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2회 -
답을 내린 후에도 준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을 맞잡아 쥐고 있던 손끝이 하얗게 눌려서는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무서워?”
정적 속에서 한서가 물었다.
여전히 홀로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있던 그가 준성과 마주 보며 앉아 있던 침대에서 내려섰다. 가까이 다가간 그의 손가락이 준성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알려줘.”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미 상황파악은 끝났다.
자신들과 이곳의 생존자들은 살인자들 소굴에 와 있었다. 그들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5층에서 젊은 사람들을 끌고 가는 건 확실했다.
꿈속에서 최악의 회차마다 빠지지 않고 일어났던 일이 현실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준성은 수많은 꿈을 통해 이런 재난사태를 기회로 여기고 본인의 이익과 희열을 위해 같은 인간을 서슴없이 죽이던 자들을 많이 보았다. 마음을 열었던 동료가 실은 인간을 사냥하던 살인마였던 적도 있고, 자신이 그 수많은 희생자 중 한 명이 될 때도 있었다. 잔인하고 끔찍한 자들이었지만, 꿈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흘려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스스로를 위해 인간을 죽이는 자들이 가짜 박현제처럼 사람 좋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그 한복판에 자신이 있다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무섭지만, 그렇다고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영웅 심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서를 내보내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도한서만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내보내야 했다. 자신이 찾은 해결책보다 더 완벽한 백신 그 자체가 여기 있으니, 한서만 구조헬기를 타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이런 좀비 사태쯤은 며칠 안에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값은 누구도 정할 수 없고 귀함의 차이도 없다지만, 준성은 도한서에 한해서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한서야.”
“응, 준성아.”
이름을 부르자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응답해왔다.
준성은 자신의 앞에 두 무릎을 세워 쭈그려 앉은 한서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커서 언제나 올려다보는 것만 가능했던 녀석이 지금은 자신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제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령을 내려주길 원하는 훈련 잘 된 맹견처럼.
준성의 손이 한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죽어도 너만은 살려 보낼게.”
한서의 여유로운 입가가 살짝 어그러졌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준성을 주목했다.
“너…….”
한서가 묘한 눈으로 입을 열 때였다.
똑똑똑똑-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성은 밖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바짝 긴장했다. 바로 직전까지 죽고 사는 생각을 거듭했기 때문에 몸이 더 굳어버리는 것도 있었다.
준성을 대신해 한서가 문을 열어 상대를 확인했다.
“오? 뭐야, 김씨 여기도 없네.”
노크한 사람은 다행히도 첫 번째 대피자인 40대 골초 남자였다.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가 조금 떨어진 침대에 앉아 있는 준성에게도 닿았다.
병실 안을 고개까지 내밀어서 둘러보던 남자는 눈앞에서 제게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한서를 보고 움찔했다.
“아, 거, 미안해요. 김씨랑 친하다고 들어서 혹시 여기 있나 했지. 없으면 됐어요.”
준성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마도 김태주일 건데, 그라면 아까 본인 병실로 돌아갔었다. 낮잠이라도 잠깐 자고 있을 테니 또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단순히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운 거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불길할 수밖에 없다.
돌아서려는 남자에게 준성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태주 아저씨 찾으시는 거죠? 병실에 안 계세요?”
“없어요, 없어. 배고파서 간호사 쌤이라도 찾아갔나 했는데 거기도 없더라고.”
남자가 눈을 위로 떠서 이리저리 굴리더니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밥때 됐는데 간호사 쌤도 없네. 나도 슬슬 배고픈데…….”
가짜 박현제는 생존자들의 비상식량까지 시간 맞춰 챙겨주는 좋은 간호사라는 평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을 짐작하고 있는 준성에게 있어 김태주와 박현제가 둘 다 사라졌다는 사실은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준성은 자신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병실을 뛰쳐나갔다. 가장 가까운 태주의 병실로 가봤지만 역시나 텅 비어있었다.
“한서야, 화장실하고 샤워실 확인 좀 해줘.”
