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41)화 (41/240)

- 041회 -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하던 태주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어떻게 이틀 만에 한국의 반이……. 에헤이, 말도 안 돼.”

다른 생존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인한시를 일찍부터 폐쇄했다는 것까지는 몰랐으나, 아무리 그래도 퍼져봐야 한두 지역 정도 넓어진 것에 불과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모두가 농담으로 여기며 손을 내젓고 있을 때도 구조대원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했다.

“아까 제유물산 얘기하셨죠? 제유물산이 어디 지역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그거야 대수시에…….”

태주가 말끝을 흐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유물산의 위치는 인한시에서 무려 180km나 떨어진 대수시 한복판이다. 두 지역 사이에 필수적으로 거치게 되는 시군구만 해도 굉장히 많은데, 좀비들이 그 모든 곳을 건드리지 않은 채 대수시를 헤집고 있을 리가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태주가 금세 사색이 되었다. 다른 생존자들도 하나둘 현실을 인지하자마자 이제 어떡하냐며 벌벌 떨거나, 그 범위 내에 있을 가족들의 이름을 흐느껴 불렀다.

안타까운 눈으로 생존자들을 바라보던 구조대원은 창밖의 불타는 노을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헬기는 머지않아 피난시설에 도착했다.

헬기장에 내려선 헬기에서 한 명씩 조심히 내리는 걸 도와주던 구조대원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헬기가 도착했다는 걸 알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헬기가 내려서는 걸 분명 피난시설 관리자들도 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보통은 구조된 생존자들을 빠르게 인계하기 위해 상시 대기 중일 텐데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헬기에서 내렸을 무렵.

드디어 헬기장에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조대원은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려 했으나 멈칫하고 말았다.

우악스러운 인상의 3, 40대 남자 다섯이 각자 손에 총을 들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구조대원과 다른 사람들이 뭘 해볼 생각조차 못 하도록 그들의 발 앞에 총을 몇 발 갈겨버렸다.

“으악!”

“사, 살려주세요!”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모두는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벌벌 떨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들은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경고성 멘트를 남발하며 낄낄거렸다. 누군가는 생존자들을 제멋대로 품평하기도 했다.

“시간 딱 맞춰서 오네. 하여튼 대단해요, 대단해.”

총을 든 한 남자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는 사람들을 눈으로 슥 훑어보다가 한 구조대원에게 총을 겨누었다. 갑자기 겨눠진 총구에 구조대원이 기겁하며 숨을 삼켰다.

“구조한 인원은 이게 다야? 남자간호사랑 검은 옷 입은 남자 셋은?”

“예, 예?”

“그 네 놈 안 태웠냐고.”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묻자, 구조대원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최대한 침착히 대답했다.

“검은 옷 남자 셋…은 모르겠고 한 명은 보, 보긴 봤는데 거기 남으셨고요…. 남자간호사님은 계셨다고 들었는데 사라지셔서…….”

말하는 중에도 계속 의문이 들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질문했던 남자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뭐야, 그럼 죄다 안 탄 거잖아? 어떻게 된 거지? 야, 일단 헬기 뒤져봐!”

남자 중 둘이 그에게 존댓말로 대답하며 헬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꼼꼼하게 여기저기 살피던 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뛰쳐나왔다.

“없습니다!”

“작업한 새끼들이 딴 맘 먹고 빼돌린 걸까요? 근데 거기서 어떻게 그 많은 장기를 들고 도망을 치죠?”

그들의 말을 듣던 남자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생존자들과 구조대원들은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의 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와버렸네요?”

이제 막 30대에 진입한 것 같은 외모의 건장한 남자는 동그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남자는 따로 누군가와 얘기를 주고받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계획은 괜찮았는데 이게 이렇게 반전이 될 정도면…….”

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남자가 해맑은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혹시 강준성이라는 사람 아는 분?”

다들 웅크리고 있던 중에 태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동그란 안경 너머에 있는 뱀 닮은 눈이 그를 단번에 포착했다.

“아저씨, 강준성 알아요?”

