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닷 (30)화 (30/240)

- 030회 -

“신체검사는 다 끝났으니 옷 입으시고, 이따가 간호사실로 오세요. 드레싱 좀 해드리고 필요하시면 진통제도 챙겨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당연히 해드려야 할 걸 하는 건데요, 뭐. 아참, 다른 사람들한텐 물린 상처라는 거 비밀로 하시고요.”

현제가 작은 소리로 당부하며 붕대를 깔끔히 감아주었다.

“다 됐습니다. 그럼 먼저 나가서 쉬실 곳 정리해둘게요.”

아까의 이상한 시선을 품은 눈빛은 준성이 잘못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현제는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해맑은 얼굴로 먼저 병실을 나섰다.

벗었던 옷을 챙겨 입던 준성은 셔츠 단추를 채우다가 문득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현제가 감아준 붕대는 한서가 해줬던 것보다 더 깔끔하고 단단했다. 이런 게 전문의의 손길인가.

‘단순히 이름이 똑같은 다른 간호사…인가? 하지만 우연으로라도 그게 가능해?’

다른 사람의 이름과 복장, 명찰까지 그대로 훔쳐 쓰고 있는 데다가 꿈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현실에서 처음 만났던 도한서처럼.

‘또 뭐가 어떻게 틀어진 거야?’

준성은 또 어디서 시작된 나비효과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현제가 먼저 나가고 곧 한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손, 괜찮았어?”

한서 역시 오른손의 물린 상처를 우려했었던가 보다.

준성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는 그런 준성을 옆에서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어디서 뭐가 바뀌었기에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저 간호사를 말하는 거야?”

“간호사도 그렇고, 7층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이 시간에 7층에 다다라 문을 열었을 때, 꿈에서였다면 여섯 명이 아니라 그 두 배가 넘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어야 했다. 여섯 명 모두 꿈속의 7층 로비에서 봤던 인물들과 같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정상적으로 여기에 대피해있었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준성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두 달간 직접 움직이고 체험했던 미래가 점차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간 모처럼 알고 있던 선택지의 결과나 갖은 정보마저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다.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기억하는 꿈속의 정보를 정말 믿어도 될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차라리 머릿속의 정보를 다 지워버리는 편이 나을까.

그러면서도 머릿속 한쪽에서는 여태껏 꿨던 꿈들의 다양한 갈림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서 무슨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져 갔던 미래를.

‘하지만 이렇게 다 달라질 것 같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두 달간의 꿈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의 정신 상태는 벌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내가… 뭘 또 잘못한 걸까?”

준성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상처에서 열이 나고 있기에 손이 더 뜨거워야 정상이었지만,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준성의 이마 쪽이 조금 더 온도가 높았다.

“내가 미래에 변화를 줄 만한 짓을 해서 이렇게 된 거겠지? 뭐 때문일까? 뭘 했길래 매번 똑같았던 병원 상황이 바뀐 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중간부터 차로 이동했어야 하는데 좀 더 일찍부터 차를 썼던 거? 태주를 구한 거? 아니면 모텔에서 푹 쉬어버린 거? 그도 아니면…….

추론을 위해 되짚다 보니 한도 끝도 없었다. 게다가 그것들 대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 자체에 영향을 줄 만한 일들이 아니었다.

“준성아.”

터질 만큼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준성에게 한서의 여유로운 말이 들렸다.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런 생각보다는 네가 하려고 했던 일에만 집중해.”

한서는 셔츠와 바지만 덜렁 입은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준성의 허벅지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한서의 키가 큰 편이라서 시선이 너무 쑥 올라가자, 준성은 복잡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어차피 네가 할 일은 똑같잖아.”

한서는 흐트러짐 없이 능숙히 들어 올린 준성을 병실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아직 미처 채우지 못한 단추를 채워주었다.

한서가 단추를 하나씩 채워줄 때마다 준성의 머릿속이 조금씩 차분해져 갔다.

‘맞아…. 내가 해야 할 일은 어차피 똑같아.’

머릿속 한구석에 혼재되어 있던 두 달간의 꿈속 기억들이 차례차례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날의 길을 따라서 이 사태의 해결책을 손에 넣는 거야. 마지막 꿈에선 얻자마자 죽어버렸지만, 이번만큼은 꼭 살아남아서 가지고 나가야지. 그래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꿈에서는 한 번도 이뤄내지 못했던 좀비 사태의 종식, 그것도 단기간의 종식을 위해서는 그 해결책을 빨리 전달해서 한시바삐 백신 개발에 들어가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준성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서를 결연한 눈으로 응시했다.

