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5회 -
태주의 오른팔을 묶은 두꺼운 가죽띠를 마체테로 내리찍어 끊어주었다. 뒤이어 머리를 고정한 같은 두께의 가죽띠 역시 끊어주었다.
다음으로 발목의 것을 빠르게 잘라주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읏….”
눈을 한 번 깜빡인 것뿐인데 두 무릎이 땅에 닿아 있었다. 제법 세게 떨어졌을 무릎이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마체테를 굳게 잡았던 손은 자꾸만 손가락이 느슨하게 풀리려 했다. 꼿꼿이 들고 있던 머리도 어느새 앞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몸의 모든 감각이 빠르게 마취되고 있었다.
‘마취제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 빠른데.’
처음에는 어떤 약물일지 몰라서 절대 맞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제가 ‘눈뜰 때 맞춰서’라고 발언하는 걸 보고는 분명 마취제나 강한 안정제 종류의 약물이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일단 생명에 크게 지장이 갈 리가 없다. 몸에 완전히 퍼지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몇 초는 될 테니 그 안에 어떻게든 현제를 밀어내고 태주를 풀어주면 될 거라 생각했다. 둘이서라면 현제를 제압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마취가 시작되는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이 새끼!”
화난 현제가 수술 도구 트레이에 있던 길고 뾰족한 핀셋을 집어 들었다. 일반적으로 쓰는 핀셋과는 길이와 뾰족함부터 남달랐기에, 저것에 찔리면 메스보다 더 아플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준성이 마비 때문에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마체테를 굳게 잡아 들려던 때였다.
“컥!”
현제의 목에 메스나 긴 핀셋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나이프가 박혔다.
얼핏 보기에 현제의 목에 파고든 칼날이 그리 길지는 않아 보였으나, 손잡이 부근까지 박혀버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만한 칼날이 목을 꿰뚫었는데 죽지 않을 수가 없다.
“커, 컥……, 크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핏물로 가글을 하는 듯한 그르렁거림이 무섭게 들려왔다.
눈알이 빠질까 봐 무서울 정도로 부릅뜬 현제의 눈이 자신의 목에 칼을 박아넣은 자에게로 드륵드륵 굴러갔다. 상대를 보기 위해 눈을 돌리고 머리를 돌리면서 목도 함께 조금씩 돌아가, 칼이 박힌 부위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후두둑, 하는 핏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무렵.
“아, 실수했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자의 입가에는 가짜가 분명한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반면, 볼에 점점이 튄 핏물이 잘 어울리는 창백한 피부의 남자는 현제를 구성하는 모든 걸 찢어발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섬뜩하고 흉폭했다.
입에서 피를 토하는 현제의 귀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담긴 도한서의 작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우리 준성이 만졌던 손모가지부터 잘라놓고 죽였어야 했는데.”
목소리에 담긴 지독한 살기가 현제를 압박했다. 한서는 벌벌 떠는 현제를 보며 그의 목에 박혀있던 잭나이프를 서슴없이 뽑아내었다. 그러자 뽑힌 자리에서 피가 울컥 튀어나와, 그의 하얀 간호사복을 흠뻑 물들여나갔다.
수술실 안은 현제의 진한 피 냄새로 가득 차버렸다.
한서는 비틀거리는 현제를 벽에 내동댕이치듯 밀쳐버렸다. 단단한 벽에 머리와 몸을 찧은 현제가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목에서는 더 이상 숨을 쉬는 쇳소리가 나지 않았다.
“준성아.”
현제에게 가려져 있던 준성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준성의 손에서는 이미 마체테가 떨궈져 있었고, 두 팔과 어깨는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두 다리 역시 움찔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는 건 절대 무리인 것 같았다.
고꾸라져서 쓰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마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무서운 눈으로 준성의 상태를 살피던 한서가 준성의 쏟아진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좀 더 많이 드러나게 된 얼굴이 수술실 조명을 받아서 더욱 하얗게 빛났다. 다음으로는 목 언저리를 손으로 살짝 감싸 보았다.
체온과 혈색이 그대로인 걸 확인한 한서의 눈가가 조금 누그러졌다. 맥박이 느리긴 해도 충분히 정상범주다.
한서는 굳이 준성에게 뭘 맞았냐고 묻지 않아도 그가 무슨 약물을 주입 당했는지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준성이 점점 감겨가는 눈으로 한서를 바라보았다.
“죽…였어…?”
약간 어눌하게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응.”