머뭇거리던 태주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네’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만 그렇게 대답했다는 게 뭔가 좀 억울해서 주변의 생존자들에게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다들 준성 씨 아시잖아요.”

“그, 그게 누군데?”

“아까 안 탔던 청년 말하는 건가?”

“난 강씨라는 것만 알아….”

태주가 답답한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니, 다들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해요?! 준성 씨가 얼마나……!”

“오호.”

태주와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안경 속에서 히죽 웃었다.

“아저씨는 준성이를 좀 잘 아나 봐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태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치만 살폈다. 남자는 그의 대답이 꼭 필요한 건 아닌 듯, 작게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럼 내 계획이 틀어진 게 말이 되네요. 그렇지, 그렇지.”

남자는 이번 헬기를 통해 전달되었어야 할 많은 양의 싱싱한 장기들이 송두리째 사라졌음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가 떨릴 만큼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서는 생존자들과 구조대원들을 훑어보았다. 그가 태주를 검지로 가리키며 다른 이들에게 명령했다.

“저 아저씨만 끌고 오고, 나머지는 다 수술방에 처넣죠.”

“여기 젊은 두 놈이랑 저 아저씨 말고는 다 상태 별로이지 않나요? 나이도 있고 젊어도 상태 안 좋으면 열지도 않으시잖아요.”

한 남자가 젊은 부부와 태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경 쓴 남자는 이번에 한해서만 상관없다며, 적출되는 건 저가로라도 팔아버리라는 무서운 말을 했다.

안경 쓴 남자의 명령에 의해 사람들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총을 든 다섯 남자 중 네 명이 태주를 제외한 생존자들과 구조대원들을 위협해 끌고 갔고, 남은 한 명이 태주의 얼굴에 총을 겨눴다.

“으, 으악!”

태주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꾹 감았다.

“안 쏴, 새끼야. 빨리 이동해. 넌 저쪽이야.”

남자가 눈짓했다. 그쪽엔 이미 등을 보인 채 앞서 걸어가고 있는 안경 쓴 남자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안경 쓴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태주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그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아저씨, 준성이랑 언제 만났어요? 첫날인가? 아니면 오늘 병원에서?”

남자의 말에 태주는 그저 얼어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들뜬 얼굴로 말했다.

“아니네. 아저씨는 2일 차 병원 대피 멤버가 아닌데도 거기 있었던 거 보면 준성이가 가는 길에 데려간 거죠? 그리고 보기보다 강단 있고 머리 좋지 않아요? 애가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울리면 맛있을 것 같은데 잘 울지도 않고, 그러다가 울면 또 얼마나 예쁜지 자꾸 죽여버리고 싶어서…….”

쉴 새 없이 떠들던 남자가 잔뜩 얼어있는 태주를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씩 웃었다.

“듣고 싶은 얘기가 많으니까 열심히 말해줘야 할 거예요. 내용 없으면 아저씨도 저 사람들하고 똑같이 배 까뒤집고 버려질 테니까요.”

섬뜩한 말을 하는 남자 때문에 크게 몸서리치는 태주의 귀에, 더 섬뜩하고 무서운 말이 들렸다.

“이번에 만나면 팔다리부터 잘라버려야지.”

태주가 벌벌 떨며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얼핏 본 남자의 얼굴은 잔뜩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더는 도망 못 가게.”

* * *

2일 차 늦은 밤.

인한병원 7층은 심각할 정도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조용하다….’

준성은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서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일찍 잠들기 위해 불까지 다 꺼버렸지만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문의 형태가 또렷이 보였다.

‘이 넓은 층에 둘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휑한데.’

다 같이 복작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친해진 건 아니라고 해도 그들 여섯 명에 태주까지 사라지니 좀 많이 허전했다. 모텔과 달리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만 남아 있어서 더 스산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병실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안 와?”

준성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한서의 목소리를 따라 옆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서 다른 건 구분하기 힘들어도 한서의 또렷하고 날렵한 턱선만은 눈에 띄었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그의 시선도.

“아까 마취 당해서 잠들었던 것 때문에 잠이 안 오는가 봐.”

잠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한 그럴듯한 말을 하고 나니, 한서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잠 잘 오게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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