‘도한서를 이곳에서 안전히 내보내야 해.’

꿈에서조차 찾지 못했던 백신이자 친구이니만큼 그는 꼭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자신과 떨어지게 되더라도.

준성의 시선이 이번엔 병실 밖을 향했다. 그 너머에 있을 수상쩍은 간호사에게 신경이 쏠렸다.

‘그러려면 이 꺼림칙한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해야겠지.’

* * *

삐빅-

“남자 세 명 추가.”

간호사실 안에 있는 비품실로 들어온 현제가 작은 직사각형의 무전기에 대고 짧게 말했다.

잠시 후, 무전기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로 온 거야? 좀비 때문에 더는 올 수 있는 길도 없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오긴 오네.

낄낄거리던 무전기 너머의 남자가 진지하게 물었다.

-상태는 어때? 쓸만해?

“둘은 20대, 하나는 30대. 전부 깨끗하고 건강해.”

-좋네. 그럼 셋 다 작업 준비해두면 되나?

복도에 뛰쳐나오던 여섯 명의 대피자들을 떠올린 현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 없으니까 차라리 썩은 것들은 버리고 가자.”

-아, 헬기가 4시에 오던가? 5시간이면… 확실히 전부 다 작업하는 게 빠듯하긴 하네.

“한 놈씩 빼내서 작업할 수 있는 놈들 먼저 보내고, 나머지 중에 건강한 놈들만 헬기 태워서 데려가면 되겠지.”

-알았어. 지금 작업 중이던 것도 거의 끝나니까 언제든 내려보내.

그렇게 무전을 마치려다가 멈칫했다.

“근데 좀 이상해.”

-뭐가?

“방금 온 세 명 말이야.”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하긴, 좀비 새끼들이 너무 많아져서 거기 7층에 남아있는 놈들 말고는 더 이상 없을 줄 알았지.

“그것도 그거지만…….”

말꼬리를 늘이던 현제가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5층 문, 진짜 아무 알림도 없었던 거 맞지?”

-알림 왔으면 너한테 무전부터 했겠지.

“역시 이상한데.”

손으로 턱을 쓸던 현제가 의문 담은 눈동자를 굴렸다.

빠른 ‘그 작업’을 위해 동료들은 수술방이 있는 5층에 머물기로 했다.

대피자들로부터 이들을 숨기고 5층 진입을 막기 위해, 편히 쉴 수 있는 다수의 입원실이나 예비전력을 아껴야 한다는 핑계로 모두를 7층에 몰아넣었다. 그러고선 5층의 각 비상계단 쪽에는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시도만 해도 동료들이 가진 기계에 알림이 오도록 해두었다.

혹시라도 새롭고 싱싱한 누군가가 5층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동료들이 그 즉시 잡아서 작업대로 끌고 가기 위해. 싱싱하지 않다면 현제에게 신호를 보내서 7층으로 올리도록 하려고.

그런데 알림이 없었다는 건, 그 세 명이 5층을 지나면서도 그곳의 문을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7층으로 온 게 마음에 걸려.”

-옥상에서 구조라도 기다려보려고 그랬을 수 있지.

“아니, 그랬으면 비상계단 끝에 있는 옥상으로 바로 올라갔을 거야.”

-음….

무전기 너머의 남자가 곧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 몰라. 목숨줄이 긴가 보지.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을 써.

남자의 말에 현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작업해야 하니까 끈다.

현제는 잠잠해진 무전기를 노려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풀고 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너무 별거 아닌 것까지 신경 쓰는 건가?’

남자의 말처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작업대에 올라가는 건 똑같을 테니까.

비품실 서랍에 무전기를 넣던 현제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에 멈칫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닮았는데…….’

그는 아까의 세 남자 중 한 명을 떠올리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몽타주나 사진이라도 있으면 비교라도 하겠는데 인상착의와 분위기 정도만 전해 들은 거라서 확실치가 않다.

‘아닌가? 뭐, 형님이 ‘그 꿈’에서 봤다던 놈은 오늘 병원에 없었다고 했으니 다른 놈이겠지.’

현제는 인상착의 닮은 다른 사람일 뿐이겠거니 하며 생각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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