한서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너 죽일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죽여버렸어.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태평한 목소리가 피 냄새와 전혀 어우러지지 않는다.
준성의 눈이 천천히 현제에게로 옮겨갔다. 벽에 기대어 쓰러진 채로 푹 숙인 머리가 보였다. 그의 목에는 여전히 새빨간 피가 지칠 줄 모르고 흘러나왔고, 더는 그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박현제는, 죽어버렸다.
‘진짜 죽었어….’
눈으로 봐도 현실감이 없다.
‘내 손으로 했으면 달랐겠지.’
준성은 한서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에 의외로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마취제 때문에 머릿속과 감정까지 둔화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점점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빌어먹을 쓰레기야….’
겨우 버티고 있던 준성의 몸이 앞으로 푹 쓰러졌다. 한서는 그의 몸을 끌어안듯 받아주었다. 정신을 잃은 준성이 내뱉는 느리고 깊은숨이 한서의 목과 뒷머리 끝을 감싸 쥐었다.
준성의 등을 피가 묻지 않은 왼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쓸어주고 있을 때.
수술대에 앉아 벌벌 떨고 있던 태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어찌나 놀랐는지, 준성이 손과 머리의 결박을 풀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 손과 다리를 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뺀 게 전부다.
태주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현제를 바라보았다. 아직 충분한 온기가 남아있지만 금세 식어버릴 게 분명한 ‘시체’다.
“우, 우앗…. 시, 시체…. 살인…!”
문장도 다 만들지 못해서 단어만 입 밖으로 뻐끔거리던 태주는 자신을 슬쩍 올려다보는 한서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히익!”
숨을 들이켜며 비명을 삼킨 태주가 눈에 띄게 허둥거렸다. 그는 뒤늦게 발목에 가죽띠가 채워져 있다는 걸 알아채고서 얼른 그것부터 풀기 시작했다. 보통은 아직 묶여 있는 다른 쪽 손부터 푼 다음에 다리를 풀어야겠지만, 그마저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태주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아저씨.”
“네, 네?!”
손이 떨려서 한 개도 제대로 풀지 못한 태주가 한서의 부름에 딱딱히 굳어 대답했다. 그에게 한서가 피로 물든 오른손을 내밀었다.
“거기 옆에 녹색 천 좀 줘봐요. 굳기 전에 닦아야 해서요.”
“아, 예!”
수술대 옆의 트레이에 얹어진 녹색의 수술용 타올을 집어 든 태주가 그것을 든 채 일순 머뭇거렸다. 차마 사람의 피가 묻은 한서의 손에 제 손끝을 대진 못하겠기에 살짝 떨어뜨리듯 건넸다.
한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른손에 묻은 피를 싹싹 닦아내었다. 그 손으로 휘둘렀던 잭나이프도 대충 닦아냈다.
“올라가서 준성이 눕혀놓으면 병실 문밖에서 잘 지키고 있어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고.”
“예?”
어벙하게 대답하니, 한서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딴 놈이 얘 무방비하게 자는 거 보게 하지 말라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일 기세였다. 아니, 정말 죽일 거다.
공기가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고 마른침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호흡할 때마다 들어오는 피 냄새가 온몸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태주가 울먹이면서 손목과 발목의 가죽띠를 푸는 동안, 한서는 준성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전에 똑같이 안아 들었을 때 비해 무게감은 좀 더 만족스러워졌다. 그 이유가 정신을 잃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 무게를 유지하게 하려면 어느 정도 찌워야 하나, 같은 태평한 생각을 하게 된다.
준성을 안아 든 채 수술실을 나서자, 그 뒤를 태주가 황급히 따랐다. 늦었다가는 따끈한 시체와 수술실에 함께 남아있어야 할 판이니 마음이 급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종종걸음으로 한서의 뒤를 쫓던 태주는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으, 으으….”
“흐…억….”
하얀 복도와 대비되는 검은 옷의 남자 셋이 피 칠갑을 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태주는 그들이 자신을 수술대에 묶어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성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그들의 몰골을 보고 순수히 고소해 할 수가 없었다.
남자들을 지나는 한서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다들 숨 좀 고르고 있어.”
감정 없는 목소리가 검은 옷의 세 남자를 흔들어댔다.
“내가 다시 왔을 땐 편하게 숨 쉴 틈도 없을 거야.”
한서는 그 말을 남기고서 로비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태주는 이 틈에 저 남자들이 도망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발목마다 흥건히 배어 나오는 피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