뒤따라온 한서에게 다급히 부탁한 준성이 이번엔 박현제가 있어야 할 간호사실로 뛰어갔다. 준성이 급하게 뛰어다니는 걸 본 몇몇 사람들이 ‘뭐야, 뭐야?’ 하며 서로 무슨 일이냐고 속닥거렸다. 직접 물어보기엔 뭔가 심각해 보여서 붙잡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간호사실 안으로 뛰어들어간 준성은 인기척 없는 내부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을 둘러보다가 ‘비품실’이라 적힌 문을 발견했다. 그 아래에는 흰 바탕에 빨간 글씨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혀 있다. 보통은 그 문구를 보고 돌아서겠지만, 지금의 준성은 아니었다. 얼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안에는 말 그대로 갖가지 비품들이 가득했다. 병동관리를 위해 필요한 물품들이 대부분 다 여기 모여 있었는데, 개중에는 비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도 보였다.
여성용 명품 클러치백, 정장 셔츠 소매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사용하는 커프스, 그리고… 금이빨 두 개.
왜 저런 것들이 간호사실 옆 비품실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비품실에 이질감을 가져온 세 물건을 바라보던 준성은 숨을 삼켰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것들을 보고 고개만 갸웃하고 갈 정도로 연결점 없는 물건들이지만, 같은 날을 반복한 수많은 회차의 기억을 가진 준성이라면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대피자가 언제나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들고 다녔던 클러치백.
두 번째 대피자가 셔츠 소매에 끼워놓던 커프스.
다섯 번째 대피자가 웃을 때마다 훤히 드러나던 금이빨.
모두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물건들이었다.
준성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주춤했다.
역시나 그들은 이곳에 있었다.
7층에 오기도 전에 사라졌을 뿐.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자들의 물품이 가짜 간호사, 박현제가 관리하는 비품실에 던져져 있었다.
준성과 한서가 추론하던 것은 결국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준성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비품실을 뛰쳐나갔다. 때마침 한서가 다가와 고개를 저었다.
“7층 어디에도 없어.”
그 말은 곧 아래층으로 갔다는 거다.
“아저씨가 위험해.”
어질어질할 정도로 혈색이 옅어진 준성이 그들의 병실로 향하며 한서에게 부탁했다.
“내가 5층으로 가볼 테니까, 넌 사람들이 혹시라도 아래층으로 못 내려오게 막아줘.”
“너 혼자 가겠다고?”
준성은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마체테를 집어 들었다. 그걸 한서가 단번에 빼앗아갔다.
“갈 거면 나도 같이 가.”
한서를 돌아본 준성은 어제 터널에서의 일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좀비들을 유인하고자 목숨 걸고 달릴 생각을 했던 그때도 한서는 지금처럼 같이 가자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이 백신 그 자체라서 안전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번과 같은 상황은 상대가 ‘사람’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닐 확률이 높은데 그 위험천만한 곳에 한서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멀쩡히 나가야만 했기에.
“아니, 넌 못 가. 여기 남아 있어.”
“싫어.”
“넌 여기 남아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한서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그의 얼굴엔 여유로움 대신 오만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한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준성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달라진 시선과 위압감은 준성을 뒷걸음치게 했다.
“좀비 때려잡듯이 사람 머리도 박살 내버릴 거야?”
서늘한 칼등이 목을 쓰다듬는 느낌이 났다.
“아니면 칼로 쑤셔보기라도 하게?”
한발씩 내디디고 물러나는 동안, 어느새 준성은 병실 한가운데를 지나 자신의 침대 가까이에 와 있었다.
등 뒤에 침대가 턱, 하고 부딪쳐서 한서의 시선을 의도치 않게 피한 순간.
“……!”
준성의 몸이 와락 당겨졌다.
“그러고 보니 네가 꾼 예지몽들 얘기해줄 때 말이야.”
한서는 준성을 품에 꽉 끌어안은 채, 그의 허리춤에 있는 마체테에 손을 얹었다. 준성은 허리벨트에서 마체테와 그 검집이 풀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숨 막히는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얘기는 해준 적이 없네. 나한텐 중요한데.”
준성의 귓가에 한서의 냉랭한 숨결이 닿았다.
준성은 자신을 겨누듯 감싸고 있는 기묘한 공포와 차디찬 냉기에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는 한서에게 온 신경이 곤두섰다.
조금만 움직이면, 죽을 것 같다.
칼이 겨눠진 것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서의 낮은 목소리가 어린아이에게 나쁜 속삭임을 넣듯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우리 준성이….”
그에게 불리는 이름이 제 것이라는 사실이 더한 공포를 가져왔다. 준성은 언젠가 꿈에서 ‘그 사람’에게 느껴본 적 있는 이 공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한서의 붉은 입술이 귀를 스치며 움직거렸다.
“사람, 죽여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