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38)화 (38/240)

- 038회 -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한서를 밀어내는데 포기한 준성은 그냥 아예 편하게 있기로 했다.

준성은 한서를 침대 머리맡에 앉혀두고서 그의 가슴팍에 등을 대었다. 어깨에는 뒷머리를 편하게 얹었다.

한서는 자신에게 기대어 편하게 힘을 뺀 준성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포기했어?”

“응.”

준성이 짧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왜 그랬어?”

“뭘?”

“키스.”

고개를 살짝 돌려서 시선을 애꿎은 침대 옆의 먼 바닥으로 돌렸다.

“하면 안 돼?”

“안 되고 말고가 아니라 그런 건 애인하고 해야지.”

“그럼 애인할래?”

“돌았어?”

“안 돼?”

정말 순수하게 안 되냐고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한서는 약간 흐트러진 셔츠의 카라 밖으로 드러난 준성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무방비하던 표면에 입술이 닿자, 하얀 목이 흠칫하며 놀랐다. 그가 자신의 몸을 감싼 한서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야.”

“너, 그냥 충동적인 거지?”

나름대로 답을 낸 것 같은 준성의 말이 한숨처럼 들려왔다.

“꿈속에서도 자주 봤어. 이런 이상한 시기일수록 충동을 억제 못 하는 사람들.”

사방이 살아있는 시체로 뒤덮이고 이렇다 할 수단과 방법도 없이 그 안에 버려지듯 방치되었다. 통신과 인터넷을 비롯한 주요 기능은 죄다 마비되어버려서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친구, 간간이 인사를 나누던 지인까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시체가 되거나 그들에게 잡아먹혔다.

이 지옥을 멀쩡한 정신으로 올곧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 꿈속의 경험이 없었다면 역시나 도한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꿈속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그 안에서 직접 누군가를 죽여봤으니까.

그때의 감각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준성의 눈이 어둡게 내리깔렸다.

“네가 날 만나기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무법지대가 되었으니 충동적으로 그럴 순 있다고 생각해. 아까처럼 성별 무관하게 장난쳐보고 싶은 충동도 마찬가지고.”

준성은 자신이 세워둔 벽을 차곡차곡 넘어오는 도한서에게 조금 관대해지기로 했다. 그에게 빚진 기분이 있기 때문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백신’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도한서가 백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에게 있어 그는 동생 강채이만큼이나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가 됐다.

“지금부터는 한 가지 약속해 줘.”

“뭘 어떻게 약속해줄까?”

뒤에서 들리는 한서의 목소리가 즐거운 듯 들려왔다. 돌아보면 왠지 그가 이때까지와 달리 인간미 있게 웃고 있을 것 같다.

“곧 구조헬기가 오니까 이제 상관없는 약속이 될 테지만……. 정당한 경우가 아니면 죽이지 마.”

준성은 구조헬기에 태워 보낼 한서를 생각하면서도, 만일 그게 불발되었을 경우도 고려해 입을 열었다.

“반대로 정당한 경우라면 죽여야 해. 네가 살아야 하니까.”

백신인 너만은 절대 죽으면 안 되니까.

준성의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서가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물었다.

“그 정당한 경우라는 건 네가 위험할 때도 해당되는 거지?”

“그래.”

목으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동그랗게 말아놓은 기분 좋은 웃음을 목 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다가 삼킬까 뱉을까 고민하는 느낌.

“그럼 약속해줄래? 내가 이상한 충동이 좀 자주 오거든.”

나긋나긋한 낮은 목소리가 준성의 귀를 자극했다.

“그럴 땐 네가 억제해주면 안 될까? 무슨 방법으로든.”

준성은 기껏해야 아까 같은 충동적인 키스 정도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와 키스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도 않았고, 입술 정도 내주는 거로 한서가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세계에서는 자신의 감정과 정신 상태를 다스리는 게 가장 급선무니까.

“그래.”

한서가 또 한 번 작지만 유쾌하게 웃었다.

준성을 끌어안은 손이 올라와 그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 그러고선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를 보게 했다.

한서의 진한 검은 눈동자와 그의 얇고 긴 미소가 준성의 시야를 장악했다.

“좋아.”

기분 좋게 대답한 한서의 얼굴이 준성에게 가까워져 갔다.

“네가 내 충동의 억제제가 되는 거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억제제의 역할을 알려주듯, 한서의 입술이 이내 준성의 것과 맞붙었다.

* * *

“준성 씨!”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제자리를 이리저리 서성이며 초조해하던 태주는 약간 붉은 얼굴로 병실 문을 열고 나온 준성을 환하게 반겼다.

