필수조건이었다.
한서는 준성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다가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그럼 네 말은, 7일 차가 되기 전까지 나가서 쓸만한 녀석들을 구하고 흡수해오자는 거지?”
“맞아.”
고개를 끄덕인 준성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근데 나도 쓸만한 녀석이야?”
한서가 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준성이 그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툭 때렸다.
“당연한 거 묻지 마. 능력치만 보자면 네가 제일 중요하고 가장 쓸만해.”
“능력치…. 꼭 내가 게임 캐릭터 같네.”
한서가 피식 웃으며 준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의 준성은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돌고 있었다. 말하는 투나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게임’에 빗대면서부터 눈빛이 바뀌었다.
준성은 우선순위 결정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다. 동그라미와 직선들로 가득하던 종이가 그의 두 손에서 와락 구겨졌다.
“여태까지의 꿈에서 매번 구하는 데에 실패했던 사람이 있어.”
마음 같아서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사람을 다 구해서 합류시키고 싶지만, 몸은 하나이기에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사람들 위주로 우선순위를 짜 보았다.
그 결과, 지금 외에는 구할 수 없는 한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우린 지금 당장 그 사람을 구하러 갈 거야.”
“하지만 매번 구하는 데에 실패했다며. 이번에도 실패하는 거 아니야?”
한서가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자, 준성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성공할 거야. 이번엔 네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