“이제 괜찮아요?”

태주는 반가운 나머지 준성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고 흔들어댔다.

“걸어 다닐 수 있겠어요? 어지럽거나 토할 거 같진 않아요?”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뇨!”

갑자기 터진 큰 목소리에 준성이 흠칫했다.

“준성 씨가 아니었다면 전 아마……! 아….”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던 태주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준성은 자신의 뒤에 선 자가 얼마나 무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언제 흥분했었냐는 듯이 금세 하얗게 질린 태주가 준성의 손을 후다닥 놓았다. 그는 혹시 주변에 사람이 있진 않을지 살피며, 끊겼던 말을 어눌하게 이었다.

“어, 그…러니까……. 아, 아마 큰 볼일을 봤을 거라고요! 예, 큰 볼일…….”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5층에서 있었던 일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잘 대해주던 간호사가 실은 장기매매를 위해 생존자들을 하나씩 수술대에 눕혔던 사람이라니.

다른 생존자들이 알았다가는 엄청난 패닉에 빠지고 말 거다. 어차피 곧 구조헬기가 오면 아늑한 곳으로 가서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텐데, 괜한 공포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

다행히 각자 자신의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태주는 준성과 그의 뒤에 있는 한서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구해주시고……. 정말 생명의 은인이세요.”

허리를 세운 태주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도 연락 닿으면 밥 한 번 쏠게요.”

배시시 웃은 태주가 한 번 더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냉큼 자신의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준성은 태주가 들어간 병실 문을 바라보며 한서에게 물었다.

“5층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응. 알려봐야 좋을 거 없을 거라서.”

“잘했어.”

준성이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마취제 때문에 잠들어 있느라 직접 다 파악하진 못했지만, 자신을 대신해 정보를 모은 한서가 많은 걸 알려주었다.

당연하지만, 5층에 있던 세 사람과 가짜 박현제 간호사는 모두 한패였다.

그들은 비상계단 1층 문부터 4층까지 친절하게 좀비가 있다는 걸 빨간 글씨로 적어서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서 좀비가 있는 층은 글씨가 쓰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 글씨가 없는 층은 안전지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글씨가 없는 층에는 좀비가 없긴 하나, 그들보다 더 무서운 자들이 5층에 머물고 있었다.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에서부터 올라온 자들은 5층쯤 다다랐을 때 체력이 어느 정도 소진된 상태일 게 뻔했고, 글씨가 없는 문을 보며 이젠 쉴 수 있다, 살았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들이 건강한 2, 30대이자 혼자라면 곧바로 검은 옷의 남자들에게 잡혀 수술대로 가는 것이다. 나잇대가 40대를 넘었거나 몸이 건강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다면 위층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가짜 간호사를 불러서 그들을 7층으로 안내했다.

이런 방식으로 한 명씩 장기 적출 수술을 하던 이들은 오늘 이 병원에 구조 헬기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시간에 맞춰 7층의 문을 폐쇄한 뒤, 자신들끼리만 옥상에 올라서 헬기의 구조대원들을 살해. 본인들이 헬기를 탈취해서 장기들을 모두 아지트로 옮기려 했다.

좀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쉽게 살인이 가능해진 지금 같은 시기엔 해외브로커를 이용한 장기 밀매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갑자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유일한 지역이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에서 생존자들을 그렇게 무참히…….’

도덕심이 엄청 높다고 자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5층의 무리가 한 짓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어쩌면 나에게 개인 병실을 주려고 했던 이유가 수술대에 제일 먼저 눕혀놓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네.’

준성은 병실을 내주던 박현제가 왜 자신에게 1인실을 권했는지 알 것 같았다. 태주와 방을 바꿨을 때 탐탁지 않아 하던 얼굴의 이유도.

자신이 제일 약해 보였을 거란 생각에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던 준성은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걸 느꼈다.

“구조헬기가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었지? 오후 4시에 올 거라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었잖아.”

준성의 의문에 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물어봤었는데, 위에서 그렇게 통보가 왔대.”

“위라면…….”

“그놈들 보스.”

이상한 일이었다. 장기매매를 업으로 하는 자들의 보스가 어떻게 구조헬기가 이 병원 옥상에 도착할 걸 알지?

준성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구조헬기의 배치가 결정된 건 오늘 오전이야. 인한시의 통신망은 어제 오후부터 끊겨 있었는데 어떻게 구조헬기의 배치 위치와 시간을 미리 알 수가 있지?”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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